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나는 천재 정령사야!2021.01.25.
이벨리아는 매해 생일마다 더할 나위 없이 독특하고 귀중한 것들을 받아왔다. 제발 좀 일반적인 생일 선물을 받고 싶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가족들은 매년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는, 특이하고 비싸며 귀중하지만 쓸모는 없는 것들을 가져왔다. 그것도 상당히 뿌듯한 표정으로. 작년 생일에도 오라버니들은 어디 쓸 데도 없는 보석 검을 주었었다. 휴고는 더 나아가서 가치를 매기기도 어렵다는 광물인 하르콘으로 만든 드레스를 사주었다. 이벨리아가 입기에는 아직 커다란 드레스는 가히 갑옷과도 같은 강도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를 번쩍 들어보려다가 휘청이며 넘어지기도 했었다.
“내 생일 떤물은 틀려떠…….”
과거 선물들을 끌어안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었지. 그러나 며칠 전에 받은 올해 생일 선물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이벨리아는 선물 더미 가운데에 앉아 하나씩 만져보며 다시금 행복감을 만끽했다.
“이건 돈물로 변하는 거래!”
[신기하네. 나도 처음 봤어. 이런 건.]
약 48시간 동안 사람을 가장 비슷한 동물로 바꾸어 준다는 마도구. 휴고가 훗날 긴급하게 모습을 숨길 일이 있으면 사용하라며 건네준 이것은 오랜 세월 존재한 정령도 처음 볼 정도로 희귀한 마도구였다.
“나는 아마 호당이 같은 걸로 변할 거야. 호당이랑 제일 닮았으니까.”
[아닐 거 같은데.]
“그럼 사자!”
운디네는 맹수만 줄줄 읊는 계약자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린 계약자와 사나운 맹수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우웅…….”
이벨리아의 손이 언뜻 마도구 버튼에 스치자 운디네가 깜짝 놀라 다급히 외쳤다.
[자꾸 그렇게 만지지 마! 그러다가 버튼이 눌려버리면 어떡해.]
“에헤-.”
[그 불길한 웃음 뭐야. 지금 당장 쓸 거 같은 그 웃음 집어치워. 그거 급할 때 쓰라고 분명……!]
- 퐁!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미약하게 이는 연기.
[이럴 줄 알았어……. 궁금한 걸 참으면 우리 계약자가 아니지.]
시야가 확 낮아지자 이벨리아는 자신이 뭐로 변신했는지 알기 위해 거울 앞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이상하네. 커다란 호랑이라면 한달음에 저기까지 닿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의아해하던 이벨리아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자마자 제자리에서 팔딱 뛰어올랐다.
“삑-!”
[아하하하하하- 거봐-! 내가 쓰지 말랬잖아!]
“삐! 삐! 삐약!!”
[앗, 잠깐. 방 나가면 밟히는 거 아니야?]
방 밖으로 포닥포닥 달려나가는 제 계약자의 뒤를 운디네가 급히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머. 웬 병아리가 들어왔지? 쉭- 쉭- 나가!”
“삐약! 삐이!”
집 밖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제 계약자를 위해, 운디네는 병아리의 머리 위에 물로 만든 커다란 화살표와 물로 배열한 글자를 띄워두었다.
「이 병아리는 우리 병아리입니다. 밟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가족들과 기사단이 이를 보고 웃으며 뒤집어진 것은 물론.
“아이고, 우리 아기씨! 어째 변하기 전과 후가 별반 차이가 없으신데!”
“그렇지. 우리 아기씨는 평소에도 저만큼 작으시니까.”
식사 시간마다 죽을 쪼아먹는 이벨리아를 구경하며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다.
“억. 저것 좀 봐. 죽을 드신다! 쪼아 드신다!”
‘저리 가, 이 못된 멍멍이들!’
“아기씨께서 내 손등을 간지럽히시는데!”
헤롤드의 손등을 사납게 콕콕 쪼아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벨리아는 식탁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삐이…….”
병아리라니……. 내가 병아리라니……! ***
“삐- 흐앙!”
이틀 뒤. 엘리시아의 곁에 찰싹 붙어 있다가 다시 사람으로 퐁- 변한 이벨리아는, 또 사고를 쳤다며 엉덩이를 두어 번 찰싹 맞았다.
[으이구. 으이구.]
