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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릴 거야! (36/323)

36화.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릴 거야!2021.02.01.

이크리안은 열정적이었다. 작은 병아리가 후작저에 방문하게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법 동화책을 생산해내었다.

16549726515707.jpg“오늘도 왔군요, 이브!”

16549726515712.jpg“동아책은 하루라도 안 보면 언덩이에 까시가 나지!”

그리고 이벨리아는 렐리안과 동화책을 읽기 위해 카시스 후작저를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즉, 완벽하게 이크리안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굳이 예를 따지자면 신분이 더 낮은 후작영애가 공작저로 방문하는 것이 옳았으나, 휴고나 엘리시아나 이벨리아나 그런 소소한 것들을 꼬장꼬장하게 따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16549726515712.jpg“이 동아책 아주 재미써.”

16549726515707.jpg“그걸 다 읽으셨으면 다음은 이걸 보세요. 보시는 동안 저는 잠깐 다녀올게요!”

16549726515712.jpg“옹. 언능 가따와!”

모든 것이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이 함께 동화책을 읽다가 렐리안이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도. 4월이 다 되어가 창문 밖으로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날이 좋아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꽃가루가 들어오는 바람에 종종 재채기를 하는 것도. 단 하나, 렐리안이 자리를 비운 새에 누군가 들어온 것을 제외하고는. 동화책을 팔락 팔락 넘기는 소리만이 메우던 방에 어린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겹쳤다. 렐리안이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줄 알았으나, 처음 보는 소녀였다.

16549726515712.jpg“……?”

너는 누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이벨리아를 향해 소녀가 입을 열었다.

16549726515731.jpg“아르티나의 공녀님 맞으시죠?”

렐리안과 엇비슷할 나이의 소녀는 렐리안보다 흐릿한 머리칼 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딘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소녀가 샐샐 웃자, 이벨리아는 경계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26515712.jpg“옹. 넌 누구?”

16549726515731.jpg“실례했습니다. 먼저 소개를 드렸어야 했는데. 저는 카시스 후작가의 장녀인 네피르라고 합니다. 공녀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소녀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드레스 끝자락을 살포시 잡고 허리를 숙였다. 연한 머리칼 때문인지, 소녀 그 자체가 마치 수채화처럼 청초해 보였다. 그러나 가족들을 비롯하여 친구들까지 온통 미인들 일색이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치가 현저히 높아져 버린 이벨리아는 그깟 외모에 감탄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그마한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16549726515712.jpg“……?”

이상하다? 카시스 후작영애는 렐리안이고, 영식은 우리 오라버니 친구인데? 렐리안한테 언니가 있었던가?

16549726515712.jpg“렌리안, 언니?”

16549726515731.jpg“네, 제가 언니예요.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제 아버지가 후작님이시거든요. 렐리안보다 제가 먼저 태어났고요.”

이벨리아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말을 ‘사생아’로 연결 짓지 못했다.

16549726515712.jpg‘렐리안의 언니인데 어떻게 어머니가 후작부인이 아닐 수가 있지?’

커다랗고 맑은 바다 빛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카시스 후작가의 꼬인 족보에 혼란을 느끼고 있던 그때.

16549726515707.jpg“이브!”

마침 렐리안이 진료를 마치고 커다란 쿠키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이벨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맛의 쿠키여서 오늘 오전부터 후작저의 요리사를 졸라 함께 만든 것이었다.

16549726515707.jpg“이브, 쿠키 먹을……!”

유일한 친구가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해 줄 것을 기대해 빠르게 달려온 렐리안은, 특유의 애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네피르를 발견하는 순간 바삐 놀리던 발걸음을 급히 멈추었다.

16549726515707.jpg“아…….”

미처 숨기지 못한 침음이 흘렀다. 후작 영애의 앞에서 당황해야 할 것도, 멈칫거려야 할 것도, 모두 네피르였다. 그러나 네피르는 당당했고 렐리안은 움츠러들었다.

16549726515731.jpg“렐리안, 내 동생. 오랜만이야! 뭐 그리 비싼 얼굴이라고 보여주지도 않고. 언니 섭섭하게.”

말투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했으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살쾡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549726515707.jpg“…….”

16549726515731.jpg“공녀님, 같이 놀아도 될까요? 저도 꼭 한번 공녀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거든요!”

사색이 된 렐리안과는 완전히 상반되게, 네피르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순진하고도 해사했다. 렐리안에게 향하던 사나운 눈빛은 이벨리아에게 향하는 순간 순한 고양이로 돌변했다.

