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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뒤는 내가 지켜줄게 (39/323)

39화. 뒤는 내가 지켜줄게2021.02.11.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카론은 아르티나 기사단의 막내였다. 제국 제일의 기사단 소속치고 아직 어린 나이임은 명백했다. 그러나 일찍이 전장을 휘저으며 쌓아온 경험은 익숙한 기운을 맞이하여 본능적으로 검을 들게 만들었다.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골목. 카론의 검만이 흐릿한 햇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났다. 어딘지 숨이 가빠오고 밝았던 골목에 어둠이 내려앉은 데다 뒤따르던 카론이 자리에 서서 검을 빼어드니. 이벨리아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6549728037706.jpg“카론…….”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눈을 동그랗게 뜬 이벨리아가 자그마하게 호위 기사를 불렀다.

16549728037716.jpg“아기씨.”

16549728037706.jpg“으응.”

대답하는 이벨리아의 목소리가 떨린다. 카론은 입술을 짓씹었다.

16549728037716.jpg‘여기서 목숨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기씨만큼은 다치셔선 안 된다.’

인마전쟁을 직접 거친 세대가 아닌 카론은, 도심 한가운데에 마족도 아닌 고위 악마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기실 누구라도 짐작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인마전쟁 그 당시에도 고위 악마 혼자 수도에 나타나는 일은 흔치 않았으니까.

16549728037716.jpg“들어왔던 골목 쪽으로 뛰십시오.”

16549728037706.jpg“카론은……?”

16549728037716.jpg“따라가겠습니다. 바로.”

작은 주인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거짓말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카론의 눈은 이벨리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유난히도 기척이 강하게 느껴지는 한 곳. 그들이 들어온 골목 입구의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16549728037716.jpg“어서.”

16549728037706.jpg“미안. 카론. 렐리안, 뛰어!”

짤막한 사과를 남긴 채, 이벨리아가 렐리안의 손을 이끌고 골목 바깥으로 달렸다. 렐리안의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전해져왔다.

16549728037706.jpg“걱정 마. 렐리안.”

너는 내보내줄 테니까.

16549728067095.jpg“큭큭. 크하하하하!!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꼴이 영 아르티나 답지 않은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비웃음을 잔뜩 담고 있었다.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 같이 온몸에 소름이 돋는 웃음소리였다. 소리에도 향이 있다면 참기 어려운 비릿함이 느껴질 것이 자명했다. 언제 목덜미를 물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벨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16549728037706.jpg‘적어도 렐리안은 내보내야 해.’

16549728067095.jpg“거기 어린 기사는 감이 좋네. 내가 보였나 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붉은색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투구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붉은 갑옷에는 언뜻언뜻 은색의 철판이 반짝이는 것이, 애초부터 붉은색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아닌 것 같았다. 피. 말라비틀어진 피의 향이 진득하게 흘렀다. 살육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악마는 괴기스러웠다.

16549728037716.jpg‘악마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급이다.’

카론이 대답 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16549728067095.jpg“다들 바쁜 와중에 미안한데, 목표물이 저기 저 금발 꼬맹이거든? 그래서 도망치게는 못 두겠네.”

따악-. 턱을 치켜든 악마가 손가락을 짧게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거의 다다른 골목의 입구에 두 마리의 단탈리온이 나타났다.

16549728067155.jpg“이……이브!”

어릴 적 좋지 않은 기억에 멈칫할 법도 했으나, 이벨리아는 애써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달리는 발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카론도, 렐리안도, 절대로 안 돼.

16549728037706.jpg“실라페!”

16549728067095.jpg[안녕, 계약자. 아무래도 인사는 다음에 해야겠네.]

16549728067095.jpg“히익? 설마 바람의 중급 정령? 저 꼬맹이가? 필히 죽이라 한 이유가 있네!!”

여유롭게 관망하던 악마가 과장되게 두 손을 들며 놀란 제스처를 취했다.

16549728067095.jpg[이런, 악마라니…….]