이틀 동안 혹시라도 이벨리아가 밟힐까 봐 내내 곁을 맴돌던 운디네도 혀를 쯧쯧 차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얼얼한 엉덩이를 문질 문질 쓰다듬으며 이벨리아는 다시 선물 더미로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아마 조금 더 커서 변하면 아주 무더운 돈물이 될 거야.”
너무 어릴 때 써서 작은 동물로 변한 거지.
“맞아. 분명 그런 거야.”
스스로 합리화한 이벨리아는 엘리시아가 준 거대한 정령서를 낑낑 들어 올렸다. 이제 슬슬 정령술을 배워볼까 싶기도 하였던 차였기에, 제법 반가운 선물이었다.
“글씨가 아주 어려워. 난 이제 거의 다 잘 읽는데도. 이 책은 이러캐 뚜꺼우니까 당연해.”
사실 다른 책들도 아직 대부분 못 읽는다. 그러나 괜히 민망해서 사족을 덧붙이며 이벨리아는 모르는 글자들을 표시해두었다. 이따 저녁에 오라버니들의 방으로 가서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글씨를 알지 못하니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던 이벨리아는, 문득 벽에 기대어 세워 둔 목검에 시선을 주었다.
“으음…….”
아무리 정령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검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검술 훈련 횟수가 적어진 것 같았다. 에딘과의 검술 훈련 시간 이외에는 도통 검을 손에 잡지를 않았으니. 이벨리아는 앉은 의자에서 발을 몇 번 까닥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일어나 정령서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목검을 꼬옥 껴안았다. 곧바로 목걸이를 돌리려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도 둘이 다 이쓰면 혼란한데.”
둘이 다 있으면 곤란하다. 비밀기지에서 아가레스를 처음 만난 날 이후. 그는 종종 이벨리아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루드비히까지 합세해서 두 친구가 세상에 별 희귀한 생물을 다 본다는 듯이 오묘한 표정들을 지어대니 수치스러워 죽을 맛이었다. 그 오묘한 표정들은 분명히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표정. 오늘은 제발 덜 창피하게 둘 중 한 명만 오기를 바라며 이벨리아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 5월. 비밀기지의 정원에는 갖가지 예쁜 꽃이 피었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만을 입고 오니 아직은 약간 쌀쌀함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햇살에 부신 바다 빛 눈동자에 커다란 매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우왕. 매다! 쮸쮸쮸 이리 온!”
어딘가로 향하던 매는 한 발로도 움켜쥐어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꼬맹이가 쮸쮸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푸륵- 코웃음을 치고는 유유히 날아갔다. 이상하다. 지금 매가 나를 보고 코웃음 친 것 같은데. 비웃은 것 같은데.
“앙칼진 매로구만!”
어휘 구사력이 한층 높아진 이벨리아는 새로 알아낸 단어들을 여기저기에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이고 있었다. 문맥에는 맞지만 뜯어보면 과하거나 부족한 문장 구사는 요즈음 공작저 사람들의 흥밋거리였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매의 꽁무니에서 시선을 뗀 이벨리아는 다급히 뛰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마법이 걸린 벽난로는 봄에도 따뜻하게 타닥타닥 타올랐다. 벽난로 근처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쭈욱 펴고 앉아 정령서를 펼쳐 들자 몸이 노곤노곤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책을 손에 들고 깜빡깜빡 졸기를 아주 잠시.
“……일어나야지.”
“으앙 차가어!”
짧고 낮은 한 마디와 함께 이벨리아의 통통한 볼로 달달한 사과주스를 담은 컵이 닿았다. 차가움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의자 뒤에서 의자를 감싸듯 짚고 있는 아가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단단한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그를 모시는 악마 로노베가 웃는 일이 없을 것이라 장담했던 붉은 입술은 기실 이 자그마한 친구 앞에서만은 제법 헤펐다.
“사과주스! 어디서 나떠?”
요즘 사과가 나는 철이 아닌데! 안 그래도 저번부터 생 사과주스가 먹고 싶은데 봄이라 사과가 없어서 속상하고 슬프고 세상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며 칭얼대었던 이벨리아가 마치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벌떡 일어났다.
“먹고 싶다며.”
오는 길에 팔더라고. 이벨리아는 별다른 의심 없이 감사하다며 사과주스를 받아 꼴깍꼴깍 마셨다.
“캬아, 특히 맛있다!!!”