16549726515712.jpg“그래!”

그 미묘한 기류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벨리아는 렐리안의 언니라고 하니 흔쾌히 답했다.

16549726515712.jpg“자. 이거 바.”

심지어 저번에 보던 동화책 중 한 권을 추천해 주기까지 했다. - 팔락. 이벨리아가 얼마 남지 않은 동화책을 넘기는 짧은 시간 동안, 렐리안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16549726515731.jpg‘역시. 렐리안 네가 변할 리 없지.’

네피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탁, 책을 덮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16549726515712.jpg“다음 권이 없떠. 다녀오께!”

가지고 온 동화책을 전부 읽은 이벨리아가 발딱 일어나 이크리안의 서재로 향했다. 이벨리아가 방 밖으로 나가고 발소리가 희미해졌을 때 즈음. 기다렸다는 듯이 네피르가 입을 열었다.

16549726515731.jpg“렐리안. 이것 좀 봐. 아버지께서 올해 생일 선물로 주셨어.”

16549726515707.jpg“…….”

네피르가 자랑스레 손에 올린 것은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였다.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목걸이는 척 보기에도 고가였다. 그러니 그 선물에 후작의 사랑이 얼마나 담겼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6549726515707.jpg‘나는 이번 생일에 뭘 받았더라.’

문득 생각하던 렐리안은 답을 찾았다.

16549726515707.jpg‘아, 나는 마법서를 받았었어. 난 마법도 할 줄 모르는데.’

울듯이 일그러지는 표정을 본 네피르는 한층 더 신이 난 어투로 말을 이었다.

16549726515731.jpg“혹시 그거 들었어? 우리는 같은 해에 태어났잖아. 아버지께서 너의 데뷔탕트에 나도 함께 얼굴을 비추라고 하시더라. 우리 비슷한 드레스를 맞추어 입으면 쌍둥이 같고 참 예쁠 것 같아. 그렇지?”

아. 싫었다. 렐리안은 정말로 싫었다. 언니니 동생이니 허락한 적 없는 호칭을 계속 입 밖에 내는 것도. 아버지께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것도.

16549726515707.jpg‘다 지긋지긋해…….’

16549726515731.jpg“렐리안. 너 왜 말이 없니?”

네피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뾰족 내밀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피르는 렐리안이 보더라도 겉으로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데퐁트 후작가의 세레스가 화려한 장미라면, 네피르는 청초한 백합 같았다.

16549726515707.jpg‘그리고 나는 들풀 같아.’

아무런 향도, 매력도 없는. 아버지도 네피르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았고, 기사들도 그녀를 향해 자주 웃는 것을 보았다. 네피르가 환히 웃으면서 치대면 분명히 공녀님께서도 나보다 네피르를 더 좋아하실 거야.

16549726515707.jpg‘공녀님은 내 하나뿐인 친구인데…….’

16549726515731.jpg“있잖아, 렐리안. 아직 먼 훗날이지만, 데뷔탕트에서는 너보다 내가 빛나고 싶어.”

16549726515707.jpg“네 마음대로 해. 난 그런 건 별로…….”

16549726515731.jpg“아, 세상에.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네.”

태연하게 말을 잇던 네피르가 돌연 큰 말실수를 했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16549726515707.jpg“응……?”

16549726515731.jpg“아……아니, 너는 몸이 좋지 않으니까 데뷔탕트까지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안타깝게도…….”

제법 잔인한 말이었다. 순진한 얼굴과 가슴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기에, 렐리안은 순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16549726515707.jpg‘공녀님. 빨리 오시면 좋겠다. 아니, 그냥 안 오시면 좋겠다…….’

네피르가 공녀님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모르잖아. 렐리안이 입술을 깨물고 아래만 응시하자, 네피르가 오히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726515731.jpg“말을 실수한 건 미안하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해. 그렇잖아. 후작부인께선 지방 영지의 따님이셨고, 우리 어머니는 대상단의 후계자셨는데.”

네피르가 검지로 연보라색 머리를 돌돌 말며 고개를 기울였다.

16549726515731.jpg“그런데 나는 사생아라고 불리고, 너는 후작영애 노릇을 톡톡히 하니…….”

네피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아버지는 같은데, 렐리안만 고귀하게 떠받들어지고 자신은 후작저로 들어와 살지도 못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렐리안이 몸이 약하고 마음도 여려 자신에게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점만이 위안이었다.

