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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이브, 너 영애를 바닥에 굴렸어? (33/323)

33화. 이브, 너 영애를 바닥에 굴렸어?2021.01.21.

카시스 후작저는 오전부터 분주했다.

16549725864255.jpg“공녀님의 탄신일 축하 겸 감히 초청 드린 것이니 평소보다 더욱 세심히 준비하도록 하라.”

16549725864255.jpg“예, 마님.”

얼마 뒤 열릴 공녀님의 다섯 살 탄신일에 공작저를 방문하여 기쁜 날을 함께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단호히 반려되었다. 공작가는 공녀의 첫 번째 생일 이후 늘 그러했듯 대외적인 생일파티를 열지 않았다. 가문 내부에서야 황태자의 탄신일 못지않은 성대한 파티가 열렸으나, 누군가를 초대하지는 않았다. 귀한 공녀를 이용하여 가문에 줄 대고자 하는 자들을 반기지 않기에 취한 조치였다. 그래서 후작부인은 감히 아르티나 공작가로 직접 초대장을 보냈다.

16549725864255.jpg「공녀님과 렐리안의 친분에 감히 기대어 귀한 걸음을 해주십사 앙망합니다.」

초대장의 마지막 문구에 이벨리아와 렐리안의 친분까지 들먹이니, 엘리시아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공작부인을 비롯해 공자들까지 함께 방문 의사를 밝혔다. 후작부인은 공자들이 친구인 이크리안을 보러 오려나보다 생각하고 기쁘게 음식을 늘리라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산이었다. 두 오라버니에게는 이 세상 모든 늑대들로부터 어린 여동생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설령 아르칸의 절친한 친구이며 지금은 이벨리아에게 일말의 연애 감정도 없는 이크리안이라 하더라도. 두발짐승이 언제 네발짐승으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16549725864271.jpg“도착했습니다. 아기씨.”

카론이 제 주인을 에스코트하여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돕자마자, 이벨리아는 두 팔을 뻗고 앞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16549725864276.jpg“렌리안!”

1654972586428.jpg“이브!”

아직 작디작은 두 아이가 꼬옥 포옹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생이별한 자매들이 극적으로 만나는 것인 줄로 오해할 법도 했다.

1654972586428.jpg“우리 이브는 못 본 새에 어른이 다 되었군요!”

아직 어린 여덟 살짜리는,

16549725864276.jpg“그럼! 이제 다 큰 지 오래 돼찌!!”

가슴을 쭈욱 펴고 다 컸다며 호언장담하는 다섯 살 아이를 한없이 어린 아가를 보듯이 바라본다.

16549725864291.jpg“다 크긴 무슨. 어젯밤에도 무섭다고 오라버니 방에 와서 잤으면서.”

세드릭이 빙긋 웃으며 코를 톡 건드리자, 이벨리아가 다급히 까치발을 들어 세드릭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젯밤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거대한 고무 오리가 자기의 배 속에도 고무 대신 솜을 채워달라면서 쫓아오는 것은 정말로 괴기스러웠다.

16549725864255.jpg“공녀님께서 오시니 우리 렐리안이 방 밖으로 좀 나오는군요.”

그 모습을 보던 후작부인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웃음 뒤에 감추지 못한 그늘이 있음을 엘리시아는 쉽게 알아차렸다.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머니의 직감이었다.

16549725879027.jpg“영애는 요즘 좀 괜찮은가요?”

16549725864255.jpg“공녀님과 친분을 맺은 후로는 조금 나아졌지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귀한 후작영애가 몸까지 약하니 후작저 모두가 렐리안을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하게 다루었음에도 렐리안은 자랄수록 시들시들했다. 후작부인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16549725879027.jpg‘네피르…….’

대귀족 가문의 가주 정도 되면 사생아가 있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아이가 렐리안과 같은 나이라는 점. 또 불행히도, 렐리안과는 달리 아버지의 관심을 기꺼이 등에 업을 수 있는 영악함과 배포를 가진 아이라는 점이었다. 렐리안이 몸이 약하고 얌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네피르는 때때로 카시스 후작을 졸라 후작저로 들어와서는 마치 저가 후작영애라도 된 것 마냥 휘젓고는 했다. 렐리안은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남인 또래 아이와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독했더라면, 아니 최소한 다른 귀족들만큼만 콧대가 높았더라면 지위로라도 찍어 눌렀을 텐데. 렐리안은 천성이 그렇질 못했다. 딱 후작부인을 닮아. 밖에서 조금 더 뛰어놀고, 때로 사고도 치고.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 표현하며 그렇게 여느 아이처럼 자랐으면 좋겠는데.

16549725864255.jpg‘공녀님을 조금만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후작부인은 하염없이 방에서 책만 들여다보는 렐리안이 늘 걱정이었다.

