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선물! 꽃잎 선물!2021.01.11.
이벨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먼저 집사 하델에게 뽀르르 달려가 스스로 던졌다가 잡은 꽃잎을 쥐여주었다.
“하데에- 이거, 추뽁바든 꼰잎! 내가 던져따가 잡아써.”
하델이 언제나 그랬듯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감사합니다, 아기씨’라는 깔끔한 한 마디를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예상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걸, 왜 제게?”
축복제 날 제국민들은 꽃잎 미신에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그렇기에 이게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아기씨께서 이 귀한 것을 한낱 집사인 자신에게 주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데이니까.”
하델이니까 주는 건데? 하델의 어리둥절한 반응이 오히려 더더욱 어리둥절한 이벨리아는 당연한 것을 주었는데 당연하지 못하게 반응하는 하델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
한참, 하델은 아기씨가 쥐여준 꽃잎을 바라보았다. 하델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수도의 모든 귀족 가문을 깡그리 뒤진다고 해도 아르티나 공작가만큼 사용인들을 높게 대우해주는 곳은 없을 터였다. 주인님 내외로부터 후한 월급과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오기는 하였으나, ‘선물’이라니. 그것도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선물. 문득 그 망나니 같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왜 아기씨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진심으로 보아주시는데. 무릎 꿇고 충성을 바치지 않고 어떻게 배길 수가 있을까.
“꼰잎, 시러해?”
숨을 몇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고개를 몇 번 갸웃대는 시간 동안 집사 하델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벨리아가 소심하게 물었다.
“그…… 크흠. 그럴 리가요.”
살짝 목이 멘 하델이 목을 가다듬으며 여상히 대답했다. 만면에 번지는 고요한 미소는 평소와 같았으나 감정을 미처 다 갈무리하지 못한 목소리와 눈꼬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기씨. 평생 잘 보관하겠습니다.”
“옹. 나도, 고마어.”
고맙다는 말 또한, 참 잘도 하신다. 이벨리아가 하델을 향해 마주 웃은 후, 다른 사용인들도 모두 응접실로 불러와달라고 부탁했다. 아기씨가 부르신다는 말에 헐레벌떡 모인 사용인들은 이내 축복을 받으라며 뿌려주는 꽃잎을 하나씩 잡아채며 하델과 마치 겹쳐놓은 것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모두가 얼떨떨해하면서도 기뻐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내 응접실에서 나와 뿌듯한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아르티나 기사단이 수련하고 있는 연무장이었다.
“아기씨 오신다! 대련 중지!”
이벨리아의 사부작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단장 에딘이 크게 외쳤다. 그들만의 규칙이었다. 혹여 아기씨께서 눈먼 검에라도 상처 입으시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이니. 이제는 아기씨가 어설프게나마 검술을 배우신다고 하더라도 규칙은 깨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창칼을 내려놓고 정확히 30초 뒤.
“기사다안-!”
이벨리아가 꽃바구니를 들고 기사단을 부르며 포르르 뛰어왔다. 그러나 어서 꽃잎을 나누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지나치게 성급했다.
“으앗……!”
바닥에 놓인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발이 걸리자, 몸이 급하게 앞으로 쏠렸다.
“조심.”
수련하고 있던 아르칸이 짧게 혀를 차며 허리를 숙이고 오른팔로 이벨리아의 배 밑을 받치고,
“이럴 줄 알았지.”
세드릭이 씨익 웃으며 앞으로 기울어지는 이벨리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놀랍게도,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정확히 동시였다. 그 자리에서 넘어질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잡다한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여동생의 뒤를 무려 4년이나 쫓았던 두 오라버니다. 이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질 것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흐아, 깜딱이야…… 아주 깜딱했다!”
하마터면 꽃잎과 함께 거하게 연무장 바닥을 구를 뻔했다.
“우리 아기씨 배는 볼록해서 구르시면 데굴데굴 잘도 구르실 것 같아.”
그 모습을 보며 기사들 쪽에 서서 나지막이 속삭인 자는 알렉. 아니 오늘은 다시 알레기.
“…….”
“…….”
지난 검술 훈련 때의 일이 되풀이될까, 기사단은 이벨리아의 눈치를 스리슬쩍 살폈다. 공자님들 손에 꽃잎을 쥐여주며 해사하게 웃고 계시는 것을 보아하니 다행히 이번에는 못 들으신 듯하다. 충성스러운 대형견들은 곧바로 응징에 나섰다. 알레기 너는 오늘도 뼈와 살을 연무장에 묻자.
“맞는 말이네.”
대답하는 헤롤드의 눈에 기괴한 안광이 서렸다.
“그치?”
여전히 눈치라고는 밥에 후드리챱챱 말아먹은 알렉이 역시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헤롤드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아주 음침한 목소리로.
“그래, 맞는 말이야.”
네놈 새끼 처맞는다는 말! 헤롤드는 마치 곰의 앞발과도 같은 커다란 손을 뻗어 알렉의 조동아리에 가져다 대었다.
“요놈의 입! 입!”
찰싹! 찰싹!