16549726515731.jpg“아, 그리고 이거 내가 말했던가?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네피르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16549726515731.jpg“그…… 때때로 사생아를 입적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

16549726515707.jpg“입적……?”

16549726515731.jpg“황권의 주인이신 폐하와 신권의 대표이신 공작가 가주의 승인이 있으면 가능하다던데.”

16549726515707.jpg“……!”

애써 담담한 척을 하던 렐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원하는 반응이 나와 만족스러운 듯 네피르의 입술이 화려한 호선을 그렸다.

16549726515731.jpg“공신 가문의 청이라면 황제 폐하께서도 거절하실 리가 없고, 아버지께선 공작 각하와 친분이 있으시니 시간문제라는 소리야. 내가…….”

네피르가 렐리안 쪽으로 한껏 몸을 밀착하여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16549726515731.jpg“……우리 가문의 첫 번째 영애가 되는 것은.”

‘우리’ 가문. 렐리안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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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이벨리아는 동화책을 가지러 간다고 신나서 뛰어나가다가 몇 걸음 가지 못해 이크리안을 만났다.

16549726626702.jpg“어디를 그리 급히 가십니까, 공녀님.”

16549726515712.jpg“앗, 동아책 공잔 공잔잔! 다음 권이 없떠서 가지러 가는 중이야!”

16549726626702.jpg“이런. 귀한 걸음 아까우십니다. 제가 바로 가져다드릴 테니, 렐리안과 얘기라도 나누고 계시지요.”

그리하여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방으로 돌아오던 중. 이벨리아는 열린 문틈 사이로 렐리안과 네피르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정확히 ‘너는 몸이 좋지 않으니까 데뷔탕트까지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부터. 벽에 살며시 기댄 채로 이후의 대화까지 모두 들은 이벨리아의 얼굴은 분노로 발갛게 물들었다. 코에서는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16549726515712.jpg“카롱, 나 말리지 마.”

16549726656593.jpg“……망이나 잘 보겠습니다.”

이때의 아기씨는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작은 주인을 곁에서 모셔온 카론은 때로 뵈는 것 없이 달려드는 아기씨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혹시라도 저 아이가 아기씨에게 손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그때 가서 개입할 생각이었다.

16549726515712.jpg“주거떠. 아주 그냥 꿀밤을 먹여줄 거야. 이건 내 따움이니까 카롱은 끼어들지도 마.”

기사들을 보고 자란 이벨리아의 표정은 마치 거대한 전투를 앞둔 것처럼 다부졌다. 입술을 앙다문 채로 양 주먹을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적을 부리로 마구 쪼아댈 것 같은 병아리와 닮았다.

16549726656593.jpg‘……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으시군.’

카론은 한참 작은 아기씨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때, 열린 문틈 사이로 이벨리아에 대한 이야기까지 새어 나왔다.

16549726515731.jpg“공녀님께서도 아직 어리셔서 뭘 모르시는 게 분명해. 그러니까 내일조차 기약하기 힘든 너랑도…….”

- 콰앙. 이벨리아가 짧은 다리로 문을 대차게 걷어찼다. 제대로 닫아놓지 않았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16549726515712.jpg“내가, 뭘 몰라?”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네피르가 이내 여유로운 말투로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16549726515731.jpg“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저 앞으로 저도 공녀님과 더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말이었지요.”

네피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항상 사랑받았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주변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함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니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르실 것이 뻔한 고귀한 공녀님쯤이야. 렐리안보다 자신에게 더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16549726515731.jpg‘공녀님을 우방으로 만들면 앞으로 사교계에서의 지위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지.’

그녀는 펼쳐질 꽃길을 생각하며 애써 수줍은 척 볼을 붉혔다.

16549726515731.jpg“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곧 카시스 후작가에 입적될 거거든요.”

16549726515712.jpg“입쩍이 모야.”

네피르에게 묻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은 이벨리아가 고개를 돌려 카론을 바라보았다. 카론이 허리를 숙여 짧게 설명했다. 음. 별로 어렵지 않다. 이벨리아는 쉽게 이해했다. 제가 몰랐던 것이 약간은 민망해 평소보다 조금 더 고개를 치켜들고 도도한 척 물었다.

16549726515712.jpg“그래서?”

네피르는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726515731.jpg“그러니까 제가 장녀가 되면, 아무래도 차녀에 몸도 약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렐리안보다는 제가 조금 더 공녀님께 도움이…….”

