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뒤바뀐 사냥감2021.02.18.
“휴고, 우리 이브는…… 우리 아가는!!”
소식을 듣고 공작저 대문 앞까지 나와 있던 엘리시아가 휴고에게 달려들었다. 남편의 품 안에 딸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 누구보다도 고고하였던 공작부인은 종이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아아…… 안 돼.”
고운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계로 간다.”
엘리시아를 부축하여 일으킨 휴고의 음성은 엘리시아가 아닌 기사단에게로 무겁게 떨어졌다. 평소라면 지축이 울리도록 대답하였을 아르티나 기사단은 오늘만큼은 으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휴고의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참는 것이 힘들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에. 당장이라도 아기씨를 데려간 악마의 사지를 찢어두고 싶은 마음에. 인간계로 나온 마족들을 처리하는 것과 마계로 가는 것은 결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휴고에게도, 병아리 아기씨를 잃은 아르티나 기사단에게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투귀자(投歸者)들을 불러두었습니다.”
집사 하델이 휴고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투귀자(投歸者).’ 마족 또는 반(半)마이지만 인간의 편에 선 자들. 대다수가 황실 또는 신전의 비호 아래에 있는 그들은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아기씨의 소식을 듣자마자 하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실에 연락을 취하여 투귀자 둘을 보내 달라 요청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아기씨가 카시스 후작저 앞 골목에 없을 가능성을 생각한 유능한 집사의 대처였다.
“다녀올 테니…….”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주가 부재중일 때에는 후계자가 가주 대리. 아르칸과 세드릭은 남으라는 소리였다. 두 형제는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 반박하려다가 서늘함을 넘어 데일 듯 뜨거움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눈을 보고 말을 삼켰다.
“안전히 다녀오십시오.”
“형님은 제가 잘 보필하고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동생을 데리고 오실 것이었다.
“…….”
가슴께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던 엘리시아가 갑옷을 가지러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휴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하델.”
“예, 마님.”
“내 검과 갑옷을 가져오거라.”
“예, 마님.”
하델이 망설임 없이 답하며 공작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님, 주인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엘리시아를 부축하던 비비안이 우려를 담고 말했다. 이리 버들가지 같으신 공작부인께서 마계라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무겁게 떨어지는 답은 감히 그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하게 했다.
“베르타샨 영지전부터, 아튼 전투, 최후의 레녹스 대전까지.”
“…….”
“나는, 그 수많은 전장에 섰다.”
딸을 영영 잃을 수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여전히 손을 떨면서도, 여전히 간헐적인 울음을 삼키면서도, 엘리시아의 푸른 눈에는 부군인 휴고와 같은 단단함이 엿보였다.
“…….”
비비안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평화가 길어 잊고 있었다. 그들의 마님은 그 어두웠던 시절 현 황제와 휴고의 전략가이자, 앞장서서 길을 열었던 정령사였던 것을.
“마님. 이것을.”
하델이 엘리시아가 과거 자주 사용했던 갑옷과 검을 건네었다. 전쟁에 직접 나섰던 세대는 평화 속에서도 그 시절을 완전히 잊진 못한다. 그를 방증하듯 엘리시아의 무구는 한 점 녹슨 곳 없이 깨끗했다. 늘 가까이에 두고 갈고닦았기에. 엘리시아가 입고 있던 드레스에 손을 올리자 하인들과 하녀들은 모두 시선을 낮추고 뒤로 돌았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단 한 번에 찢겼다. 엘리시아는 볼품없이 찢어진 드레스 위에 경갑옷을 갖추어 입은 뒤 푸른색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검을 쥐었다.
“괜찮을 거다. 우리 아가는 강해.”
허공에 읊조리는 어머니의 말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내미는 위안이었다. 갑옷을 갖추어 입고 나오던 휴고는 엘리시아를 보고 잠시 입을 달싹였으나, 따라오지 말라는 한 마디는 결국 내뱉지 못했다.
“……하.”
그의 열렬한 구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기 전, 그들은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였다. 저 눈을 한 엘리시아를 그가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년 전 그때에도. 그리고 물론 지금도.
“투귀자들을 데려와라.”
휴고의 명으로 불려온 투귀자들이 마계로 가는 문을 열고자 허공에 진을 그리려 하던 그때. 기수의 몸보다 훨씬 커다란 말 한 필이 공작저로 뛰어 들어왔다.
