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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악마가 받을 대가 (42/323)

42화. 악마가 받을 대가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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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파르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16549728770941.jpg“어어- 잠깐, 잠깐! 우리 초면인 것 같은데, 같은 악마끼리 너무 공격적이신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탁월한 전투 능력과 비상한 두뇌를 인정받아 단번에 고위 악마의 자리를 차지한 제파르였다. 마왕 바알과 최고위 악마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를 마주하든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 그가 동쪽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는 과거의 망령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6549728770941.jpg‘착각이었겠지.’

조금 전에 느낀 기운은 분명 착각일 것이라 생각하며 제파르가 애써 굳은 몸을 풀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끝내자 다시 용기가 솟아올랐다. 제파르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손목을 돌렸다.

16549728770941.jpg“댁이 평안한 동쪽에서 잠이나 잘 동안 중앙에선 얼마나 피 튀기는 서열 전쟁이 있었는지 알고 있나?”

16549728770956.jpg“…….”

16549728770941.jpg“그쪽이 동쪽으로 도망가 버리지만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 서열 끄트머리나 차지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 시대와 지금 이 시대는 격이 다르거든.”

그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봐라. 본디 이야기는 시간을 덧입으며 전설이 되어가는 법이었다. 눈앞의 악마 또한 그러한 경우임이 분명했다. 그 위명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 강하다는 힘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면, 왜 마왕의 자리를 노리지 않았겠는가. 모두가 염원하는 바로 그 자리를. 실력은 모르겠지만 그 이름값 하나는 마계를 짓누르고도 남는 동쪽의 지배자.

16549728770941.jpg‘저자를 꺾으면 단숨에 명성을 날릴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제파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 빠각. 눈 쌓이는 소리만 가득한 고요한 설원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동(東)마계의 지배자는 한 치의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 있었기에 그 소리가 제 다리에서 기인한 것임을 제파르가 눈치채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그 순식간에, 손짓 한번 없이, 대체 어떻게?!

16549728770941.jpg“으-!!”

방심했던 제파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아가레스가 발한 묵직한 마기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내 둔중한 기운이 제파르의 목을 죄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고통으로 한껏 벌어진 제파르의 입에서는 끅끅거리는 숨 막힌 소리만 새어 나왔다.

16549728770956.jpg“조용히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려웠나.”

아가레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짧은 비명에 혹시라도 이벨리아가 깼을까 품 안을 내려다보던 아가레스는, 그의 작은 친구가 곤히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허공에 떠서 버둥대는 제파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쪽 팔로는 이벨리아를 단단히 받쳐 안은 채로.

16549728770941.jpg“커헉-!”

조금 전보다 더욱 진해진 어둠이 마치 목줄을 죄듯 감겨온다. 단순히 숨을 쉬지 못하여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폐부 깊숙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기운이 들어차는 감각이었다.

16549728770941.jpg“끄으……!!”

괴롭게 몸을 뒤트는 제파르를 보는 아가레스의 눈이 위험스레 가라앉았다.

16549728770956.jpg“감히, 내 것에 이토록 상처를 내고.”

뿌드득, 오른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여전히 비명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16549728770956.jpg“이 작은 아이를 이렇게 떨게 만들고.”

이번엔 왼쪽 다리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오른팔과 오른 다리의 고통으로 인하여 이제는 어느 곳이 새로이 부러졌는지 그 감각조차 애매했다.

16549728770956.jpg“울게 만들었으니.”

한층 더 강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속이 뒤집힌다.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이벨리아가 방울방울 흘린 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한 양의 피가 울컥 흘러 눈 위를 적셨다.

16549728770956.jpg“어떻게 해야 할까.”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음성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보다 더욱 시리게 박혀든다. 일순 이벨리아가 품 안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느새 잃어버린 털 망토와 여기저기 찢어진 드레스는 방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16549728770956.jpg‘이런.’

이벨리아를 안은 팔을, 아가레스가 그의 날개로 감쌌다. 한층 따뜻해진 듯 날개에 볼을 비비는 어린 짐승과도 같은 몸짓이 느껴진다. 그래도 어딘가 마음이 불편하였던 아가레스가 심연과도 같은 마기를 피워 올리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인간계에 익숙지 않은 침입자를 내쫓으려는 듯 맹렬히 휘돌던 눈보라가 뚝 멈추었다. 허공에서 날리던 그 상태 그대로. 이를 본 제파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16549728770941.jpg‘어떻게 저게……!’

이곳은 마계가 아닌 인간계였다. 마족들이 힘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계. 이 세계의 기운을 받아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손짓 한 번에 움직임을 멈춘다는 것은, 이 인간계가 한낱 악마의 힘에 눌려 복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 어떻게.

16549728770941.jpg‘어떻게 고작 한 악마가 감히 한 세계를 복종하게 만들어.’

16549728770956.jpg“왜. 놀랐나?”