1654972586428.jpg“방에 가서 스콘 먹을까요?”

역시나. 방 안을 가장 좋아하는 집 꼬맹이답게, 렐리안이 방에 올라가 놀자고 제의했으나,

16549725864276.jpg“으으응- 렌리안, 정원에서 놀자!”

야생의 꼬맹이 이벨리아는 정원에서 놀자며 렐리안의 하얀 손을 잡아끌었다. 바람이 이렇게 살랑살랑 부는데 방이라니! 당연히 드레스 정도는 재생 불가하게 더럽혀줘야지! 나풀나풀 뛰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던 엘리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49725879027.jpg“……부인. 미리 사과드릴게요.”

16549725864255.jpg“예? 무슨……?”

16549725879027.jpg“영애가 깨끗한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위대한 어머니는 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오전에 한바탕 봄비가 내려 정원은 촉촉하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상큼한 풀 내음과 더불어 젖은 흙냄새가 잔잔하게 올라왔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정원은 그 땅을 완전히 평평하게는 다져놓지 않았기에 땅이 옴폭 파인 곳마다 깊지 않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16549725864276.jpg“운덩이!!”

그리고 이벨리아는 웅덩이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얕게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첨벙첨벙 발장난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할 때마다 옷이 잔뜩 더러워진다고 엘리시아에게 혼났지만, 이곳은 카시스 후작저! 설마 후작부인 앞에서 엉덩이를 때리시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외쳤다.

16549725864276.jpg“렌리안, 참방참방 하자!!”

1654972586428.jpg“참방참방……?”

렐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진한 보랏빛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제비꽃 색의 맑은 눈동자는 호기심을 담고 반짝였다.

16549725864276.jpg“옹! 이렇게!!”

이벨리아가 물웅덩이로 퐁당 뛰어들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이벨리아의 물빛 드레스는 흙탕물을 머금어 아랫단이 진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렐리안의 드레스 끝자락도 물로 함빡 젖었다. 참방참방 이벨리아가 발을 구를 때마다 흙탕물은 점점 더 튀어 올랐다. 이내 자그마한 얼굴에도 진흙이 묻어 뺨이 거뭇해졌다.

1654972586428.jpg“저도 해볼래요!!”

렐리안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걸렸다. 잘못 사귄 친구는 렐리안을 서서히 물들였다. 공식 사고뭉치에 의해 신흥 사고뭉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퐁당퐁당. 소심하게 발장구를 치는 렐리안을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16549725864276.jpg“아아니, 이러캐 해야지!”

- 첨벙! 렐리안의 드레스도 온통 흙탕물로 물들었다. 햇빛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창백한 피부에도 피부 건강에 좋다는 진흙이 여기저기 튀었다.

16549725864276.jpg“꺄아- 렌리안 얼굴에 잔뜩 묻었다!!”

얼굴에 진흙이 철퍽 튀어 올라 잠시간 당황하던 렐리안은 환하게 웃는 이벨리아를 보며 마주 웃었다. 햇빛도, 튀어 오르는 물방울도. 모두 공녀님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항상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따뜻하게 온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스산했던 세상이 새로이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다시 잘 부탁한다고. 렐리안은 환하게 웃었다. 이벨리아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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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25864276.jpg“우왕! 저거 열매는 모야?”

불과 30분 전과 같은 꼬맹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꾀죄죄해진 이벨리아가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주황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이, 가까이 가보니 달콤한 냄새가 아래까지 솔솔 퍼져왔다. 마침 배고팠는데. 두 사고뭉치들은 저들도 모르게 입맛을 챱챱 다셨다.

1654972586428.jpg“저거, ‘라즐리’ 나무에요. 아버지께서 동대륙에 방문하셨다가 아기 나무를 가져와 심으신 건데, 동대륙에서는 황제에게만 진상될 정도로 귀한 과일이래요.”

16549725864276.jpg“그으래?”

좀도둑의 눈이 식탐으로 번뜩였다. 황제 폐하에게만 진상되는 과일이라니! 그냥 지나치면 내 혀가 울지!

1654972586428.jpg“네, 아주 맛있어요! 아마 몇 개 따먹어도 아버지는 모르실 거예요.”

마침 집주인의 허락도 떨어졌다.

16549725864276.jpg“나무가 키가 크니까, 막대기를 찾아서 흔들자!”

1654972586428.jpg“저기요! 저기 긴 막대기!”

누가 렐리안을 방에서 책만 보는 요조숙녀라고 했던가. 후작부인은 대체 무엇을 걱정하였던 것인가. 이벨리아와 만난 렐리안의 얼굴에는 점점 웃음이 스몄고 입꼬리는 장난꾸러기처럼 쌜룩댔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폼은 마치 눈 만난 강아지 같았다.

16549725864276.jpg“조아! 나무에 이러캐 걸치고!”

