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축복 받은 아이, 꽃잎을 잡은 악마2021.01.04.
역시 행진의 묘미는 꽃잎을 뿌리는 축복 받은 아이였다. ‘축복 받은 아이’는 귀족이고 평민이고를 가리지 않았으며 행진 이전부터 미리 정해두는 것도 아니었다. 행진하는 마차가 수도의 거리를 지나가면, 중앙 마차의 사제들은 구경하는 아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아이를 마차로 불러올린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행진이 이루어지고 나면 또 새로운 아이를 불러올리는 것을 계속하면서 수도를 한 바퀴 도는 형식이었다.
“와아아-!! 여기! 여기도 좀 봐주세요!”
“여기까진 꽃잎이 날아오질 않아요! 조금만 더 멀리 뿌려주세요!”
축복받은 아이가 뿌리는 꽃잎을 잡아 행운이 가득한 한 해를 만들려는 군중들은 마차 근처로 밀물과도 같이 몰려들었다. 은색 갑주를 갖추어 입은 성기사들은 근엄하게 마차를 호위했다. 느끼는 흥분감은 이벨리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쩌기 바! 온다! 온다!”
지나치게 신이 나 발을 동동거리다가 혹여라도 분수대에서 떨어질까, 카론은 마차 따위가 아닌 그의 어린 주인에게 온 신경과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처음 만난 병아리처럼 팔짝거리는 여동생이 마냥 예뻐 세드릭도 부드러이 미소를 지었다. 노란 후드를 폭 눌러 써서 앞이 제대로 보일는지도 의심스러운 자그마한 아이가 마차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는 소리는 주변 군중들에게도 녹아들었다. 다가오는 마차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있던 제국민들은 잠시 마차에서 눈을 떼고 슬쩍 이벨리아를 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잠시 정지-!”
마침 축복받은 아이를 바꾸어야 하는 시점이었는지, 지척까지 온 마차가 잠깐 멈추었다.
“흐잉.”
이벨리아는 탄식했다. 조금 더 오면 꽃잎을 잡을 수 있었는데! 얼른 새로운 아이를 태우고 축복을 내린 다음 꽃잎을 던져라! 이전의 아이가 마차에서 내리면서 사제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그 시간이 마치 한나절과도 같이 길게 느껴진 이벨리아는 두 손을 꼬옥 모으고 몸을 요리조리 흔들었다.
‘어서! 어서요!’
발을 구르며 몸을 흔들흔들 흔드는 바람에 몇 시간 전 페르세스가 살짝 묶어준 붉은색 리본은 슬슬 풀려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쾌청하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붉은 리본이 뒤쪽으로 날려 수많은 인파 어딘가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이벨리아가 사라진 리본을 따라 급히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안 그래도 헐거웠던 노란 로브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오라버니이, 니본……!”
다시 앞을 돌아 분수대 밑에 서 있는 세드릭에게 말을 건네었으나, 빨리 꽃잎을 뿌려달라며 가지런히 모은 양손은 아직 그대로인 채였다. 마침 다른 아이를 물색하던 사제들의 눈에 어두운 밤하늘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휘날리는 태양 같은 머리칼이 띄었다. 거기다가 두 손은 마치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이 가지런히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어떻게 불러내지 않을 수가 있으랴!
“저기! 꼭 마차에 타고 싶은지 기도까지 올리고 있는 꼬마 아가씨!”
꽃의 사제랬던가, 빛의 사제랬던가. 어느 신전의 사제라고 했던 인상 좋은 이가 이벨리아를 호명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사제의 손가락을 따라 뒤로 모였다. 손가락도 시선도 저를 향하고 있었다.
“아……?”
이벨리아는 맞잡은 자신의 두 손을 느리게 내려다보았다.
‘아니, 이거 기도 아닌데!’
나 여기서 꽃잎 100개 잡아야 하는데!
“와아아!!”
아이의 당혹스러움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주변의 군중들은 모두 크게 환호했다. 한눈에 보아도 환하게 빛이 나는 아이가 뿌려주는 꽃잎은 분명 올 한 해를 행운으로 가득 채워줄 것만 같았다. 세드릭은 이벨리아가 마차에 오른다는 것에 잠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하지 못할 경험이었기에 섣불리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또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아도 귀여운 여동생이 이렇게 많은 제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꽃잎을 뿌리는 장면은 꼭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마음을 굳힌 세드릭이 씨익- 웃으며 이벨리아를 마차 가까이 안아 옮겼다. 아직 작은 소년이 뒤뚱뒤뚱 더 작은 소녀를 안고 가는 것을 본 제국민들은 더욱 크게 환호를 내질렀다.
“그, 그럼 내 꼰잎은……?!”
나는 뿌리기만 하고 못 잡잖아! 100개는 잡아야 하는데, 나눠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이대로 꽃잎 선물을 주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건가. 잔뜩 실망한 이벨리아는 어느새 마차 지척까지 옮겨져 사제의 품에 안겼다. 일순 당황한 사제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르티나의 공녀님이다.’
‘아르티나 공녀님이야.’