입꼬리를 슬며시 올려 웃는 악마, 아니, ‘지배자’는 이제 제파르에게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격 높은 존재로 보였다. 감히 용기나 치기로 버틸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그럴 상대도 아니었다. 문득 제파르의 뇌리에 한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16549728770941.jpg“설마…… 당신…….”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제파르의 입술은, 아가레스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자 곧바로 다물렸다.

16549728770956.jpg“……그건 비밀인데. 눈치가 영 없네. 아니, 있다고 해야 하나.”

무료한 어조에 서린 불쾌한 감정을 눈치챈 제파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원했다.

16549728770941.jpg“비밀로 하겠습니다!! 비밀로!! 그 누구에게라도……! 그러니, 사, 살려…….”

16549728770956.jpg“흐음-.”

아가레스가 나직한 소리를 내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16549728770956.jpg‘어떻게 죽여야 우리 꼬맹이가 덜 서러워할까.’

죽일 방법을 고심하는 것이었으나 제파르는 눈앞의 지배자가 자신의 생사 여부를 고민하는 것으로 깊게 오해했다.

16549728770941.jpg“살려만 주시면, 당신의 측근으로 충성을…….”

그리하여 더욱 비굴하고 간절하게 목숨을 구걸하는데.

16549728832989.jpg“히잉…….”

이벨리아가 살짝 몸을 뒤척이며 칭얼거렸다. 아가레스는 그 자그마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제파르에게 두었던 시선을 품 안으로 내렸다.

16549728770956.jpg“쉬이…….”

작은 등을 몇 번 토닥이며 달래는 것이,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귀중한 보석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렇게 작은 친구를 어르기를 잠시. 이벨리아가 꼼질대다가 편안한 자세를 잡고 다시금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자, 아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16549728770956.jpg“들었나?”

16549728770941.jpg“……?”

16549728770956.jpg“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는데. 내 친구가.”

처분을 결정한 지배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차가운 미소가 소름 돋게 번졌다. 이내 제파르의 목을 움켜쥐려던 아가레스가 잠시 멈칫하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리 꼬맹이한테 더러운 피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큰일이지.

16549728770941.jpg“제발!! 제발, 자비를……!!”

자비? 내 이미지가 그렇게 말랑했나. 아가레스가 느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슬쩍 까닥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16549728770956.jpg“그런 건 저 위에 계신 양반한테 빌고.”

아, 그런데 그 양반도 자비와는 제법 거리가 먼 분이라. 아가레스의 붉은 입술이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16549728770941.jpg“커헉-!”

꺽꺽거리며 용서를 구하던 제파르는 사방에서 눌러오는 지배자의 기운에 이내 터져나갔다. 아가레스는 이벨리아를 날개로 더더욱 꼼꼼하게 감싸 안았다. 더러운 꼴은 행여라도 보지 못하도록. 좋지 않은 소리는 만에 하나라도 듣지 못하도록. 제파르의 붉은색 갑옷이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눈밭 위로 떨어졌다. 흰 눈과 대비되는 붉은 피와 붉은 갑옷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다그닥 다그닥. 먼 곳에서 급한 말발굽 소리가 어렴풋이 설원을 울렸다.

16549728770956.jpg“……빨리도 오는군.”

아가레스가 중얼거렸다. 치받는 분노를 해갈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

16549728861461.jpg“이브!!”

엘리시아가 찢어질 듯 외쳤다. 흰 설원에는 피. 붉은 피가 낭자했다. 설마, 우리 아가의 피는 아닐 것이었다. 저 많은 피가 우리 아가의 것은 분명 아닐 것이었다.

16549728861466.jpg“이 개자식!! 네놈이구나!! 감히 우리 아기씨를!!”

헤롤드와 드웬이 검을 빼 들고 왕왕거리며 땅을 박차자, 휴고가 두 미친개의 뒷덜미를 각각 오른손과 왼손으로 잡아챘다.

1654972886147.jpg“그만. 저자는 아니다.”

붉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을뿐더러 이런 짓을 벌일 존재도 아니다. 과거 인마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도운 압도적인 존재를, 휴고는 생각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가레스의 얼굴에는 아직 채 식지 않은 제파르의 피가 튀어 있었다. 황금빛 눈은 날뛰던 살기를 가라앉히지 못해 여전히 포식자의 그것이었으며, 밤하늘보다 어두운 날개는 그 위험스러운 모습을 한층 배가시켰다.

16549728861474.jpg“악마!! 이브는! 이브는 어디 있어?!”

그 고압적인 모습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직 제대로 멈추지도 않은 말에서 구르듯 뛰어내린 루드비히가 아가레스에게 다급하게 달려왔다.

16549728770956.jpg“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그거 기분 더럽다고.”

아가레스는 살짝 뒤로 물러난 뒤 이벨리아를 덮은 날개를 반쯤 밑으로 내렸다.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황금색 머리칼과 그와 완연히 대조되는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16549728861474.jpg“이브…… 괜찮은 거 맞지?”

