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지배자는 다꼬치야2021.01.28.
“뭐가 묻어떠?”
아니. 물리적인 것이 묻지는 않았는데.
“응. 묻었어. 잠시 손대도 되나?”
거짓말. 그래도 아가레스는 손을 대도 되냐고 물어볼 만큼은 예의를 아는 악마였다. 이벨리아 한정이라는 것이 흠이었지만. 끄덕끄덕. 승낙이 떨어지고, 이벨리아가 찹쌀떡 같은 볼을 들이밀었다. 아가레스는 아까부터 한번 꼬집어보고 싶었던 말랑말랑한 볼을 조물조물했다. 날카로워졌던 기분이 살짝 풀리는 것도 같았다.
“마따. 얼마 전에 비민기지에서 펜을 잃어버렸어. 잠옷에 그려진 변아리랑 색이 똑같아서 가장 좋아하던 거였는데.”
뺨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순순히 볼을 맡긴 이벨리아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잠시만.”
볼에서 손을 떼고 꽤 오랜 시간 눈을 감고 긴 손가락을 몇 번 까닥이던 그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나가 이내 손에 노란색 깃펜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앗! 어떻게 찾아떠? 오래 찾아도 없었는데!”
“유능한 친구 뒀지? 내 기운은 예리하거든.”
그가 으스대듯 웃으며 이벨리아에게 깃펜을 건네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인지하고 떠올리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기운이 느껴지니까.”
깃펜은 나한텐 그다지 소중한 게 아니라서 감정 잡느라 한참 걸렸지만. 그가 여상히 대답했다.
“헤헤, 깃펜. 고마워!”
“…….”
아까 사과주스를 마시면서 했던 질문. ‘그런데 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맨날 어떻게 엄청 빠르게 알아?’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병아리색 깃펜을 찾은 것이 마냥 기쁜 작은 친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무심하게도. *** 자신은 천재가 틀림없다며 방방 뛰는 이벨리아에게 아가레스는 주의를 주었다. 중급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은 가족들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검술에 없던 재능이 모조리 정령술로 간 것 같아서 마냥 신난 이벨리아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에 영 진심이 없자 아가레스는 커다란 손을 아이의 머리에 턱 올려 고정하고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
“절대로 안 돼. 알았지?”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머리를 꾸욱 꾸욱 누르자 키가 작아질 것만 같아 도리질 치던 이벨리아가 그제야 제대로 답했다.
“끄앙! 끄앙! 말 안 해애! 이거 놔아!”
하급 정령 정도야 천재라고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중급 정령을 불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실이 탐을 내는 것도 모자라, 소문을 들은 마족들마저 몰려들 것이 자명했다.
‘특히 마왕 바알의 세력이 개떼처럼 몰려들겠지.’
1차 인마전쟁 전후로 상급 정령사가 굉장히 희귀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뛰어난 정령사로 자라날 것 같은 기미를 보이는 자들은 미리미리 바알 측에서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마족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이 바로 정령술이기에, 바알에게 있어서 뛰어난 정령사란 제거대상 1순위였다. 그렇기에 결국, 아가레스의 충고는 오롯하게 이벨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약속했어, 꼬맹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그가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서 손을 떼며 눈을 맞추었다.
“호롤로롤로로!”
그러나 이벨리아가 누구던가. 말이라고는 지지리도 듣지 않는 다섯 살이었다.
“…….”
그리고 한편으로는 겁도 많은 다섯 살 개복치였다. 아가레스를 놀리듯 혀를 굴리며 호로롤로로- 거리던 이벨리아는 그의 수려한 눈썹이 불길하게 슬쩍 위로 올라가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지금 납작 안 엎드리면 꿀밤 각이다!
“알았다니까아. 비민로 할 거야. 토끼를 만난 것도 지금까지 쉿- 하고 있잖아!”
친구를 좀 믿어봐! 이 믿음 없는 악마야!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가볍게 내뱉었다.
“그래. 믿어.”
그래, 믿는다. 네가 아닌 나를. 가진 힘이 달가웠던 적 없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적어도 이 작은 등 하나는 막아줄 수 있으니. 그러니 아무렴 어떨까. 그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정령술의 천재가 되었으니 이제 검술도 좀 발전시켜볼까?”
아가레스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지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도동실 떠올랐다. 으익. 검을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싫은데. 정령들을 많이 불러내서 그런지 벌써 아주 피곤한데. 밖은 아직 조금은 추운데.
“코오-.”
폭신한 의자에 몸을 포옥 묻고 눈을 감은 채 입으로 코오- 하는 소리를 내어 보았다.
