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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나…… 나 앙 자……! (29/323)

29화. 나…… 나 앙 자……!2021.01.07.

페르세스의 도움으로 꽃비가 내리는 절경을 만들어낸 이벨리아 덕분에 제국민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약 30분간 거리 위로 내려앉은 꽃비는 마치 연분홍색의 눈 같기도, 눈에 보이는 축복이자 성호 같기도 했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30분을 선사한 이벨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당당히 새 꽃바구니 하나를 요청했다. 제 눈에도 제국민들의 만족스러움이 또렷하게 보이자 새 꽃바구니를 요구하는 손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16549724849897.jpg“아저찌이, 바구니 주데요.”

아직 ‘사제’라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벨리아가 ‘아저씨'라는 다소 불경스러운 호칭으로 사제를 불렀으나, 지금 그는 사소한 호칭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16549724849902.jpg‘오, 신이시여.’

신실한 사제가 보기에는 이 소녀에게 신의 시선과 축복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실상 신은 무슨. 전적으로 페르세스의 힘이었기에 그녀가 알았더라면 ‘인간들 생각 반경이 다 그렇지 뭐’라며 코웃음 칠 법했다. 여태 수없이 많은 축복제 행진을 주관했음에도 이런 광경은 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놀란 표정을 미처 다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로 커다란 꽃바구니를 건네었다.

16549724849897.jpg“헤헤- 잔뜩 이따!”

이 정도면 선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원 없이 선물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만족스러워! 이벨리아는 보드라운 꽃잎이 잔뜩 든 꽃바구니를 꼬옥 안고 활짝 웃으며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멈칫했다. 생각보다 마차가 높았다. 그러자 여태 다른 아이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던 젊은 성기사가 이벨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탁. 그러나 뻗은 손끝이 미처 닿기도 전. 단단한 손등이 손을 쳐냈다.

1654972484991.jpg“제가.”

뒤에 따라붙어야 할 말들이 생략된 짧은 한마디였지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손등을 쳐내며 제지한 것이 충분히 기분 나쁠 법도 하였으나 성기사는 일언반구 없이 얌전히 물러났다. 무려 아르티나 기사단 소속의 기사이다. 그것을 떠나서라도 마치 짐승을 눈앞에 둔 것과 같은 흉흉한 기세는 가능한 한 그를 적대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아르티나 기사단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16549724849902.jpg‘괴물들만 모아 두었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나보군.’

16549724849897.jpg“카롱! 나 잘해써?”

카론의 손에 달랑 들어 올려지면서 이벨리아가 만면에 뿌듯함을 장착하고 물었다.

1654972484991.jpg“제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행진이었습니다.”

카론의 청색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건네는 목소리는 어떻게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달았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성기사는 생각했다. 아르티나 기사단에게는 그들의 주인을 향한 충성심을 넘어선 맹목적인 존경과 애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16549724849927.jpg“우리 아가, 즐거웠어?”

곧바로 다가온 세드릭이 무릎을 낮추어 이벨리아와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49724849897.jpg“옹! 다들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떠! 내가 꼰잎을 아주 잘 던진 건가 혹쉬?”

천천히 행진하는 마차 위. 떨어지지 않도록 둘러쳐 둔 화려한 칸막이 밖으로 한껏 몸을 빼고 천진하게 웃으며 꽃잎을 흩뿌리는 여동생은 오라버니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경탄스러웠다. 요정, 정령, 신의 아이. 그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가 붙이더라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 분명할 정도로.

16549724849927.jpg‘아무래도 검술 훈련에 더더욱 매진해야겠군.’

그 언젠가 아르칸이 떠올렸던 결심 그대로 세드릭도 다짐했다.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

16549724849927.jpg“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마차에서 내려 기어코 에끌레어 하나를 더 사 먹고 나자, 시계는 어언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허락받은 시간은 11시까지. 그 이전에 공작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지금쯤 출발하는 것이 적당했다. 하지만 벌써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이벨리아가 부정의 소리를 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49724849897.jpg“으으응-.”

오라버니는 낭만을 몰라! 길거리에 아직도 이렇게 사람도, 불빛도, 맛있는 것도 많은데……. 그러나 그 단호함과는 달리 눈에는 졸음이 소복소복 내려앉아 맑은 바다색 눈동자는 반도 채 보이지 않았다.

1654972484991.jpg“그럼,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는 유능한 기사, 카론은 단 하루 만에 육아의 기술 또한 완벽하게 익혔다. 어린 주인의 눈을 보아하니 제 등에 업히는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 뻔했다. 불필요한 실랑이를 하기보다는 그냥 재워서 옮겨드리면 될 일. 끄덕끄덕. 안 그래도 잠이 오는데 승차감 좋은 카론의 등에 업혀서 남은 축복제를 구경하는 것도 꽤 평온할 터였다. 냉큼 업히려던 이벨리아가 순간 멈칫하고 물었다.

