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악마다2021.02.08.
이크리안의 동화책 유혹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유효했다. 이벨리아는 자주 카시스 후작저를 방문해 렐리안과 노는 것에 시간을 할애했다. 심지어 이크리안은 이벨리아와 렐리안의 교육을 위해 명언집이나 속담집을 만들어 빈칸을 채우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속담은 참 헷갈려.”
이벨리아는 비밀기지 오두막 러그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빈칸을 채우고 있었다.
“이건 알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 눈에도 목숨, 이에도 목숨이야.”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루드비히가 답했다.
‘다 죽여버리라는 소리인가.’
이벨리아는 무시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원수를…… 으음…… 그다음은 뭐야?”
“그 뒤는 알 필요 없어. 원수가 생기거든 그냥 나한테 데리고 와. 없애버리게.”
작은 친구 추울까, 옆에서 불을 때던 아가레스가 답했다. 이벨리아는 한숨을 쉬며 숙제 노트를 덮었다.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 그렇게 여섯 살의 초입,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봄. 지금껏 즐겨 입던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은 어느덧 밑단 아래로 발목이 드러나 새로운 잠옷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벨리아는 아침에 일어나 비비안의 손에 양치와 세수를 마친 다음 뽀르르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한참 요모조모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는 방문을 벌컥 열고 호위 기사를 불렀다.
“카론! 카론! 나 키 재 줘!”
“어제도 재셨지 않습니까.”
“오늘은 달라! 오늘은 분명히 커써! 거울로 다 바써!”
방문 앞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던 충직한 호위 기사는 요즈음 하루가 멀다 하고 키를 재 달라 요청하는 작은 주인을 따라 1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이벨리아가 세 살이 되던 해부터 키를 기록해두던 공작저 응접실 한쪽 벽면에는 어느새 무수한 작대기들이 그어져 있었다. 그 작던 병아리 아기씨가 벌써 여섯 살이 되셨나. 공작 부부와 아르칸, 세드릭, 그리고 기사단마저도 때때로 그 작대기들 앞에서 선연한 추억들에 잠기고는 했다. 몸을 한껏 곧게 편 다음 목을 쭈욱- 빼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카론을 올려다보는 이벨리아는 하룻밤 새에 1~2cm쯤은 컸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대로십니다.”
카론이 어제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줄을 긋고 날짜를 써넣으며 말했다. 단호하게.
“에엥? 그럴 리가!”
황급히 뒤를 돌아 키가 표시된 작대기를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뭐야, 안 자랐어? 단 1mm도?
“나도 빨리 커서 예쁜 옷 입고 싶은데…….”
이런 실내용 드레스 말고 우리 엄마 것처럼 막 여기 훅 저기 훅 파여 있는 붉은색 검은색 화려한 그런 드레스. 그러나 110cm의 작은 키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벨리아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디자인의 드레스들을 되뇌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찌…… 사람은 다 시간이 있는 법이라고 해쓰니까.”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요.”
“옹. 그거.”
축 처진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간 이벨리아는 비비안이 입혀주는 하늘색 유아용 드레스를 얌전히 받아들었다.
“이브, 카시스 후작저?”
비비안의 도움을 받아 따뜻한 털 망토까지 걸치고 내려오니, 마침 오전 수련을 끝내고 들어오며 흘린 땀을 수건으로 대강 닦아내고 있던 오라버니들이 물었다.
“옹. 동화책 공잔 공잔잔이 신간을 만들었대. 요즘 영 일을 안 한다니까!”
그게 누구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벨리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자식이 원래 머리 하나 믿고 노력을 안 해. 오라버니가 따끔하게 혼내줄게.”
그게 누구 동생 때문인지도 모르고. 아르칸이 혀를 차며 거들었다. 이래저래 황태자와 아르티나 남매들 사이에 끼인 이크리안만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흉이 이벨리아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고.
“아, 마따!”
오라버니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이벨리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주방으로 달려갔다. 오전 수련을 마친 공자님들께 드릴 간식을 만들고 있는지 주방에서는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세또, 세또, 오늘 저녁은 키가 잘 크는 음식으로 부탁해!”