침음을 삼키던 푸른 독수리, 실라페는 이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채 단탈리온에게 날갯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혹시라도 역(逆)소환이 된다면, 이 작은 계약자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할 터였다. 바람의 왕, 페르세스로부터 인장을 받은 어린 계약자가 주는 힘은 아주 흡족했다. 맞부딪히던 기운은 찰나의 순간 승패가 갈렸다. 비교적 하위에 속하는 마족인 단탈리온들의 마기는 실라페의 바람에 흩어졌다. 내뻗는 날카로운 손톱은 실라페의 발톱에 저지당했다. 이벨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골목의 끝에 다다라, 있는 힘껏 렐리안을 바깥으로 밀쳐내었다.

16549728067155.jpg“이브?”

16549728037716.jpg“아기씨!!”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여전히 그 안에 서 있는 이벨리아를 보고 순식간에 단탈리온을 베어 넘긴 카론과 바깥으로 나동그라진 렐리안이 찢어질 듯 외쳤다.

16549728037706.jpg“렐리안. 걱정 말고 가서 아빠를 불러와 줘.”

이벨리아는 싱긋 웃어보였다. 어딘가 오만한, 지고한 존재 특유의 웃음이었다. 적어도 이 분위기에서 지을 것은 절대로 아닌.

16549728067155.jpg“이브!!”

골목에는 조금 전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골목 밖에서는 그 안이 시야에 담기지 않았다. 본격적인 악마의 사냥 시간이었다.

16549728067155.jpg“안 돼. 안 돼…… 이브…….”

강하게 밀쳐 내보내는 바람에 땅에 쓸려 손과 무릎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으나 렐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일으켜 세우고 달렸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는데도, 머리가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도, 애써 무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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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728067155.jpg“도와주세요!! 아버지!! 오라버니!!”

카시스 후작저로 돌아온 렐리안은 놀라서 달려오는 하인들과 하녀들을 뿌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저녁 식사 이전에 방 안에서 찬찬히 고서를 읽고 있던 이크리안은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여동생의 비명에 방에서 뛰쳐나왔다.

16549728067155.jpg“오라버니!! 이브, 이브가……!!”

16549728096842.jpg“렐리안.”

16549728067155.jpg“빨리, 공작저로……!!”

16549728096842.jpg“렐리안!!”

이크리안이 차가운 표정으로 렐리안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실성한 것처럼 고함을 내지르던 렐리안이 일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이크리안을 응시했다.

16549728096842.jpg“공녀님을 돕고 싶으면 진정해. 무슨 일이야.”

그래. 진정해야지. 침착하게. 나를 밀치면서도 공녀님이 그랬던 것처럼. 렐리안이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떨리면서도 빠른 목소리로, 렐리안은 아버지의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악마를 만난 것, 이벨리아가 자기만 내보내고 그 골목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렸다. 간단한 경위를 들은 이크리안은 곧바로 말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기사들에게는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 공작 각하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명했다.

16549728096842.jpg“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악마는 아직 이크리안이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그는 탄식을 삼키며 아르티나 공작저로 말을 몰았다. 공작 각하께 이 소식이 언제 전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아르티나 기사단에게도 알려야 했다. 황태자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여유로운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 다급히 말을 몰고 달려온 이크리안과 렐리안이 아르티나 공작저의 문지기에게 허겁지겁 달려들던 찰나.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에딘과 헤롤드, 알렉이었다. 그들은 아기씨가 저녁에 드실 고기 옆에 두부로 토핑을 했으면 좋겠는데 두부가 다 떨어졌다는 요리장의 말에, 우리 아기씨 드실 두부면 당장 말을 타고 빠르게 구해오겠다며 나서던 차였다.

16549728067095.jpg“엥? 카시스 영식과 영애 아니십니까? 우리 아기씨께서는 어디 가시고……?”

16549728126499.jpg“카시스 영애께서는 몰골이……?”

렐리안이 헤롤드의 두 팔을 와락 잡았다.

16549728067155.jpg“이브…… 이브가…… 마족, 아니 악마가…….”

16549728126499.jpg“……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아르티나 기사단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즐겁고 가볍게 살자는 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그런 그들은 렐리안의 한마디에 웃음을 지웠다. 여유로 뒤덮었던 살기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늘 그들의 곁에 머무는 죽음. 그것에 아기씨의 죽음은 포함되지 않았다. 단연코. ***

16549728037716.jpg“아기씨!! 대체 왜!!”

나갈 수 있었으면서. 충분히 나갈 수 있었으면서.

