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꼬맹이 절도죄로 사형이다!2021.02.04.
“그래서 머리를 자안뜩 뜯은 다음에 실프를 불러서 후작저 바깥으로 날려찌!”
살랑살랑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적당히 따뜻할 정도로 내리쬐는 햇살. 한 악마와 한 소년, 그리고 한 꼬맹이는 모두 오두막집 안보다는 바깥에 돗자리를 깔고 앉는 것을 선호했다. 함께 비밀기지를 사용한 지 어언 2년째. 각자 가져온 물품들이 텅 비었던 곳을 메워 비밀기지는 점점 더 머무르기 편안하고도 익숙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예전 어느 날 등에 지고 온 커다란 돗자리 위. 아가레스의 팔에 기대어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여 조잘조잘 떠드는 꼬맹이 친구를 악마와 소년은 따뜻하게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특하네.”
“잘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훌륭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칭찬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실상 이벨리아가 그 어떤 일을 하였더라도 악마와 소년이 다른 대답을 할 리는 없었을 터다.
“근데 엄마한테 엉덩이 맞았어. 씨잉…… 퐁력은 나쁘대.”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
친구를 괴롭혔다고 버럭 화를 내다가, 그래서 혼내줬다고 의기양양하다가. 결국은 엉덩이를 때찌 당했다며 눈썹을 추욱 떨어뜨리는 작은 친구는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면 요즘 카시스 후작저에 자주 가는 게 후작영애 때문이야?”
루드비히가 과일이 든 통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옹. 렌리안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이안 오라버니가 만든 동아책 때문이기도 해.”
“……?”
“……?”
과일을 향해 뻗던 루드비히의 손이 뚝- 멈추었다.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쪽으로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팔에 기대어 있던 이벨리아가 ‘어어-?’ 하고 휘청이자 두 지배자가 다급히 잡아챘다. 루드비히와 아가레스는 예전에 이벨리아가 ‘그만!’ 훈련을 시킬 때 이후, 처음으로 같은 의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안 오라버니가 누구야. 까칠한 애새끼, 너 알아?’
‘오라버니? 들어본 적 있나, 악마?’
경악한 시선을 주고받던 악마와 소년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서로가 눈빛으로 보낸 물음에 대한 답을 모른다는 의미. 그렇다면 답을 줄 인물은 그들 사이에 꼭 끼어 작은 입을 바삐 놀리며 견과류 열매를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는 꼬맹이뿐이다. 이벨리아가 다시 견과류 열매에 손을 뻗은 찰나. 아가레스가 열매가 든 통을 낚아채어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이안 오라버니가 누구야.”
졸지에 견과류 통을 빼앗긴 이벨리아가 커다란 눈을 슴벅이며 이번에는 루드비히에게 가까이 놓인 초콜릿 통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작은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본 루드비히 또한 통을 뒤로 감추며 비슷한 맥락의 물음을 던졌다.
“너 카시스 영식한테 오라버니라고 불러?”
뭐야. 뭐야. 왜들 이래?
“……내 연매! 내 초꼬!!”
“대답하기 전까지는 안 줄 거야.”
“대답하기 전까지는 안 줘.”
두 지배자가 동시에 말했다. 루드비히는 본디 카시스 후작 영식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크리안은 차기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일컬어지는 천재였다. 루드비히야 자신과 같은 세대의 걸출한 마법사를 충성스러운 신하로 영입하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그랬었는데.’
아르티나 공자들 다음으로 영입 대상 2순위였던 이크리안은, 이벨리아의 ‘오라버니’ 한 마디에 꼬마 친구를 두고 경쟁하는 경쟁상대로 낙인찍혔다.
‘이안 오라버니. 무려 오라버니라니.’
“이안 오라버니는 카시스 오라버니고, 렌리안 오라버니고, 마법으로 동아책도 만들어주는 똑똑하고 착한 오라버니야. 빨리 내 연매랑 초꼬 돌려줘!”
이벨리아가 속사포처럼 말하고는 둘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두 지배자를 더욱 굳게 만들었으니. ‘똑똑하고 친절한 오라버니’는 진정 그들이 얻지 못한 칭호였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초리에 순순히 열매와 초콜릿을 내어놓으면서도 두 지배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럼 나는 뭐야?”