16549724849897.jpg“그런데 카롱이 힘들 수도 있는데. 나 이제 어른이 다 대어서 몸이 이러캐 커졌거든.”

1654972484991.jpg‘글쎄. 여전히 밥그릇만 하신데.’

하지만 카론은 그 생각을 그대로 뱉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1654972484991.jpg“아기씨께서 벌써 어른이 다 되어가시지만, 저는 기사라 힘이 아주 강하니까 괜찮습니다.”

홀랑 넘어간 이벨리아는 꽃바구니를 세드릭에게 맡기고 카론의 등에 업혔다. 업어서 재우려는 카론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한 세드릭은 함정에 쉽게도 빠지는 여동생이 우스워 애써 웃음을 참았다. 암살자 시절 배운 빼어난 기술들을 육아에 아낌없이 쏟아붓는 카론은, 이번에도 그 시절 배운 숨죽인 발소리로 가만가만 걸었다. 그러니 잠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들이 한데 뭉쳐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이내 연신 반짝이던 눈이 소르르 감기고 작은 팔이 추욱 늘어졌다.

16549724849897.jpg“아니야, 나 앙 자…….”

누구도 자는지 물은 적 없으나 제 발이 저려 뜬금없이 몇 번이고 안 잔다는 것을 강조한다.

16549724849897.jpg“아…… 앙 자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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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보가량 걸을 때마다 꼭 한 번씩 안 잤다며 잠꼬대하는 여동생 때문에 세드릭은 공작저로 가는 내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어야만 했다. 까딱하였다가는 폭소가 여동생을 깨울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 해는 떨어진 지 오래. 밤 11시 경이면 보통 공작저에도 희미한 등불만이 걸리는 때였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외출한 오늘만큼은 그 어떤 사용인들도, 기사들도, 그리고 공작가의 주인들도 저택을 환히 비추는 불을 끄지 않았다. 힘든 육아를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올 세드릭과 카론, 그리고 그들의 귀한 아기씨를 위하여. - 끼이익.

16549724849927.jpg“아버지, 어머니, 형님. 다녀왔습니다!”

세드릭과 카론이 들어오자마자, 카론에게 업혀 있는 이벨리아를 본 휴고는 곧바로 딸을 안아 들었다. 마치 카론으로부터 빼앗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호위 기사인데다가 이벨리아가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감히 놈팡이가 딸을 업고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로 휴고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카론이었다. 그렇기에 주군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일 대련의 원픽은 자신이 될 것이라는 미래를. 그때, 휴고의 품에 안긴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옹알거렸다.

16549724849897.jpg“나…… 나 앙 자…….”

어휴, 아직도 안 끝났어?

16549724849927.jpg“돌아오는 길 내내 저러더라고요.”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엘리시아가 나직하게 웃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그녀의 딸은 어지간히도 돌아오기 싫었나 보다. 꿈나라를 헤매면서도 안 잔다고 우기는 딸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1654972490931.jpg“이브가 축복받은 아이로 마차에 올랐다면서?”

황궁에 방문하는 바람에 이벨리아의 첫 축복제 구경을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은 오늘 있었던 모든 사소한 일들이 궁금했다.

16549724849927.jpg“말도 마세요. 아마 내일이면 수도에 소문이 쫙 퍼질걸요, 이브가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휴고가 비비안에게 이브를 넘기고서 세드릭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자며 손짓했다. 공작 부부와 두 아들의 대화는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탄식을 안으며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 쾌청한 날씨였다. 봄과 여름의 중간. 적당히 따뜻해진 공기에서는 꽃내음이 물씬 풍겼다. 다소 뜨거울 수도 있는 햇살은 하얀색 커튼에 가로막혀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었다.

16549724849897.jpg“우으, 나…… 나 앙 자떠!!”

비비안의 손에 의해 편안한 병아리색 잠옷으로 갈아 입혀진 이벨리아는 꿈속에서마저도 화려한 축제를 거닐었더랬다. ‘아직 잠들지 않았으니 집으로 데려가지 마아!’라고 호위 기사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미 자신의 방. 익숙한 천장. 그것도 새가 지저귀는 아침. 햇빛은 찬란.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이벨리아는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16549724849897.jpg“아침? 추뽁제는……?”

축복제가 꿈인지 축복제를 다녀와서 잠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벨리아는 시선이 닿는 곳에 꽃바구니가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16549724849897.jpg“씨잉, 나 안 잠드렀는데…….”