“공작!”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이 마계로 향하려는 것을 알아챈 루드비히가 다급히 그들을 불렀다.
“공작! 이브 레녹스 산맥에 있네.”
황태자의 부름을 들은 척도 않던 휴고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
“동(東)마계의 지배자.”
사족은 필요 없었다. 그 예명은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휴고와 엘리시아가 곧바로 그들의 군마(軍馬)에 올라탔다. 아르티나 기사단이 뒤를 따랐다. 카시스 후작은 미리 그려두었던 이동 마법진 안에 좌표를 적어 넣으며 첨언했다.
“산맥 깊은 곳까지 이동은 불가합니다. 중턱까지만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동(東)마계의 지배자’가 이벨리아와 무슨 관계인지, 이벨리아가 있는 곳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질문할 법도 했으나,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 시대의 중심에 섰던 휴고, 엘리시아, 아르티나 기사단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압도적인 힘으로 전쟁을 중재했던 ‘그’ 지배자가 거짓을 입에 올릴 성정이 아니라는 것을.
***
‘아파. 너무 아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극심한 통증, 그다음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속이 엉망진창인 것 같았다. 창자가 꼬이고 위산이 역류하는 데다 피가 울컥거리며 솟구치는 느낌은 생경했다. 정령을 불러내어 도움을 받는 대가로 정령사들이 지불하는 가장 큰 위험부담.
‘역소환이 이런 거였구나.’
이벨리아는 여기가 어딘지, 왜 이렇게 추운지, 왜 이렇게 아픈지, 잠시간 현실 감각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이내 정신을 잃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 카론이 검에 관통당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우욱…….”
참을 수 없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입을 틀어막는 자그마한 손은 털장갑이 사라져 하얗다 못해 새파랬다.
“오! 깼구나, 깼어!”
이벨리아를 데려와 쌓인 눈 위에 대충 던져두고, 피가 말라붙은 검을 든 채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악마가 춤을 추듯 걸어왔다. 아. 그 검을 감싼 피가 누구의 피인지, 이벨리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긴…….”
애써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달이 이리도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니 어딘가의 산이 분명했다. 눈 쌓인 너른 들판, 그리고 둘러싼 황량한 나무들은 이곳이 산이라는 추측에 확신을 갖게 했다. 마물이든 맹수든 그 어느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어느 대륙인지, 어느 왕국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자그마하게 운디네를 불러보았지만 소환되지 않았다. 바로 직전에 역소환을 겪은 몸으로는 정령을 소환하기도 어려운가 보다.
“어어? 헛수고하지 마. 넌 어차피 여기서 죽어. 꽥! 널 죽이지 못하면 내 계약의 대가도 못 받고, 또 모시는 분께 내 목이 날아갈 판이거든.”
이벨리아는 떠는 대신에 새파란 빛을 흘리는 눈으로 제파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도 죽을 거야. 우리 아빠한테, 엄마한테, 오라버니들한테, 그리고 내 친구한테. 너도 죽을 거야.”
“으응?”
저 악마 특유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 자연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않는 그 웃음소리는 요란하게 치는 눈보라를 뚫고 선명하게 귀에 내리박혔다.
“있잖아, 꼬맹아. 내가 왜 널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알아?”
“…….”
“그 눈!! 그 파내고 싶은 눈 때문에!!”
악마가 이벨리아의 눈에 날카로운 손톱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킬킬댔다. 금방이라도 눈을 찌르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 손에도 이벨리아는 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근데 지금 파내면 재미가 없잖아! 응? 안 그래? 살려달라고 추하게 빌 때! 아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때! 그때 그 눈을 파내어야 전시해둘 가치가 있지!!”
“…….”
입을 열었다가는 떨리는 목소리가 엉망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아, 이벨리아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작은 인간 아이의 푸른 눈이 아직도 꼿꼿한 것은 영 제파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어디 한번 볼까? 응? 어디를 부러뜨릴 때까지 네가 울지 않을 수 있을지 아주 궁금해졌어.”