“키가 잘 크는 음식이라면 역시 단백질이 좋겠지요. 정성껏 준비해 둘 테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기씨.”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이벨리아가 ‘오늘도 고마워, 세또!’ 외치고서는 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주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부탁한다. 고맙다. 여느 귀족 집안의 사용인들은 듣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고귀하신 그들의 아기씨가 스스럼없이 이러한 말들을 건네실 때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이제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오라버니, 이브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우리 아가. 키 크는 저녁 같이 먹자.”
“옹! 동화책만 읽고 금방 오께!”
휴고와 엘리시아는 각기 외부 일정이 있어 공작저를 비웠기에, 아르칸과 세드릭이 이벨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배웅했다. 카시스 후작저는 아르티나 공작저에서 멀지 않았고 수도 한가운데에 있는 만큼 치안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늘 그렇듯 카론만이 이벨리아의 뒤를 따랐다. 아직 완연한 봄이 오지 않아 조금은 추위를 느낄 법도 한 날씨. 카론은 혹시 제 작은 주인이 추울까 봐 털옷을 입은 이벨리아의 위로 망토까지 벗어 둘러주고는 마차로 올려주었다. 옷을 한껏 껴입어 마치 공처럼 동그래진 이벨리아는 불편한지 히잉- 소리를 내면서도 얌전히 망토를 쥐고 마차로 올라탔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외출이었다. ***
“……뭐야, 여기서 끊다니!”
이번 동화책은 짧았다. 기존 동화책 분량의 반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동화책 공장 공장장 이크리안 오라버니가 요즘에 농땡이를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라버니 절판 신동 대단해…….”
“절단 신공이요?”
“옹, 그거.”
뭔가 이대로 책을 덮기가 아쉬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삽화를 천천히 넘겨보고 있는데, 렐리안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벨리아가 시선을 들어 바라보면 안 바라본 척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동화책을 바라보면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힐끗댄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던 와중. 마침내 이벨리아가 동화책을 탁- 덮고 물었다.
“렐리안, 무슨 일이야?”
“그…… 아니에요. 아무것도.”
“내가 렐리안을 하루 이틀 봐? 빤리 말해 바. 내가 해결해 주께!”
혹여라도 렐리안이 부담을 느낄까, ‘나중에 내가 고민이 있으면 렐리안이 도와주면 되지.’하고 말을 잇는 작은 친구는 항상 사려 깊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렐리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다음 달이면 아버지 생신이거든요. 그런데 그…… 저번에 봤던 네피르 기억나세요?”
“옹. 그 조사 버릴 조동이.”
“……조……조사……. 하여튼 걔가 항상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해드리는 바람에, 제가 드린 선물은 늘 뒷전이었어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제 선물을 더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뭘 드려야 할지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아서…….”
작년에 자신이 머리카락을 잔뜩 뽑아 패대기친 네피르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벨리아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안 되지, 안 돼. 렐리안의 선물보다 그 얄미운 조동아리의 선물이 주목받아서는 안 되지! 이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발딱 일어섰다.
“가자!”
하늘색 원피스가 바람에 나풀댔다. 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은 허리께에서 찰랑거렸다.
“네?”
“같이 사러 가자. 지금!”
“뭘……뭘요?”
“선물. 선물은 나가서 자세히 바야 좋은 것도 생각나고 그러는 거야.”
이건 절대 내가 바깥 구경을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어물어물 덧붙인 말은 이벨리아의 목적이 후작님 선물 공수와 더불어 바깥세상 구경임을 알려주었다. 이를 간파한 렐리안이 활짝 웃었다.
“좋아요!”
공녀님과 함께 상점가를 돌아다니는 것도 정말 재미있을 거야. 그리고 아마 공녀님과 함께 나간다면 네피르의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을 구할 수 있겠지. 공녀님은 똑똑하시니까. 렐리안이 통통 튀듯 걸어가 털 망토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혹시 아무도 모르게 몰래 다녀올 수 있을까요? 아버지를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건 기본이지! 원래 선물은 깜딱 선물이 좋은 거야!”
어른들 모르게 바깥으로 나간다는 사실에 신이 난 이벨리아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제 여섯 살. 혼자서 바깥세상쯤은 무리 없이 구경할 나이가 되기는 되었다.
“쉬잇. 누가 있나 먼저 확인하자.”