이 제국의 작은 지배자가 답지 않게 물었다. 이크리안이 똑똑하고 친절한 오라버니면, 나는 뭐야. 그래도 2년을 봐왔는데.
“식량 도둑은 식량 도둑이지.”
“끝이야?”
“더 뭐가 있어?”
“훗-.”
대화를 듣던 아가레스가 참지 못하고 짧은 웃음을 흘렸다. 꼬맹이랑 둘이 있는 시간을 그렇게 방해하더니, 얻은 게 고작 ‘식량 도둑’이냐. 꼴좋다.
“꼬맹이, 그럼 나는 뭐야?”
아가레스가 득의양양하게 물었다. 마치 잘 들어두라는 듯 루드비히의 충격 어린 눈을 빤히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스는 아가토끼지.”
“……끝이야?”
“뭐가 더 있어?”
피식-. 이번에는 루드비히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악마와 소년의 불꽃 튀는 눈빛이 마주쳤다.
“나 음료수 가져오께. 오렌지주스 더 먹을래.”
아무래도 오늘 친구들이 이상하다. 평소에는 고분고분 받아들이던 호칭도 싫다며 거부하는 것을 보니.
‘오렌지주스를 더 먹이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이벨리아가 돗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집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뭘 웃어. 재수 없는 애새끼.”
아가레스의 황금색 눈이 번뜩였다. 아직 어린 인간을 쥐어팼다가는 꼬맹이에게 미움받을까 봐 감질나게 말로만 싸우고 있는데, 조금만 더 커 봐라.
“아가토끼라. 딱 어울리는 애칭이라 좋겠군.”
루드비히도 지지 않고 맞섰다. 내가 조금만 더 커 봐라. 재수 없는 악마새끼.
“그래도 나는 가끔 꼬맹이가 ‘아스’라고 불러주는데, 너는 늘 식량 도둑이란 말이지.”
“……!”
정곡이다. 루드비히의 홍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를 놓칠 리 없는 아가레스가 씨익 웃었다. 기실 악마나 소년이나, 도긴개긴이다. 둘을 모시고 있는 휘하 존재들이 보았다면 눈과 귀를 의심할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 오라버니라는 놈은 뭔데. 네놈 신하니까 알 거 아냐.”
“……불세출(不世出)의 천재.”
“어느 방면에서?”
“전부. 특히 마법.”
“인간들 중에 천재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지.”
“그 인간들 중에 땅 도둑의 아버지 같은 자도 있지.”
“……휴고 아르티나에게 비견할 만한 자인가?”
“한 15년이 지나면 그렇게 될 수도.”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두 지배자의 머리는 맹렬히 돌아갔다. 이내 동시에 꺼낸 말들은 음산했다.
“미리 죽일까.”
“유배 보낼까.”
“제국의 지배자라기에는 사고가 말랑하군.”
“내 신하야.”
“꼬맹이를 뺏어갈?”
“……죽이는 것이 나을 수도.”
사형 선고의 죄명은 절도. 절도의 목적물은 꼬맹이. 더 확실한 죄명을 찾아보아야겠다. 두 지배자가 심각하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 심각하게 나누는 동안, 이벨리아는 자기 몸만 한 오렌지주스 두 병을 안고 오두막에서 나와 세상 해맑게 물었다.
“오렌지주스 먹을 사람이랑 앙마?”
이벨리아는 몰랐다. 지금 두 지배자에게 그깟 오렌지주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리도 아껴 마지않는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동맹과 전쟁을 반복하던 두 지배자는 곧장 달려가 작은 친구의 품에 안긴 오렌지주스 병을 나누어 들었다.
“땅 도둑.”
“옹?”
새로 가져온 시원한 주스 밑바닥에 가라앉은 오렌지 덩어리를 빨대로 조준하여 쪽쪽 빨아먹던 이벨리아에게, 루드비히가 이름을 건네었다. 무려 2년 만에.
“루이.”
“……?”
“루이라고 불러. 이제.”
예명을 알려주는 소년의 귀는 살짝 붉었다.
“루이! 이제야 이름을 알려주네!”
앉은 자리에서 두 손으로 앞을 짚고 몸을 쭈욱 뺀 다음 ‘루이!’라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마냥 밝았다. 태양처럼.
“왜 지금까지 안 물어봤어, 내 이름?”
“알려주기 싫을 수도 있잖아. 이름 몰라도 친구는 친구니까, 안 물어봤어.”