악마, 제파르가 바르르 떨었다.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유흥거리는 없었다. 진정으로 기대가 되었다. 저 푸른 눈이 피눈물을 흘리며 붉게 물드는 때가. 저 고고한 붉은 입술이 새파랗게 변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그 광경이. 팔부터? 다리부터? 어디를 부러뜨릴까 고심하는 것처럼 제파르는 이벨리아의 팔과 다리를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기다란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한참 그렇게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리던 제파르가 이벨리아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응. 역시 다리부터지!”
이벨리아의 자그마한 얼굴보다도 큰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갑옷. 피에 젖어 붉은 손. 그 모든 것이 견딜 수 없게 두려웠다.
‘무서워.’
무서워 아빠. 엄마. 오라버니들. 토끼야. 식량 도둑. 나 무서워.
“자아- 어디 한 번 견뎌 봐 꼬맹아!! 최대한 오래!!”
‘소리는 안 지를 거야. 울지도 않을 거야. 괜찮아. 금방이야. 금방 끝나.’
이를 악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터져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 닥칠 고통에 대비하여 이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아악-!!”
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닌 쇠를 긁는 듯한 두꺼운 비명. 이내 밀려오는 감각은. 고통 대신. 지독히도 따뜻한 품, 아릴 듯 차가운 목소리.
“꼬맹이 호칭은 내 건데.”
윗니로 강하게 감아 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단단한 손가락에 의해 빼내어 진다. 고여 있던 핏방울을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쓸어내린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뜨니.
“아스…….”
흰 설원. 눈보라 치는 사나운 공기. 산 위라서 그런지 기묘하게도 커다랗게 느껴지는 달.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감을 모두 잊게 하는 압도적인 지배자. 아가레스의 등 뒤로는 처음 보는 거대한 검은색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이 짙은 밤보다 더욱 짙은 어둠을 담은 색. 더불어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 휘몰아치는 마기, 악다물어 단단한 턱이 보였다. 이벨리아가 항상 편하게 장난치고 치대던 그 친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신을 보게 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
작은 친구를 안아 든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엉망이 된 얼굴과 새파래진 여린 손, 그리고 상처가 난 다리를 천천히 시선으로 훑었다.
“아스…… 나, 아파. 무서웠는데에…… 으아아앙!!”
든든한 친구의 품에 안기고서야, 참아온 눈물이 흘렀다. 애써 모른 체했던 통증도 함께 밀려들었다. 나 무서운데 참았어. 나 아픈데도 참았어. 사실 누가 구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울자, 그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탁- 하고 풀린다. 그의 어린 친구는 너무도 작고 보드라워서 어떠한 강도로 안아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유리컵을 쥐는 정도이면 될지, 꽃잎을 쥐는 정도이면 될지. 잘게 떨리는 몸이 느껴지자 그는 커다란 손으로 이벨리아의 눈을 가렸다.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작은 친구를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심장이 찢기고 파헤쳐지는 듯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눈앞의 저 쓰레기를 잘게 갈아 피를 뿌려도 해갈되지 않을 것 같은 극심한 갈증이 일었다.
“쉬이…….”
치솟는 분노와는 달리 눈을 덮는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워 이벨리아는 깃털 하나가 눈 위를 맴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설원을 짙게 장악하는 마기(魔氣)와 서서히 높아지는 몸의 온도만이 그가 더할 나위 없이 격노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
“……장하다, 우리 꼬맹이.”
아주 잘 참았어. 아주 잘 견뎠어. 늦게 와서 미안해. 이벨리아의 눈을 가리고 토닥이며, 그의 시린 시선이 제파르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키득거리며 웃던 붉은 갑옷의 악마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기운은 뭐냐고.’
동(東)마계의 지배자. 태어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제파르는 그의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헛된 위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겪어보지 못한 이 위압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스…….”
“착하지. 괜찮아. 잠깐 코- 자.”
이벨리아를 재우기 위해 아가레스가 살짝 힘을 흘렸다. 잠시만 눈 감고 있어. 네가 눈을 감으면, 저것의 사지를 찢어 네 발밑에 뿌려줄 것이니. 네가 눈을 뜨기 전에, 전부 한낱 악몽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그리하여 네가 눈을 뜨면,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사냥꾼과 사냥감이 뒤바뀌었다. 이벨리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그가 사냥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역시 다리부터지. 아, 소리는 지르지 마.”
우리 이브 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