무슨. 길고 긴 밤 내내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꿀잠을 잤다. 이벨리아는 화려한 외출의 끝이 기절과 다름없는 수마였다는 것에 괜히 심통이 나 침대를 팡팡 다리로 내려쳤다. 그러다가 기척을 느끼고 들어온 비비안의 품에 안겨 목욕도, 양치도, 세수도 끝마치고서 꽃바구니를 들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든 꽃바구니에는 사제들의 축복도 함께 걸려 있었기에, 꽃잎은 제법 오랜 기간 시들지 않았다. 높은 직급의 사제가 축복을 내리면 평생토록 시들지 않기도 한다는 풍문도 있었다. 어쨌든, 축복받은 아이로 선택되어 비록 그 자리에서 꽃잎을 잡지는 못했으나 자신이 바로 축복받은 아이가 아니겠는가. 내가 던지고 내가 잡으면 축복받은 아이가 던진 꽃잎을 내가 잡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다른 축복받은 아이가 던진 꽃잎을 내가 잡는 것과 다를 게 없지! 그렇게 해서 아버지랑, 어머니랑, 오라버니들이랑, 기사단이랑, 집사랑, 하녀들이랑, 하인들이랑, 요리사들이랑, 정원사랑. 그리고 나중에 렐리안하고 이크리안 오라버니한테도 줘야지. 또오, 아가 토끼랑 식량 도둑한테도. 어제 행진 자리에 가서야 알았지만, 축복받은 꽃잎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꽃잎을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잡아서 모두에게 나누어주면 다들 아주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16549724849897.jpg“헤헤- 조오아떠.”

모두가 기뻐할 생각만 해도 이미 기분이 붕붕 비행했다.

16549724849897.jpg“웅디네에-.”

혼자서 던지고 잡고 100번을 반복하기는 심심하니까, 간간이 말동무가 되어줄 물고기 친구를 불렀다. 불려 나온 운디네는 이제 초연한 표정이었다.

1654972490934.jpg[그래, 뭐든 해. 제발 집기만 때려 부수지 말고…….]

16549724849897.jpg“아! 웅디네도 하나 줘야지!”

1654972490934.jpg[그래, 뭐든 줘. 그게 너 때문에 줄어드는 내 수명이면 더욱 좋고…….]

운디네는 또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정령도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을 느낀다. 병아리 계약자의 눈 밑을 보아하니 바람의 왕께서도 인장을 남겨두신 모양인데, 왕들께서는 대체 이 병아리 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나. 운디네의 걱정도 모르고 이벨리아는 소복이 쌓여 있는 꽃잎을 보며 다짐했다. 으쌰, 점심 먹기 전에 끝낸다!

16549724849897.jpg“하나아-.”

가녀린 꽃잎 하나가 이벨리아의 자그마한 손을 떠나 허공을 팔랑팔랑 날았다.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려서 다시 잡는 것도 영 쉽지 않았다.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시 주워서 손으로 슥슥 문질러 깨끗하게 만든 다음에 던지고 잡아채기를 반복했다.

16549724849897.jpg“두우울-.”

두 개 던졌다가 잡는 데에 10분 이상이 소요된 것을 보아하니 100개를 다 잡아채려면 오늘 하루가 다 지나도 부족할 것 같았다.

16549724849897.jpg“세에엣-.”

세 개째는 유난히도 잡히지 않아 폴짝폴짝 뛰어다녀야만 했다.

1654972490934.jpg[…….]

운디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1654972490934.jpg[근데, 병아리야.]

16549724849897.jpg“삼시입-.”

1654972490934.jpg[삼십 아니고 이십. 십 건너뛰었어.]

16549724849897.jpg“나 수쨔 잘 세. 이시입-.”

1654972490934.jpg[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병아리야.]

이벨리아가 왜 부르냐는 듯이 운디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1654972490934.jpg[대체 그거 왜 던졌다가 잡아?]

16549724849897.jpg“웅디네는 모르는구나. 내가 추뽁 바다서, 이거 던져따가 쟈브면 꼰잎에 축복이 들어온대. 선물하 꺼야.”

1654972490934.jpg[아니, 그러니까. 네가 축복제에서 축복받은 아이니까, 그걸 그냥 사람들한테 던져주면 되잖아.]

16549724849897.jpg“……?”

1654972490934.jpg[네가 축복받은 아이라며. 네가 던지고 네가 잡을 것 없이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들한테 던져주고 잡으라고 하면 되지! 그러면 힘들지도 않고!]

16549724849897.jpg“……!”

세상에. 그런 방법이! 전혀 생각도 못했다. 맑은 바다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1654972490934.jpg[어휴, 병아리 닮았다, 닮았다, 하니까 이젠 지능도 닭을 닮네.]

16549724849897.jpg“닥은 똑똑해?”

닭이 맛있다는 것은 배웠지만 똑똑한지 멍청한지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비꼬는 줄도 모르고 세상 순진하게 갸웃거리고 있다. 딱 너 같아. 그냥. 운디네는 눈물 나는 대답을 삼키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마침 곁을 지나가는 바람의 정령, 실프에게 소리 높여 변명도 덧붙였다.

1654972490934.jpg[우리 애가 아직 뭘 덜 배워서 그래. 아직 네 살이거든!]

크면 나아질 거야. 분명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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