“자는 척 해봐야 소용없어.”
그러나 다섯 살짜리 꼬맹이쯤이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도 있는 아가레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벨리아를 덥석 들쳐 맸다.
“흐아아, 놔라! 이브 금지령! 이브 금지령!”
“이브 금지령도 소용없어.”
아주 사납게 이브 금지령을 외쳐 보지만, 아쉽게도 이것 또한 효과가 없었다. 이토록 냉정한 악마이니, 아마 연약한 척도 소용이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지!
“추워. 추워. 밖에 나가면 아마 금방 감기에 걸리고 말걸?”
멈칫-. 자는 척과 이브 금지령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긴 다리를 뻗어 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가 ‘감기’라는 말에 잠시 굳는 것이 느껴졌다.
‘요망한 악마, 이거로군!’
아가레스의 어깨에 척 걸쳐진 이벨리아의 입에 승리자의 오만한 미소가 걸렸다.
“내일이면 기침이 콜록콜록 나고 열이 펄펄 나서 풀떡 뜨러지고 말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이렇게 추우니까. 분명해.”
“지금 5월인데?”
“원래 잉간은 5월에 추워.”
이내 문고리에 뻗던 손도 느릿하게 거둬졌다. 월척이다! 악마를 낚았다! 사실 야생의 꼬맹이는 바로 어제만 해도 오라버니들과 신나게 잔디 썰매를 즐겼지만, 지금만큼은 세상 더할 나위 없이 연약한 꼬맹이에 빙의했다.
“나는 아직 아가라서 면적이 없어.”
“……면역력.”
“옹, 그거! 그게 없어.”
잘 모르는 단어까지 골라 들며 최대한 약하고 가련한 척을 한 결과. 이벨리아는 다시 모닥불 앞 포근한 의자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아가레스는 늘 그렇듯이 허공에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척 보기에도 흉기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의 왼쪽 팔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아직 약간은 서늘한 바람이 흐르지만 오두막은 폭신하고 따뜻했다. 휘도는 공기에서도 마치 지금 막 햇볕에 말린 이불을 덮고 있는 것만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곁에 있는 친구가 기꺼웠다. 아가레스도, 이벨리아도. 아무 말 없어도 편안한 이 분위기를 몹시 좋아했다. 아가레스는 친구가 기대기에 보다 편하도록 왼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 순간. - 끼이익. 문에 제대로 기름칠을 하지 않아 나무와 경칩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가 울렸다. 그의 수려한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이내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날선 목소리를 던졌다.
“대체 어떻게 알고 매번 방해야.”
들어온 은발머리 소년의 코트에는 흩날린 꽃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코트를 벗으며 꽃가루가 날리자 아가레스가 커다란 손으로 이벨리아의 코와 입을 막았다. 또 재채기 할라.
“앗! 식냥 도둑!”
“반가워하지 마. 네가 자꾸 반겨주니까 저 자식이 진짜 환영받는 줄 알잖아.”
아가레스가 쯧- 혀를 찼다.
“아는 거야 쉽지. 매번 놀라는 것을 보아하니 그대에겐 어려운 일인가 보군.”
“매번 한발 늦는 것을 보아하니, 별 대단한 능력은 아닌가 본데.”
“악마의 불길한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동일선에 놓아서는 곤란하지.”
“수준 차이를 아니 다행이군그래.”
오늘도 어김없이 핑퐁 게임을 하듯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와 두 지배자의 눈에서 튀는 스파크는 이미 이벨리아에게 익숙했다.
“대체 언제 천들래? 조용히 좀 해! 으른이 책을 읽고 있는데 말이야!”
아가레스의 커다란 손에 의해 코와 입이 가려진 이벨리아가 읽고 있던 정령서를 탁탁 치며 말했다. 두 지배자는 애써 어른인 척하는 잔망스러운 말투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비록 루드비히가 이 비밀기지의 주도권을 가지고 이벨리아와 티격태격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비밀기지의 주도권은 그가 아니라 저 땅 도둑에게 있다는 것을. 하나뿐인 친구를 만날 수 있기에 이 비밀기지는 비로소 의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곳. 어느새 두 지배자의 안식처이자 이벨리아의 시선으로는 악당들의 소굴이 된 이곳은, 작은 병아리가 원하는 것이 법이자 규율이 되었다.
“후…….”
루드비히가 모닥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티격태격할 때에도 내쉰 적 없는 한숨을 내쉬는 것이 못내 의아하여, 이벨리아가 정령서에서 눈을 떼고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한숨을 쉬면 늙은 거랬는데!”