“요 입!!”
곰의 앞발과 조동아리가 만나 찰떡을 내려치듯 경쾌한 챱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한 번만 더 입 막 놀리면 고 요망한 조동아리 확 조사서 고이 접어 하늘에 날려버린다, 앙?”
어딜 감히 우리 아기씨가 구르시면 잘 굴러가시겠다고. 이 자식이. 어떻게 더 손을 봐줄까 씩씩대던 헤롤드를 향해, 엄격한 소리가 날아들었다.
“헤론드!!”
“예, 아기씨.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 자식 교육 좀…….”
“쓰읍- 그만! 칭구를 개롭히면 대요, 안 대요?”
“예?!”
……억울해! 아기씨를 대신해서 화내고 있는 건데! 심지어 아기씨 말투가 굉장히 자존심 상해!
“칭구한테! 응? 입을 막 때리고! 그리고 조도…… 조도마리?”
조동아리가 뭔지는 잘 모르나 헤롤드의 어조에서 나쁜 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조도마리가 아니라 조동……, 아니, 이런 말은 알려드리면 안 되지.”
영악한 알렉은 이벨리아의 옆에 서서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입 좀 보세요, 아기씨. 저 곰 같은 앞발로 제 입을 후려치니, 이가 여러 개 흔들리는 것 같아요. 흐흑.”
마지막에 따라붙은 물기 없는 울음소리는 또 뭐야. 어이를 상실한 헤롤드가 알렉을 휙 쳐다보자, 알렉은 마치 헤롤드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뒤로 주춤거렸다.
“아아, 저 곰 같은 무식한 눈빛, 무서워.”
무섭기는 개뿔. 전장에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상대를 도륙하는 것으로는 주군과 쌍벽을 이루는 기사가 바로 알렉이다. 베어도 무표정, 베여도 무표정, 마족의 손톱이 몸에 거하게 틀어박혀도 무표정. 인간다운 표정 변화가 전혀 없어, 함께 싸우는 아르티나 기사단은 저 자식 영혼이 이승에 있나 저승에 있나 혼잡한 전쟁의 도중에도 흘끗흘끗 확인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런 알렉이. 대체 저 역겨운 표정은 뭐냔 말인가. 진짜 연기라도 잘하면 또 몰라. 눈에는 졸음이 그득한 채로 ‘아이고…… 무서워…….’해봐야 그걸 누가 믿겠나.
“너어! 헤론드! 얼마나 개롭혔으면!”
잠깐 잊었다. 그들의 아기씨는 아직 네 살. 알려주는 대로 믿는 순진한 나이. 이벨리아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헤롤드에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벨리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승자의 미소를 지은 알렉은 느른하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뻐끔거리는 입 모양으로 명확한 의사를 전달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자식아.’
*** 이벨리아로부터 꽃잎을 받은 바로 그 날. 아르티나 기사단은 그 위용도 당당한 커다란 풍채에, 허리에는 거대한 검을 차고 손에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연분홍색 꽃잎을 소중하게 쥔 채로 공작저 밖으로 나갔다. 수도 최고의 세공사를 찾은 그들은 각자의 꽃잎이 뒤섞이지 않도록 세공사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가장 비싸다는 ‘라플레’ 방식의 세공을 맡겼다. 꽃잎이 찢어지지 않도록 매우 귀한 광물인 ‘하르콘’을 녹인 물을 세심하게 입혀 굳히는 세공 방법이었다. 휴고로부터 평생 써도 다 못 쓸 지대한 월급을 받는 아르티나 기사단이지만 ‘라플레’ 세공을 맡기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기씨가 주신 꽃잎을 전장에서 목 떨어지는 그날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그깟 집 한 채 살 수 있다는 금전쯤이 대수겠는가. 며칠 뒤. 아르티나 기사단 전원의 검 손잡이에는 라플레 세공이 되어 어린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자그마한 꽃잎이 달려 있었다. 곧이어 수도 전역에는 거한 소문이 퍼졌다. 그 대단한 아르티나 기사단이 전설의 용을 잡고 그 비늘을 뽑아 검에 달고 다닌다고. 가문의 문양인 황금색 용과 더불어, 기사단의 새로운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휴고와 엘리시아는 저녁 외부 일정들을 모두 취소하고 늘 그렇듯이 6시 정각에 공작저로 돌아왔다.
“압빠아아- 엄마아아-.”
실내용 원피스를 편하게 갖추어 입은 이벨리아가 도도도 달려가 휴고의 다리에 폴짝 매달렸다.
‘우리 아가, 많이도 자랐구나.’
달려와 매달리는 딸을 한 팔로 번쩍 안아 들며 휴고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너는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도 괜찮을 텐데.
“압빠아, 엄마아, 이거요. 꼰잎.”
팔에 번쩍 들린 상태에서 이벨리아가 휴고의 다른 쪽 손바닥과 엘리시아의 손 위에 꽃잎을 살포시 올려두었다.
“이게 바로 그……!”