나무 막대기를 주워온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막대기를 나무에 걸치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안 그래도 진흙이 묻어 찐득찐득한 옷에 나뭇잎들은 찰싹찰싹 잘도 달라붙었다.

16549725864276.jpg“흔들어!!”

두 아이가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요리조리 흔들자 가지가 낭창 휘어졌다. 그러다가 실수로 막대기가 빠지자, 낭창 휘어졌던 가지가 위로 탕- 튕겨 올라가면서 반동을 이기지 못한 열매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필이면 나무 바로 밑에 서 있던 이벨리아와 렐리안의 머리 위로.

16549725864276.jpg“끄앙!!”

1654972586428.jpg“꺄야!!”

잘 익은 라즐리는 두 아이의 머리에 부딪히면서 퐁퐁 터져 내렸다.

16549725864276.jpg“…….”

1654972586428.jpg“…….”

16549725864276.jpg“큰일나따……!”

라즐리도 잔뜩 떨어뜨리고 옷도 엄청 더러워졌다. 황제 폐하만 먹을 정도로 귀한 과일이랬는데. 대형 사고임을 직감한 아이들이 눈을 또로록 굴렸다.

16549725864276.jpg“……마침 라즌리 나무를 지나가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서 연매가 우수수 떨어진 걸로 하자.”

사고를 한두 번 쳐본 것이 아닌 이벨리아가 잔꾀를 내자,

1654972586428.jpg“네. 지금은 종종 거센 바람이 불기도 하는 시기니까요. 연약한 열매가 견디기는 조금 버겁죠.”

친구 따라 사고뭉치의 길로 한 발을 들여놓은 렐리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리아는 이 와중에도 바닥에 떨어진 열매 중 그나마 성한 것을 집어 입으로 쏙쏙 집어넣었다. 가끔 보이는 바다 빛 눈이 아니라면 다리 밑에서 주워온 땅 거지라고 해도 믿을 법한 몰골이었다.

16549725923533.jpg“아니! 렐리안!!”

아르칸, 세드릭과 함께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돌아오던 이크리안이 여동생을 보고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16549725864291.jpg“이브! 너 영애를 바닥에 굴렸어?!”

세드릭도 마찬가지였다.

16549725864276.jpg“아아니. 렌리안이랑 걸어가는 길에 물이 튀더니.”

1654972586428.jpg“응. 진흙도 튀고요.”

16549725864276.jpg“옹. 진흙도 튀더니 나무 밑으로 가니까”

1654972586428.jpg“열매가 똑”

16549725864276.jpg“옹. 강한 바람에 똑. 떨어졌지.”

……대체 무슨 말이야. 세 오라버니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꼬마 악마들 같은 여동생들의 몰골은 고작 물이 좀 튀고 열매가 좀 떨어진 것으로 표현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16549725923569.jpg“……미안하다. 아마 이브 탓일 거야.”

좀처럼 이크리안에게 먼저 사과하는 일 없는 아르칸이 그의 어깨를 치며 사과를 건네었다.

16549725923533.jpg“아니. 감사한걸.”

오히려 공녀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아마 그의 친우는 모르는 듯했다. *** 평화로운 티타임을 즐기다가 다급한 하녀들의 호출을 받고 1층으로 내려온 엘리시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6549725879027.jpg“이브, 너! 영애를 바닥에 굴렸니?!”

한달음에 달려온 엘리시아가 다급히 외쳤다. 얌전하기로 소문난 후작 영애가 이브를 먼저 이 꼴로 만들지는 않았을 터이니, 우리 딸이 먼저 짐승처럼 달려든 것임이 분명했다.

16549725864276.jpg“아냐! 왜 나망 가지고 그래!”

억울해! 억울해! 나도 엄연한 레이디인데!! 이벨리아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나 진짜 서러워. 진흙 좀 튀기고, 열매 좀 맞게 한 것 가지고.

16549725879027.jpg“못 살아, 정말!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후작부인. 이브가 워낙…….”

16549725864276.jpg“렌리안도 재미있다고 했단 말이야…….”

이거 엉덩이를 맞을 분위기다. 이벨리아는 제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리며 아르칸의 뒤로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었다.

1654972586428.jpg“공작부인, 공녀님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는 정원이 이렇게 아름다운 지도 미처 몰랐어요.”

오라버니의 뒤로 쏙 숨어드는 이벨리아를 보고서, 렐리안이 빙긋 웃으며 거들었다. 늘 창백하던 렐리안의 두 뺨은 홍조로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인형과도 같던 혈색이 지금은 잠시나마 아픈 곳 하나 없는 아이 같았다. 아마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논 탓일 터다.

16549725864255.jpg“아…….”