알려주기 싫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루드비히가 사고회로를 돌리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가레스가 물었다.
“왜 알려주기 싫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이벨리아가 눈치도 없다는 듯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귀를 대보라는 손짓을 했다. 아가레스가 작은 친구를 위해 곧장 몸을 낮추어 귀를 갖다 대자,
‘루이는 사실 범재자야. 들키면 경비병이 잡아가. 토끼도 비밀로 해.’
이벨리아가 손을 동그랗게 만들고서 소리 낮추어 속닥였다. 이 제국 황태자가 무려 범죄자라니. 뜬금없는 정보에 아가레스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루이, 그래도 자복하는 게 좋아. 용기가 안 나면 함께 가 줄게.”
“자수.”
“옹. 그거.”
이벨리아 세 살, 루드비히 일곱 살.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 루드비히가 장난으로 내뱉었던 말을, 다섯 살이 된 지금도 이벨리아는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야, 그건…… 하…… 됐다.”
어이가 없어 턱을 괴는 와중에도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루이. 친구의 입에서 들려오는 저의 애칭이 달가웠다. 들이쉬는 공기조차 달았다. 지독히도. 그렇게 어린 친구는 또 다른 의미로 그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를 ‘루이’라고 불러주었던 유일한 존재, 모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 이른 저녁, 발그스름하게 노을이 질 무렵 황태자의 집무실 앞. 이 제국의 작은 지배자를 가장 지척에서 보좌하는 에르트 백작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하고 서류를 한 번 더 검토한 후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영민하신 황태자께서는 저녁 보고에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짐이 있으면 날카롭게 잡아내시고는 했다.
‘아직 어리신데도 참 엄하시단 말이지.’
다음 세대에도 이 제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 분명하여 마냥 기쁘다가도, 아직 어린 지존답지 않게 눈동자에 예기가 휘돌 때면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특히, 그 홍안(紅眼). 현 황제 칼라일조차도 가지지 못한 ‘황가의 축복.’ 수 세대를 뛰어넘어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는 홍안은 사람의 마음을 보다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그래서 여느 고서들은 홍안을 두고 ‘혜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면 본인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새하얗게 잊고는 했다. 오늘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긴장되는 목소리로 뭐라고 했는지도 모를 보고를 마치고 던져질 날카로운 질문들을 기다리는데. 과묵한 입이 열리며 나온 말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주제였다.
“카시스 영식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 있나?”
‘……이 보고에 카시스 영식이 왜 나오지?’
에르트 백작은 자신이 카시스 영식과 관련한 무언가를 놓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카시스 영식과 상하수도 건립 사업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빠르게 생각해내라, 머리야!’
에르트 백작이 카시스 영식과 하수관의 연관성을 애써 떠올리며 딱딱하게 굳어 있자.
“백작. 대답.”
루드비히가 탁- 종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조용한 집무실, 책상을 내리치는 종이 뭉치 소리는 적어도 에르트 백작에게는 천둥소리처럼 거대했다.
“예? 예!”
“카시스 영식. 들어 봤는지 물었다.”
“예, 친지가 마탑에서 근무하고 있는 마법사라, 카시스 영식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뭐라던가.”
“상하수도 설립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슬쩍 호기심을 보이던 루드비히의 눈이 짜게 식었다. 누가 그걸 물어봤나.
‘이게 아니야. 카시스 영식을 측근으로 영입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원하시는 거로군!’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유능한 보좌관은 빠르게 방향을 바꾸었다.
“영민하기가 이를 데 없고, 마법 실력 또한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며,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외모 또한 수려하여 또래 영식들과 영애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눈칫밥을 입이 아닌 코로 잡순 보좌관의 대답은 또다시 오답이었다. 카시스 영식 잘난 건 루드비히도 이미 알고 있다. 주변에서 온통 아르티나 공자들과 카시스 영식 칭찬뿐인데, 황태자인 그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작은 친구가 카시스 영식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더러워진 기분이라도 풀리도록 영식의 부족한 부분을 좀 얘기해 보라고 한 건데. 영 눈치가 없는 보좌관은 영식이 잘났다는 사실만 나열하고 앉았다.
‘그렇다면 그 잘난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군.’
감히, 땅 도둑으로부터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들은 그 얼굴을.
“그토록 뛰어나다면 한번 만나보아야겠지.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넣도록.”
“예!”