오는 길에 팔기는 무슨. 봄은 사과 철이 아니니 열릴 리가 없다. 사실 특히 맛있는 그 사과주스는 아가레스가 부하인 마르바스를 들들 볶아 만들어낸 것이었다. ‘친구’가 사과주스가 먹고 싶다는데, 사과가 나오지 않으면 나오게 만들면 될 일. 그리고 자신이 방법을 모르면 부하를 시키면 될 일. 부하가 사과나무를 심어서 사과를 따오든, 사과를 창고에 고이 보관하고 있는 어느 곳에 가서 사과를 사 오든 그것은 지배자인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충직한 마르바스는 눈물을 훔치며 나지도 않은 사과를 찾으러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그렇게 약 하루. 유능한 부하는 기어코 사과 두 알을 손에 움켜쥐고 돌아왔다.
“아주 맛있어! 아주 행복해! 아주 기뻐!”
오랜만에 꿀을 만난 꿀벌처럼 주스를 쪽쪽 빨아먹는 이벨리아의 두 발이 달랑달랑 빠르게 흔들렸다.
‘다행이네. 돌아가서 한 번 더 시켜야겠다.’
마르바스가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생각을 태연히 떠올리며 아가레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역시 헤프게.
“그런데 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맨날 어떻게 엄청 빠르게 알아?”
입 주위에 사과주스를 묻히며 질문하자, 아가레스는 답해주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이벨리아의 입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사심 없이 말끔한 그 행동은 두 친구 사이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꼬맹이, 이제 책도 읽을 줄 알아?”
정령서를 슬쩍 훔쳐본 아가레스가 자못 놀랍다는 듯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참나. 나를 뭐로 보고!”
이벨리아가 가슴을 쭈욱 펴고 턱을 위로 치켜 올렸다. 뭐로 보긴. 그냥 작달만한 꼬맹이지. 저렇게 조그마한 머리로 글을 읽는다는 것이 그로서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흐음. 자, 여기부터 읽어봐.”
그가 책을 뒤적이다가 손으로 짚은 곳은 정령들의 이름이 적힌, 가장 앞부분이었다.
“이쯤이야! 얘는 내 칭구야! 물의 하급 전련 운디네!”
- 퐁!
[나 불러쪙?!]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물고기 친구는 이벨리아의 머리 바로 위에서 퐁! 하는 작은 물방울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그러나 호기로운 등장 직후 계약자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고위 악마를 발견하자 비실비실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안 불렀구나. 요즘 귀가 침침해서 잘못 들었나 보다. 나 다시 돌아가 볼게……. 아이코 귀가 아파서 조금 쉬어야겠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대한 마기를 목도하자 운디네는 진심으로 귀를 비롯한 온몸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강한 악마는 무서워, 아주 무서워……. 운디네는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신속하게 사라졌다.
“신기하다. 전련도 귀가 잘 안 들리는 때가 있대.”
황급히 돌아간 이유를 아는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내려다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속을 사람이 없어 정령에게까지 속는 작은 꼬맹이가 마냥 웃겼다.
“자, 계속 읽어봐. 꼬맹이.”
“이거느은…… 카사!”
이벨리아가 <카사>라고 쓰인 글씨를 손으로 짚으며 또박또박 읽자 앉아 있던 의자 근처로 훈풍이 불어왔다. 모닥불보다 조금 더 따뜻한 기운이었다.
[……계약…….]
이어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글자를 잘 읽는다는 것을 악마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집중한 이벨리아는 미처 듣지 못하고 다음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어나갔다.
“이거는, 실프!”
이번에는 시원한 바람이 이벨리아의 황금빛 머리칼을 살랑살랑 건드렸다. 추위 때문에 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 놓았기에 실내에서는 불 리가 없는 자연의 바람이었다.
[나야 나, 실…….]
상큼하게 등장한 실프는 자기소개를 끝마치지도 못했다. 이벨리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 아니네, 으음…… 노아!”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였으나, 이벨리아의 짧은 다리는 허공에서 달랑거리고 있었기에 진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바바! 다 잘 읽지? 나 이제 다섯 살이야. 다섯 살!”
이벨리아가 옆에 앉은 아가레스를 향해 눈을 반짝 들어 올렸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바다 빛의 눈동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해사했다. 아가레스는 저도 모르게 이벨리아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다가 이내 멈칫하고 손을 말아 쥐었다. 아이를 칭찬하듯이 저 찹쌀떡 같은 뺨을 한번 꼬집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한들, 어린아이라 한들. 허락 없이는 안 될 일이었다.