그 모습을 본 후작부인의 눈에 옅은 물기가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그토록 원했던, 여느 아이다운 딸의 모습이었다. 후작의 연인이었던 여인은 아이를 낳으면서 사망하였으니, 후작부인에게는 이제 제대로 된 원망의 대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피르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굳이 먼저 나서서 손을 더럽혀 후작과 껄끄러운 관계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렐리안이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편 이크리안은 샐샐거리며 웃는 여동생과,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를 먹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6549725923533.jpg‘보기 좋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여동생이었다. 그런 여동생이 공녀님을 따라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은 눈에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벨리아의 얼굴에 묻은 진흙을 털어주는 여동생을 본 이크리안의 제비꽃 색 눈이 곱게 휘었다.

16549725923533.jpg‘어떻게 해야 공녀님께서 자주 놀러오시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크리안의 영민한 머리는 공녀님과 여동생을 최대한 자주 만나도록 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방법을 떠올려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문턱 높은 공작저를 이쪽에서 찾아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공녀님께서 후작저로 오지 않으시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면 그만이었다.

16549725923533.jpg‘그게 좋겠네.’

이크리안의 입매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걸렸다. *** 이크리안은 굉장히 똑똑했다. 차기 대마도사가 될 재목이라며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탐을 낸다는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니 고작 다섯 살짜리 병아리가 제 발로 모이를 먹으러 걸어 들어오게 하는 일쯤이야 그에게는 진정 아무것도 아니었다. 며칠 뒤. 그는 아르티나 공작저로 선물을 하나 보냈다.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마탑 소속 마법사로 가입하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 얻은 이것은 이벨리아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완벽한 먹이였던 셈이다. 일견 흔한 동화책 중 하나로 보일 법도 했으나 책장을 펼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크리안이 그 영민한 머리로 직접 지어낸 흥미로운 이야기와 더불어, 마탑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소문난 마법사가 내용에 맞는 삽화를 그린 후 마법까지 걸어준 덕분에 반짝거리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동화책은 이벨리아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았다.

16549725864276.jpg“흐와아-! 역시 세당은 넓고 사람은 많아!”

16549725951771.jpg[능력자. 그럴 땐 능력자가 많다고 하는 거야.]

16549725864276.jpg“옹. 그거. 이것 좀 바바. 이거 막 움직여!!”

심지어 운디네마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동화책에 집중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가 이번에 선물로 보내온 동화책은 어린 병아리가 포근한 잠을 자기 위해서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다.

16549725864276.jpg“변아리가 잠 여행을 떠난대. 잠은 아주 중요하지.”

마법으로 반짝반짝 움직이는 병아리 그림을 보면서 정신없이 읽고 있는데. 「왜가리는 그렇게 어린 병아리를 물에 적셔 꼴깍하고 말았다. 아이고 불쌍해. 끝. 2권에서 계속.」

16549725864276.jpg“……이거 왜 끝이 왜 이게 이러지?”

당황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이게 무슨 재앙이야? 사실 동화책이 아니라 피폐물이었던 걸까? 잠 여행을 떠난 어린 병아리가 왜가리에게 잡아먹혔는데 2권에서 계속이라니? 주인공 병아리가 죽었는데? 뒤가 잘린 것이 아닌가 싶어 동화책을 탈탈 털어보았다. 책의 마지막 장에 끼워져 있던 쪽지가 툭 떨어졌다. 이벨리아는 황급히 쪽지를 펼쳤다.

16549725923533.jpg「어린 병아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다만, 다음 편 책은 후작저 바깥으로 나가면 불타버리는 마법이 걸려 있어, 부득이 공녀님께서 방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녀님께서 찾아주지 않으신다면 어린 병아리는 왜가리의 배 속에서 소화될지도. - E. K.」

이크리안은 치밀했다. 책을 빌려 가지도 못하도록 후작저 바깥으로 나가면 불타 없어지는 마법까지 걸어두었다. 그것도 손수. 불세출(不世出)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크리안은 예상했다. 앞으로 공녀님께서 카시스 후작저에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실 것을.

16549725864276.jpg“벼……변아리가 소화……. 오라버니! 소화되기 전에 빨리 가야 해!”

그리고 그 예상은 오차 없이 실현되었다. 그의 계획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여동생이 급히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아르칸은 동화책과 쪽지를 보더니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16549725923569.jpg“이 여우 같은 자식이…….”

쪽지가 아르칸의 손아귀에서 와작 구겨졌다. 복도에 진열된 검 하나를 꺼내 들며, 아르칸이 이벨리아를 불렀다.

16549725923569.jpg“가자. 이브. 지금 당장.”

16549725864276.jpg“변아리 구하러 가는데 칼은 왜 챈겨?”

16549725923569.jpg“우리 병아리 구하려면 여우를 먼저 잡아야 할 것 같아서. 가자.”

우리 오라버니 표정 참 비장하다. 병아리를 구하는 데에 참으로 진심인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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