방문을 열고 나온 두 아이는 기다란 복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후작님 클리어. 후작부인 클리어. 하녀들 클리어. 기사들 클리어. 카론 클…….
“클리어어!? 카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호위 기사가 이벨리아의 등 뒤에 떡하니 서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꼬마 둘은 암살 길드 유망주 출신의 은신술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십니까. 아기씨.”
“으응? 아니이? 주……주방에 가서.”
“후작님 생신 선물을 주방에서 구하신다고요?”
“옹!”
“……아기씨.”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능청스레 거짓말을 하는 이벨리아를 카론이 나직이 부른 것은 경고였다. 자꾸 꾀를 쓰시면 지금 당장 들쳐 메고 아르티나 공작저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
“으으…… 카론은 뛰어나! 똑똑해! 씨잉!”
“전부 칭찬이군요. 감사드립니다, 아기씨.”
“얄미워! 사실 후작님 생일 선물을 사러 밖으로 나갈 거야. 근데 깜딱 선물이어서 어른들은 알면 안 댄단 말이야. 기사들도 알면 안 대. 요망한 조동이한테 말하면 안 대니까.”
“그러면 아르티나 기사단을 부르겠습니다.”
“아냐. 저녁 전에 빨리 다녀와야 해. 세또가 키 크는 밥 준다고 했어.”
아기씨의 ‘도움!’ 한마디면 공작저에서 왕왕거리며 달려 나올 미친개들이 수십 명인데. 확실히 지금 불러내기에는 장소도 시간도 조금 껄끄럽긴 하다.
“상점가는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워서 괜찮을 거예요.”
렐리안의 말대로 후작저에서 엎어지면 닿을 거리이기도 했고, 황궁과 가까워 황실 기사단도 제법 돌아다니니. 대낮의 상점가에서는 무슨 일이 있기가 더 어려웠다.
‘얼른 갔다가 돌아오면 되겠군.’
카론은 생각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아! 카론은 입이 무거우니까 내가 아주 특히 허락하는 거야!”
“특별히. 특별히 허락하시는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아기씨.”
신나게 걸어가는 두 뽀시래기들의 정확히 반보 뒤. 호위 기사 카론은 오늘도 만만치 않은 육아가 될 것 같아 침음을 삼키며 뒤따랐다. 패착이었다. ***
“공기 조타!”
겨울 냄새와 봄 냄새가 섞이는 시기이나 겨울의 청량한 공기가 우세하였다. 두꺼운 목도리로 목을 돌돌 감으니 아직은 짧은 목으로 인해 입까지도 목도리에 포옥 파묻혔다. 카시스 후작저에서 골목 하나만 지나면 바로 상점가라 그들은 마차 또는 말을 타는 대신에 걷는 것을 택했다. 마차나 말은 걷는 것보다 사람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벨리아가 걷는 것을 워낙에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뭘 살까? 옷? 마법서? 마법이 걸린 검?”
딸인 렐리안보다 이벨리아가 더 신이 났다. 눈만 빼꼼 나와서는 목도리에 파묻힌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춥다며 손모아장갑을 낀 작은 손으로 귀를 덮고 종알거리는 아기씨가 마냥 귀여워 카론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그들은 이내 골목으로 들어섰다. 발을 내디딘 골목은 오로지 카시스 후작저의 대문 밖과 상점가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어쩌면 아주 비싼 보석이 더 좋을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우리 집에서 몇 개 가져오자!”
골목의 중간을 지날 때까지 재잘대는 이벨리아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던 카론의 입매가 한순간에 단단히 굳었다. 부드럽던 눈매는 그 시절 암살자의 눈으로 급변했다.
‘……이 골목이 원래 이렇게 어두웠던가.’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어둑한 그곳은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골목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는 분명 여느 때의 골목과 같았다. 그러나 골목 중간 즈음을 지나는 지금은, 마치 이곳에만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대기 자체가 회색빛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공기가 무거웠다. 숨을 들이쉬면 가벼운 기체가 아니라 묵직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 위압감, 둔중함,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이질감. 카론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숨을 쉬듯 익숙했다. 한동안 전장을 떠나 있느라 잊고 있었던 기운. 마족. 아니, 그들을 지배하는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