16549728037706.jpg“미리 미안하다고 했잖아. 말 안 들어서 미안하다는 뜻이었는데.”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49728067095.jpg“그러게. 너는 왜 도망 안 갔어? 도망쳤어야 잡아 죽이는 맛이 있는데. 에잉, 재미없게.”

마주 선 악마, 레메게톤의 72악마 중 16위. 제파르는 입맛을 다셨다.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그 절망 어린 표정을 보는 것이 그의 낙인데.

16549728037706.jpg“도망?”

렐리안이 나간 골목 바깥을 보느라 악마와 카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이벨리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운 입에서 떨어져 내리는 맑은 목소리는 어이가 없다는 감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16549728037706.jpg“헛소리.”

렐리안을 내보내기 위해 다급히 뛰느라 흘러 내려온 황금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동작에는 겨우 짜낸 여유가 흘렀다. 악마의 앞에서 두려움을 내보이는 것은 아르티나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6549728067095.jpg“그런데 그 입술 끝, 손끝, 그 작은 몸.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이는데?”

제파르가 차오르는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온몸을 떨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을 때마다 붉은 갑옷이 덜거덕 흔들리며 괴기스러운 소음을 만들었다.

16549728067095.jpg“아아. 좋아. 아주 좋아. 그 눈을 울부짖게 하고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 마시고 싶어졌어! 좋아! 좋다고!!”

기묘하게 팔짝팔짝 뛰고 악을 쓰는 소리는 몬스터의 울음소리만큼 목을 긁는 소리였다.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소음에 이벨리아가 눈을 살포시 찌푸렸다. 서열에 민감한 악마답게, 제파르는 알고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기사는 인간들 기준에서야 강한 편이지만 아직 고위 악마인 그를 상대할 실력은 되지 못한다. 너무 어려. 그리고 놀랍게도 이벨리아 또한 이를 직감했다.

16549728037706.jpg‘저건 마족이 아니야.’

악마였다. 자신의 친구 ‘아가토끼’와도 같은 악마. 운디네는 예전에 말했었다. 아가토끼를 상대하려면 그들의 왕이라도 오셔야 한다고. 저 악마가 아스와 비교해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악마를 카론이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어리기에 그 수련의 시간이 적은 것도 당연지사였으니까.

16549728037716.jpg“아기씨.”

카론의 목소리가 질책을 담고 울렸다. 올려다본 카론의 얼굴에는 이벨리아가 처음 보는 절망이 가득했다. 카론에게 있어서 그의 목숨 따위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기씨는 도망가셨어야만 했다.

16549728037706.jpg“그만. 자기 기사를 내버리고 도망가는 주인이 어딨어. 카론은 날 지켜. 나는 카론을 지킬 테니까.”

- 딱. 제파르가 다시금 손가락을 맞부딪혀 단탈리온 몇 마리를 불러내었다. 카론은 침음을 삼키면서도 이벨리아를 보호하듯 검을 가로로 들고 앞을 막아섰다.

16549728037706.jpg“아냐.”

이벨리아는 보호에서 빠져나와 카론과 등을 졌다.

16549728037706.jpg“기사단은 서로 등 뒤를 지킨다며. 카론은 앞만 바.”

뒤는 내가 지켜줄게. 애써 내보이는 강한 척이었다. 이벨리아의 목소리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무리 아르티나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 핏줄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고작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작은 주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카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말릴 수도 없었다.

16549728037716.jpg“조심하십시오.”

카론이 제파르를 막으면서 단탈리온까지 처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살아서 나가려면 그가 제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이벨리아가 단탈리온 정도는 막고 있어야 했다. 이벨리아의 앞에는 다섯 마리의 단탈리온이, 카론의 앞에는 고위 악마 제파르가. 자세를 낮춘 단탈리온들이 곧 달려들 것,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제파르가 공격을 가할 것. 먹잇감이 느끼는 본능적인 간파였다. 사실은 누군가 도와주면 좋겠어. 사실은 눈에서 힘을 조금만 풀면 울 것 같아.

16549728037706.jpg‘사실은 엄청 무서워…….’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지독한 현실감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벨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16549728037706.jpg‘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굉장히 맑았는데.’

오늘은 세토가 키 크는 저녁밥을 준비해 준다고 했는데.

16549728037706.jpg‘……오라버니들이 같이 먹자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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