“아주 잘 읽네. 우리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어?”
대신에 슬쩍 맞장구를 쳐주었다. 기분이 좋은 것을 대변하듯 이벨리아의 보드라운 입매가 완만한 호선을 띄고 작은 발재간은 조금 더 동동거리며 튀었다.
“근데 꼬맹아. 저것들 좀 어떻게 해봐.”
그가 불려 나온 하급 정령들을 향해서 슬쩍 눈짓하자, 이벨리아는 그제야 오롯하게 친구를 향하던 시선을 돌렸다. 불새 카사, 요정처럼 생긴 실프, 고깔모자를 쓴 난쟁이 노아. 왜인지 작은 정령들은 모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흐엑? 이게 다 뭐야?”
“음? 네가 방금 불러낸 것들.”
“내가?”
내가? 언제? 나는 그냥 손으로 짚어가며 책을 읽은 것뿐인데? 나는 운디네랑만 계약했는데? 이벨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나 천잰가 바! 검술에 재능이 업떠니 여기에 있어떠! 왜째서지!”
응, 그거 아니야. 아이가 계약을 맺은 정령은 운디네 뿐이라는 대목에서, 그는 확신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요 작은 꼬맹이에게는 정령왕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령과의 계약 시에 소환문을 외지 않고서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정령왕들의 인장을 받은 존재뿐. 그마저도 중급 정령에 이르면 축복을 내린 그 정령왕과 같은 속성의 정령만 불러낼 수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상급 정령에 이르면 별도로 계약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하급 정령은 그 어떤 정령왕으로부터 인장을 받더라도 네 속성 모두 불러낼 수 있었다. 정령왕의 사랑을 받은 인간은 매우, 아주 매우, 그러니까 인간들의 시간 개념이 아니라 아가레스의 시간 개념에 따르더라도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정령서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는 한 세계를 지배하는 아가레스 정도의 자들이라야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인장이라.’
감히 어느 정령왕이. 아가레스의 고요한 황금색 눈에 일순 불쾌감이 스쳤다.
“꼬맹이. 이것도 읽어봐.”
그가 중급 정령의 이름이 쓰인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목소리는 애써 참은 불쾌감으로 인하여 더욱 진하고 낮은 울림을 내었다.
“우웅…… 운다인, 실라페, 살라맨더, 노임.”
친구의 요청에 고개를 갸웃대며 또박또박 읽었다. 막히는 글자는 도움을 받으면서. 이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과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였다.
“흐엑? 나는 진짜 천재야! 물과 바람의 천재 전련사야!”
응, 그거 아니야. 한 번 더 속으로 단호히 부정한 그는,
“엘라임. 페르세스.”
곧바로 짓씹듯이 읊조렸다. 마족과 정령은 상극이다. 그러나 아가레스 정도의 고위 악마와 정령왕 정도의 상위 정령은 굳이 대치하지 않았다. 서로가 마음에는 들지 않더라도 이 세계의 한 축을 이루는 종족임을 인정하고 있었기도 하고. 또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기에는 책임질 일족이 너무도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떠나, 아가레스는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정령왕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냥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한번 보고 싶군.”
그의 생에서 정령왕을 ‘만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물론, 만나서 네 친구가 내 친구이니 우리는 모두 친구! 라는 분위기를 만들 예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이 꼬마는 내 친구니까 이 불길하고 더러운 인장 지워, 쯤이 될까.
‘이거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도 없고.’
감히, 그가 어떻게. 사실 그는 황태자가 비밀기지에서 친구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을 언뜻 보았더랬다. 질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권속들 몰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100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꺼내어 보았었다. 책에는 ‘친구 관계는 상하 없이 평등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책을 덮었다. 순 엉터리였다. 친구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다고? 아니, 분명히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끝내 인정했다. 그는 이 관계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처음으로 가지는 친구 관계에서 갑은 철저히 꼬맹이였으며, 그는 완벽한 을이었다. 그러니 결국 그가 뱉을 수 있는 말은 부드러운 애원조일 수밖에.
“어디 가서 뭐 막 묻혀오고 그러지 마.”
특히 다른 존재의 인장 같은 거. 흔적 같은 거. 그런 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