16549728770956.jpg“누가 구했는데. 당연하지.”

루드비히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끝 모르고 떨어지던 심장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16549728861466.jpg“우리 아기씨……!! 우리 아기씨다!! 후어어어엉-!!”

헤롤드는 후어어엉- 울음을 터뜨렸다. 곰의 포효와도 같은 울음소리에 아가레스가 별 희한한 생물을 다 보겠다는 양 기묘한 눈빛을 보냈다.

16549728770956.jpg‘저건 뭐야. 인간이야, 곰이야.’

16549728861461.jpg“내 딸……!! 아아, 세상에……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16549728770956.jpg“지금 이브를 데리고 있는 게 누군지 안 보이나? 웬 신을 찾아, 찾긴.”

신을 찾으며 차가운 눈 위에 주저앉는 엘리시아를 보며, 아가레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인간들이란.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나 몰라. 반면 휴고는 검을 들고 아가레스의 지척으로 바짝 다가섰다.

1654972886147.jpg“……내려 둬라. 동(東)마계의 지배자.”

16549728770956.jpg“그대야말로 그 검 내려 두지?”

휴고의 조바심에 비추어보자면 다짜고짜 딸을 내놓으라며 검을 휘두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있는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은 것이었다. 한편 자신의 앞에서 검을 빼든 상대를 순순히 용서할 성정이 아닌 아가레스가 말로 되받아 친 것 또한 전례 없는 일이었다. 휴고와 아가레스 양자 모두 무력으로 충돌할 의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1654972886147.jpg‘어찌 되었든 은인이니.’

16549728770956.jpg‘우리 꼬맹이 깨어났을 때 못된 악마라며 등을 후려 맞기는 싫단 말이지.’

휴고는 검을 내렸고 아가레스는 기세를 줄였다.

1654972886147.jpg“그대가 내 딸과 무슨 관계인지, 왜 내 딸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는지, 묻지 않겠다.”

그저 내 딸을 돌려다오. 수많은 전장 속, 수없이 많이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은 애원은 쉽게도 흘러나왔다. 딸의 생사 앞에서 부모의 자존심과 목숨이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16549728770956.jpg“……답지 않긴. 그러려고 구한 거야. 다만, 대가는 받아야겠어. 악마의 철칙이거든.”

1654972886147.jpg“뭐든.”

내 지위, 재산, 명예, 생명, 영혼까지. 그 무엇이든. 거한 대가를 받기로 유명한 악마였으나 휴고의 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딸과 바꾸는 것이라면 그 대가가 이 세계라 한들 아깝지 않다. 그러나 요청하는 대가는 휴고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16549728770956.jpg“친구.”

두 금안이 얽혔다. 악마의 금안은 단호했고, 휴고의 금안은 어울리지 않게 경악과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1654972886147.jpg‘지금 이 검은 새끼가 뭐라는 거야. 무슨 얼어 죽을, 나와 친구라도 하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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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28770956.jpg“기분 나쁜 착각 집어치워. 그대 말고, 이브랑 나랑 친구라고.”

1654972886147.jpg“……언제부터.”

16549728770956.jpg“그건 나중에 꼬맹이한테 듣고. 그대에게서 받을 대가는 딱 하나야. 내가 이브와 친구로 지내는 것을 방해하지 마.”

휴고가 무려 스물 몇 가지의 소소한 조건들을 덧붙인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2886147.jpg“……그렇다면 내 딸에게서는 무엇을 받아 갈 건가.”

16549728770956.jpg“음? 아무것도.”

아가레스가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태연히 닦아내며 답했다.

1654972886147.jpg“악마의 철칙이 깨진 적은 없을 텐데.”

16549728770956.jpg“없지. 내가 알기론.”

1654972886147.jpg“……그렇다면 왜?”

의문을 가득 담고, 그곳에 있던 모든 인간들의 눈이 악마에게로 향한다. 악마가 무언가를 도우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 것은 아가레스가 말한 것처럼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의문 어린 시선들을 느낀 아가레스가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이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그렇게 무서운 일을 겪고도 무엇을 먹는지 자그마한 입을 오물대는 것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웃음이 내비쳐졌다. 비밀기지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 맑은 시각으로, 그 독특한 생각으로, 그 상냥한 말로.

16549728770956.jpg‘너는 또 얼마나 나를 웃게 만들까, 내 작은 친구야.’

생각 뒤로 이어지는 말 또한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따스한 어조였다.

16549728770956.jpg“내 모든 것의 유일한 예외라서.”

1654972886147.jpg“왜지?”

16549728770956.jpg“친구라잖아.”

영겁의 시간 혼자였던 내게. 대가라면 이미 그 말 한마디로, 건네주었던 그 작은 꽃잎 하나로, 넘치도록 받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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