“늙……. 아니, 말해봤자 다섯 살은 모르는 일이야.”
다섯 살은 모른다는 말에 오기가 생긴 이벨리아가 몸을 일으켜 의자 밑으로 폴짝 뛰어내린 다음 루드비히에게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신고 있는 슬리퍼 앞에 달린 토끼의 귀가 흔들거리는 것이 귀여워 루드비히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해 봐! 해결해 주께. 나 잘해!”
응, 사실 해본 적 없다. 그런데도 애써 당당한 표정으로 루드비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당한 이벨리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루드비히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 작달막한 꼬맹이가 알아봤자 무엇을 알겠냐마는. 그래도 이 몇 달간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을 입 밖으로나마 내어놓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런 시답지 않은 기대에 의한 것이었다.
“지배자가 뭐라고 생각해?”
약 두 달 전, 황제가 황태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현 지배자가 차기 지배자의 통치관을 가늠하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그 어떤 대답을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태껏 배워온 것을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이 제국의 근간은 ‘귀족’이었다. 막대한 세금을 감당하는 귀족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어라. 모든 통치자들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이 답이 왠지 반쪽짜리 같았다.
“지배자? 황제 폐하나 우리 아빠?”
“응.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이 뭐라고 생각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고 루드비히가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아가레스도 한층 진해진 눈으로 시선을 주었다.
“다꼬치. 맛있는 다꼬치야.”
……그러면 우리도 닭꼬치야? 역시나. 다섯 살짜리에게 뭘 기대해. 두 지배자의 입에서 드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드높이 떠받들어지는 지배자와, 길거리에서 흔히도 볼 수 있는 싸구려 닭꼬치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나 추뽁제 때 봤어. 다꼬치.”
“먹고 싶으면 사다 줄게. 지금.”
아가레스가 곧바로 몸을 일으키자, 이벨리아가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는 듯 부인했다.
“아아니, 지금 지배자가 뭔지 얘기하고 있잖아. 내가 먹고 싶은 건 맞는데, 지금은 지배자가 다꼬치라고 얘기한 거야.”
“지배자가 왜 닭꼬치야?”
이벨리아가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 내뱉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짐작한 루드비히가 맑은 바다 빛 눈을 바라보았다.
“추뽁제에서 나는 다꼬치를 먹으려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어. 맛있는 다꼬치인데, 나한테는 별로 소중하지 않았어.”
두 지배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허리께에도 채 오지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어린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지배자들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런데, 다꼬치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어떤 할머니도 봤고, 나만큼 작은 칭구들도 봤어. 그 사람들한테 다꼬치는 엄청 소중한 거였던 거야.”
아직 어린아이라, 생각하는 그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한 번 더 정리해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다꼬치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먹을 것도 많고 돈도 많아. 그런데 저 밖의 사람들한테 추뽁제의 다꼬치는 그 순간 가장 소중한 거야. 그래서 지배자는 다꼬치야.”
찰나의 정적 후. 말 그대로 한 세계를 복종 시켜 그의 발아래에 둔 어른 지배자는 만족스러운 듯 입술 끝을 올렸다. 이제 막 지배자가 되고자 날개를 펼치려는 어린 황태자는 숙연했다. 닭꼬치. 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가장 낮은 곳으로 한없이 가벼이 날아가 한없이 무거운 간절함이 되어 주어야 하는 지배자의 무게를. 아직 어린 지배자는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 궁으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자리에 앉아 오늘 국정 회의에서 오갔던 내용들을 복기했다. 종이 위에 바쁘게 움직이던 깃펜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둔 꽃잎을 손으로 찾아 더듬었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그의 유일한 친구의 목소리가 떠다녔다. ‘지배자는 곧 닭꼬치’라. 풍족한 귀족들에게 닭꼬치는 중요치 않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러나 배를 곯는 일부 제국민들에게는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 작은 친구의 말처럼 황제 역시 똑같았다. 귀족들에게 지배자는 필요치 않다. 없어도 그들은 풍족할 터이니. 그러나 생이 힘든 제국민들일수록 지배자에 대한 기대는 크고, 소망 또한 크다. 한편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였을 때의 실망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꽃잎을 두어 번 손가락으로 쓸어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친구가 말했던 귀족들의 영역 밖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현 황제 칼라일도 갖지 못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황가의 축복. 홍안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소년의 기운을 담고 넘실거렸다. 어린 지배자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어떤 지배자가 될지, 길을 찾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