그러나 중간에 끊고 들려오는 말은 네피르의 기대를 저버려도 한참은 저버리는 것이었다.

16549726515712.jpg“야.”

16549726515731.jpg“에?”

네피르도 아니고, 후작영애도 아니고, ‘야’라니? 네피르는 설마 저를 부르는 것인가 싶어 엉성한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16549726515712.jpg “모라는 거야. 이 요망스러운 조도마리가.”

16549726515731.jpg“……?!”

16549726685697.jpg“……!”

렐리안, 네피르, 그리고 카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기사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무가(武家)의 공녀였다. 비록 기사들이 이벨리아의 앞에서만은 우리 아기씨 고운 입 보호 스킬, ‘자체 필터링’을 발동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오며 가며 주워들은 기사들의 말투가 있었다.

16549726515712.jpg“입쩍? 개밥 말아먹고 있네. 난 동의 안 할 건데?”

16549726515731.jpg“공녀님이 아니라 공작 각하의 동의가…….”

16549726515712.jpg“내 뜻이 곧 우리 아빠 뜻이야. 내 말이 곧 아르티나의 말이고.”

우리 아빠가 늘 그랬거든. 일은 저질러라. 책임은 아르티나가 진다. 그렇지만 정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르면 엄마한테 엉덩이 맞는다. 이 경우는 친구인 렐리안을 구하고 저 요망한 조동아리를 퇴치하려는 목적이니, 이벨리아의 입장에서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16549726515731.jpg“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일을 공녀님이 마음대로 정하실 수가!”

16549726515712.jpg“옹. 이떠.”

16549726515731.jpg“대체 쟤랑 무슨 관계시길래……!”

16549726515712.jpg“칭구. 그리고 너는 내 칭구를 개롭히는 악땅.”

네피르가 검지를 펴 렐리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 이벨리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찬란한 금빛 머리를 쓸어내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16549726515712.jpg“그 손가락 내려. 콱 뽀사버리기 전에.”

뽀사? 아니, 세상 어떤 공녀가 저런 단어를 써?

16549726515731.jpg“하. 공녀님이 네 편 들어주시니 아주 좋겠다?”

다시 렐리안을 걸고넘어지자 이벨리아의 눈이 위험스레 빛났다.

16549726515731.jpg“가증스럽게 아픈 걸 티 내면서도 나보다 사랑도 못 받는 주제에. 죽기 전까지 공녀님 관심이라도 받는 게 얼마나 다행- 꺄아악!”

감히 이벨리아에게는 뭐라고도 못하고 만만한 렐리안을 향해 평소 성정대로 쏘아붙이던 네피르의 머리에서 일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비명에 깜짝 놀란 렐리안이 고개를 들어보니 고귀하신 공녀님이 네피르의 고운 머리채를 휘어잡고 짤짤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16549726515707.jpg“……이……이브?”

16549726515712.jpg“너! 내 칭구한테 지금 뭐라고 해떠?”

16549726515731.jpg“꺄악! 놔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16549726515712.jpg“죽긴 누가 죽어! 이 조사 버릴 조동이가! 네 입에서는 똥이 나오는 것도 아깝따!”

만에 하나라도 네피르가 이벨리아에게 손을 댈까 날카롭게 경계하는 와중에도 카론은 생각했다.

16549726656593.jpg‘단장님께 말씀드려 기사단 입을 더 단단히 단속시켜야겠군.’

조동아리, 개밥 말아먹는 소리, 똥이 나오는 것도 아깝다, 모두 기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었다. 아가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더니, 어느새 아기씨가 저 단어들을 야금야금 주워 사용하고 계실 줄이야…….

16549726515712.jpg“이 지뿌라기 같은 머리카락! 죄다 뽑아버릴 거야!”

16549726515731.jpg“꺄아아아악! 기사아!”

16549726515712.jpg“기사? 기사아-? 너만 기사 있냐?”

쥐어뜯던 머리채를 내동댕이친 이벨리아의 손에는 연보랏빛의 머리칼이 한가득 뽑혀 있었다. 손에 쥐어진 머리카락 한 다발을 흘끗 바라본 이벨리아는 전리품을 바닥에 당차게 패대기쳤다.

16549726741832.jpg

  마침 동화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던 이크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16549726626702.jpg“아니, 이게 무슨…….”

그러나 영민한 두뇌와 뛰어난 눈치의 소유자답게, 곧바로 방 안에서 벌어진 일을 파악하고는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을 건 다음 조용히 문을 걸어 잠갔다.