상사의 의중을 정확히 짐작한 것이라고 착각한 보좌관이 해맑게 대답하며 나갔다. 루드비히는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여우가 따로 없어.’
동화책을 만들어준다니. 하찮은 땅 도둑의 눈높이에 딱 맞는 유인책이지 않은가.
“꼬맹이 절도죄로 사형은 너무한가.”
손가락을 까닥이던 그가 이내 두꺼운 제국법전을 꺼내 들었다. 그때, 어두워진 창공을 헤치고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창문으로 들어와 그의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왔군. 고생 많았다. 라르고.”
총명한 매는 매일같이 비밀기지의 나무 위에 앉아 이벨리아가 오는지 확인하고, 나타나면 즉각 루드비히에게 날아와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진저리치는 것처럼,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방문을 알고 바람같이 비밀기지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거대한 매 덕분이었다. 쓰다듬어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모양새는 얼마 전 쮸쮸쮸거리는 이벨리아를 보고 코웃음 친 것과는 달리 제법 온순했다. 달이 휘영청 뜬 늦은 시간까지 루드비히의 집무실에는 법전을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벨리아의 표현에 따르자면 ‘앙칼진 매’인 라르고는 주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부리로 얌전히 깃털을 골랐다.
“흐음. 미성년자 유인은 사형도 가능하다라…….”
한 손으로 커다란 매를 쓰다듬으며 마침내 법전에서 원하는 답을 찾자 그의 수려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동화책으로 병아리를 유인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미성년자 유인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법전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하던 루드비히는 해당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넣었다. 지금 당장에야 쓸 일 없겠지만, 언제든 수틀리면 카시스 후작 영식에게 사용할 요량으로. 그 시각. 렐리안에게 마법을 가르치던 이크리안은 난데없이 느껴지는 오한에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 며칠 뒤, 이크리안은 황송하게도 이 제국의 작은 태양으로부터 초대장을 받고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이크리안의 열세 살 인생, 아직 어리다면 어려 황궁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카시스 가문의 장자, 이크리안 카시스라 합니다. 뵙게 되어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좀체 긴장하는 일이 없는 이크리안은 부드러이 웃으며 황태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인사가 뭐 저리 완벽해.’
그 인사 어디에도 흠잡을 것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루드비히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황태자궁에 소환되었으면, 벌벌 떨지는 않을지언정 긴장 정도는 하는 것이 정상 아니던가.
“그대가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린다던데.”
그래서였다. 마주하는 인사 없이 곧바로 짤막한 한마디를 던진 것은.
“과찬이십니다.”
“과찬인지 아닌지는 내가 평가하도록 하지.”
이내 루드비히는 ‘상하수도 관로의 효과적 유지관리를 위한 자산관리기법 개발’, ‘선박 운항자 안전 의식에 기초한 선박통항 최소 이격 거리에 관한 대안’ 등을 내놓으라고 이크리안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그 영리함으로 따지자면 이크리안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유일한 세력이었던 모후를 잃고도 압도적인 왕재(王才)만으로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의 마음마저 돌릴 정도였으니. 아직은 둘 다 어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으나, 오래도록 이어진 가열한 토론에 이크리안의 그 강건한 정신력은 곱게 갈렸다. 심지어 터덜터덜 후작저로 돌아온 이크리안의 두 팔에는 루드비히가 건넨 숙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상당히 촉박한 마감 기한을 적은 종이와 함께.
“이런…….”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크리안은 난처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황태자 전하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늘이 첫 대면이기에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 영민한 머리로도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그날부터 루드비히는 주기적으로 이크리안을 불러 제국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며 독촉했다.
‘뭐, 꽤 쓸 만하기는 하네.’
이벨리아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리는 것이 못내 질투나 시작한 괴롭힘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크리안이 내어놓는 해답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맘때 즈음. 카시스 후작저로 놀러 간 이벨리아는 이크리안의 늘어진 다크서클을 보고 신나게 손가락질하며 웃어댔다.
“아하하하- 좀비! 좀비다!”
그것도 모자라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 요즘 아주 게을러서 신간을 내지 않는다며 이크리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짹짹거렸다.
“게으른 동아책 공잔 공잔잔을 매우 쳐라!”
“매우 칠 때는 이걸로 치세요, 이브.”
“고마어, 렌리안!”
이크리안의 눈물 나는 고생길이 자기 때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