이게 바로 지금 수도에서 그렇게 소문이 자자하다는 꽃바구니 강탈자의 꽃잎이구나. 휴고와 엘리시아가 눈빛을 교환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고맙다, 아가. 평생 간직하마.”
휴고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이벨리아의 작은 코를 톡 건드렸다. 엘리시아는 항상 촉촉하게 젖은 눈에 한층 더 짙은 물기를 머금고서 이벨리아의 이마에 살짝 뽀뽀를 건네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마주하게 된 휴고의 ‘평생 간직하마’의 스케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것이었다. 공작저 2층 회랑. 이 세상 비견할 데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보석 ‘모리안’ 속에 꽃잎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아무리 두터워도 그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을 보여줄 정도로 투명한 모리안은 빛을 반사하여 내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빛을 내뿜는 보석이었다. 마치 태양처럼. 휴고는 몸소 보석 경매에 참여하여, 한 나라의 국보로 간직되어야 마땅할 가치의 모리안을 낙찰받았다. 오로지 딸이 준 축복받은 꽃잎을 박아 두겠다는 의도로. 그것도 가장 높은 낙찰가를 부른 자의 무려 두 배를 불러서. 쩨쩨하게 몇만 리브르씩 올려서 호가(呼價)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외모, 기세, 그리고 제국의 몇 년 치 운영 예산은 될 법한 돈을 단 한마디 말로 지불하는 사내. 귀족들은 마치 거대한 맹수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이질감을 느꼈다.
“각하, 이 거대한 모리안을 어디에 쓰시려는지 감히 여쭈어도……?”
거기다가 발발 떨며 낙찰 확인증을 건네는 경매장 지배인에게 툭 던진 대답.
“딸이 준 선물 보관함.”
고저 없는 목소리는 마치 지나가는 길에 가판대에서 액세서리 하나를 산 건가 싶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상 누가 ‘선물’도 아니고 선물 ‘보관함’에 그런 거액을 지불한다는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나 휴고에게 있어서 딸이 준 선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지불하는 돈은 얼마가 들든 푼돈이었다. 딸이 준 선물이다. 가장 좋은 곳에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돌아온 휴고는 그날 밤. 어둑한 침실에서 엘리시아의 목덜미를 수려한 입술로 지분거리며 경매장에서의 일을 자랑했다가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고 말았다.
“당신이 돈을 이렇게 막 쓰면 우리 아가가 대체 뭘 보고 경제 관념을 배우겠어요?”
“아가는 그런 걸 배울 필요가 없소. 발에 채는 것이 돈인데.”
“아하. 그런 사고방식이시겠다? 그러니 우리 아가가 축복제 날 거리에서 금화를 와르르 쏟아내죠!”
등짝으로 한 번 더 매운 손이 날아왔다. 귀부인들로부터 듬직한 부군을 두어 참으로 부럽다는 질투 섞인 찬사를 받는 엘리시아. 그녀는 실상 공작저의 사육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을 지긋지긋하게도 안 들어먹는 강아지들을 사육하는 사육사. 혹은 조련사. *** 며칠 뒤, 비밀기지.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가랑비가 내렸다. 토독토독 내리는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비밀기지를 찾은 것은 친구들 때문이었다. 공작저 사람들 이외에도 선물을 주어야 할 친구들이 있지 않던가. 이벨리아는 ‘식량 도둑 소년’과 ‘피 도둑 악마’를 친구라고 정의 내렸다. 첫 만남들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검술도 가르쳐주고 축복제의 명소들도 가르쳐주었으니까. 아마 이게 바로 친구인가 보다, 생각한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친구들은 자신이 있는 때를 기가 막히게 알고 찾아오고는 했으니, 왜인지 오늘도 그럴 것만 같았다.
“…….”
오랜만에 내리는 가랑비가 시원하여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오두막에 들어가는 대신에 커다란 나무 밑동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풍성한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떨어져 있는 나뭇잎 중에 가장 거대한 것을 머리에 척하니 올려두고. 그렇게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흐아암…….”
이상하네, 올 것 같았는데. 분명 날카로운 직감이 올 거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여전히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너른 들판을 가득 메워 슬쩍 지루해진 이벨리아가 이제 그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올까, 고민하던 찰나. 사박 사박. 젖은 풀잎을 밟는 물기 어린 소리가 빗소리에 스며들었다. 이내 반갑게 뒤를 돌아보는 이벨리아의 위로 아이의 몸보다는 훨씬 커다란 옷 하나가 내려앉았다.
“감기 걸린다.”
조금 추웠었나. 느껴지는 따스함이 달가웠다. 고개를 위로 꺾어 올려다보니 살짝 빗방울을 머금어 평소보다 더욱 밝게 빛을 뿌리는 은발이 눈을 사로잡았다. 고개를 드는 바람에 머리 위에 올려두었던 커다란 나뭇잎이 스르르 떨어졌다. 소년은 곧바로 두 손바닥을 펴 이벨리아의 머리 위를 가렸다. 정작 자신의 머리 위로 빗물이 쏟아지는 것은 아랑곳 않고.
“왜 밖에 나와 있어. 춥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