16549726515712.jpg“너! 너는 절대로 렌리안보다 빛날 수 없어!”

16549726515731.jpg“왜! 내가 왜!”

16549726515712.jpg“왜?”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이벨리아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16549726515712.jpg“내가 아르티나니까.”

16549726515731.jpg“…….”

그 짧은 명제는 진정 그 모든 것을 손쉽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다.

16549726515712.jpg“내 칭구한테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해 바. 그때는 진짜 대머리로 만들어 줄 거야! 다시는 머리카락이 안 나도록 구멍도 다아- 막아버릴 거야!”

16549726515731.jpg“흑…… 흐엉…….”

네피르가 울든 말든. 처음으로 사귄 소중한 또래 친구에게 죽을 거라느니 뭐라느니 망발을 내뱉은 자에 대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단탈리온들로부터 이벨리아를 구하고자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뛰쳐나왔던 소중한 친구인데.

16549726515712.jpg“실라…… 아니지, <실프>!”

네피르를 차갑게 바라본 이벨리아는,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페를 부르려다가 아가레스가 했던 충고를 기억해내고서는 황급히 말을 바꾸어 실프를 불러내었다.

16549726515712.jpg“쟤 가지고 가서 담벼락 밖에 던져 놔줘. 꼴도 보기 시러!”

실프는 네피르를 마치 태풍에 휩쓸리는 것처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후작저 담벼락 바깥으로 실어 날랐다. 네피르가 창문 바깥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며 이벨리아는 문득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16549726515712.jpg“아! 머리만 쥐어뜯고 꿀밤을 못 때려따.”

그러다가 렐리안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려 빽 소리쳤다.

16549726515712.jpg“렌리안!”

16549726515707.jpg“이……이브? 훌쩍…….”

16549726515712.jpg“뚝 그쳐!”

답지 않게 엄하게 이야기하는 이벨리아의 말투에, 렐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16549726515712.jpg“앞으로 쟤가 밉살맞은 말을 하거든 콱 물어버려. 야만스러운 조도마리를 콱 때려버려!”

16549726515707.jpg“물고, 때려요……?”

16549726515712.jpg“렌리안이 곧 카시스야. 누가 뭐래도 그래.”

16549726515707.jpg“…….”

16549726515712.jpg“아니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 나한테 일러!”

아무래도 안 되겠다. 렐리안은 너무 약해 보여서. 검술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자신이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벨리아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쭈욱 펴고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하찮은 병아리가 몸집을 부풀리고 강한 척하는 것 같았으나, 렐리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렐리안이 말없이 이벨리아에게 기대었다.

16549726515707.jpg“고마워요, 이브…….”

네피르를 만났던 날이면 어김없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오늘만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정말 입적되면 어떡하지, 싶었던 걱정도 이벨리아의 한마디에 날아갔다. 그 무엇보다도 이벨리아가 네피르가 아닌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

16549726515707.jpg‘친구란 이런 거구나…….’

앞뒤 사정,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내 편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친구인 거구나.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작은 친구의 손길을 느끼면서 렐리안은 다짐했다. 이벨리아가 자신에게 태양 같은 친구라면. 자신은 이벨리아의 주위를 맴도는 행성과도 같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 늦은 밤. 이미 잠들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렐리안은 탁자에 앉아 작은 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나 이크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품에는 아버지가 선물한 마법서를 꼭 안은 채로.

16549726515707.jpg“오라버니, 나 마법 가르쳐 줘.”

16549726626702.jpg“그래.”

이크리안은 이미 이유를 짐작한 듯, 더 물어보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어려울 것이라거나, 지루할 것이라거나. 흔한 경고 따위는 건네지 않았다.

16549726626702.jpg“어떤 계열을 주로?”

16549726515707.jpg“전투계.”

그날부터 렐리안은 이크리안으로부터 마법을 배웠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손을 내밀어준 친구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 ***

16549726515712.jpg“그래서 머리를 자안뜩 뜯은 다음에 실프를 불러서 후작저 바깥으로 날려떠!”

16549726833968.jpg“잘했다.”

16549726833974.jpg“아주 잘했네.”

16549726833978.jpg“역시 내 동생이야.”

저녁 시간. 이벨리아가 요망한 조동아리를 조사 버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휴고, 아르칸, 세드릭은 차례로 이벨리아를 칭찬했다. 딸의, 여동생의 유일한 친구에게 죽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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