사실 지목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두 손을 모으고 분수대 위에 서 있는 것이 제법 시선을 끌었던 것뿐이니까. 그러나 아이를 받아들면서 조금만 찬찬히 보더라도 신분을 파악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 제국에 금발은 흔했으나, 저리 태양과도 같은 색을 지닌 가문은 단 하나. 황태자 전하 아래 이 제국 가장 고귀한 아이를 감히 이 마차에 태워도 되나 의문이었다.
‘이거 괜찮은 것 맞습니까?’
호위 기사로 보이는 자에게 경악 어린 눈동자로 소리 없이 물었으나, 기사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하여 군중들의 함성이 평소보다 배는 높아지는 바람에 이제 와서 내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사제들이 평소보다 더욱 경건하게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복을 건네었다. 이내 이벨리아의 몸에 희미한 신성력이 내려앉아 흰색 빛무리가 휘돌았다. 그러나 이벨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내 꼰잎…….’
“자, 어린 아가씨. 모든 제국민들에게 올 한 해 축복이 가득하도록 이걸 널리 뿌려주시면 된답니다.”
시무룩한 표정의 이벨리아가 꽃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군중들의 함성은 멈추지 않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아르티나의 공녀님이시네.”
환호하던 제국민들 역시도 모를 수 없었다. 탄생부터, 성장까지. 이벨리아는 온 제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또 경애와 칭송의 대상이었으니까. 제국을 수호하는 영웅의 가문에서 난 분.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분. 성 밖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로 자신의 인형을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 따뜻한 분.
“공…… 으읍!!”
누군가 신이 나서 ‘공녀님!’이라고 외치려 하였으나 주변 군중들의 손에 단박에 입이 틀어 막혔다.
“쉿. 부담가지실라. 그냥 즐기시게 두세.”
“저 표정은 즐기시는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에이, 긴장하셔서 그러신 거겠지!”
모두가 때로는 귀족들에게 치를 떠는 제국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도 무려 십 년 만에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어린 공녀님은 감히 배려해드리고 싶은 대상이었다.
“차후 우리 황태자 전하와 혼약하셔서 황후 폐하가 되어주시면 좋겠는데…….”
누군가 조용히 읊조리자, 주변 군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분께서 황후의 관을 쓰시면 어쩌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황제가 들으면 온갖 치하를 아낌없이 내릴 소리였고, 반대로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이 들으면 온갖 악담을 아낌없이 내릴 소리였다. 이벨리아의 앞에 마법으로 만들어낸 자그마한 소리 증폭기가 놓였다.
“꽃잎을 뿌리기 전에 한 마디 해주세요, 귀여운 아가씨.”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제가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이벨리아가 머뭇거리다가 사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이거 다 뿌리고 나면, 저거 새 거 꼰잎 바구니 하나 주시면 안 대요……?”
꽃잎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소리 증폭기를 타고 웅장하게 울리며 대륙의 거리 곳곳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히익-! 소리가 크다아!”
소리가 너무 커서 놀라며 내지른 소리까지도 울려 퍼지고.
“그게, 사실 오늘 이거 꼰잎 자바서 아빠랑, 엄마랑, 오라버니랑, 기사단이랑, 칭구들이랑 나너 주려고…… 그런데 여기 올라와서 꼰잎 한 개도 못 쟈바서 선물 못 해주니까…….”
부끄러워 덧붙인 웅얼거림마저도 함께 소리 증폭기를 타고 멀리 날았다.
“으하하하하하!!”
“하하하- 그래! 바구니 통째로 드려라!”
아이의 솔직한 욕심에 군중들 모두가 박장대소하자, 이벨리아의 손이 꼼지락댔다.
“후후. 알겠습니다. 꽃잎을 다 뿌리시면 새 꽃잎 바구니를 드리지요.”
사제의 허락을 받은 이벨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벨리아가 군중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도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저는 추뽁제 구경이 처음이에요. 벌써 네 살이나 댔는데도요.”
맑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골목 곳곳을 적셨다.
“닥꼬치도 맛있고, 아스크림도 맛있고. 몬슈슈도 맛있었어요.”
아이다운 축복제 평가에 어른들의 눈이 휘어졌다.
“곤목 안에 한머니도, 바가지를 들고 다니던 칭구들도, 모두 잔뜩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표현은 아이답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의 시선이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제국민들은 놀란 듯 이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모두 추뽁 가득한 한 해 되세요!”
마지막 말을 마친 이벨리아는 연분홍색의 꽃잎을 마치 집어던지듯 뭉떵뭉떵 뿌렸다. 팔 힘이 약해서 꽃잎이 잘 퍼져나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꽃잎은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어? 꽃잎이……!”
“세상에, 아름다워라!”
군중들은 아낌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어린아이들이 뿌리는 꽃잎은 물리적으로 약한 아이들의 힘 때문에 멀리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뿌린 꽃잎은 마치 순풍이라도 탄 것처럼, 날개라도 단 것처럼,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제국민들에게도 밀려들었다. 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꽃잎은 그 누구에게랄 것 없이 평등하게 흩날려갔다. 날아온 꽃잎을 잡으면서, 군중들 역시 어린 공녀의 안녕을 빌었다는 것은 이벨리아는 아마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
“……네 짓이지?”
번잡스러운 거리에서 상당히 먼 곳. 한적한 건물의 지붕 위. 여전히 웃통을 벗고 있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지붕 위에 걸터앉아 그의 옆에 선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을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뭘 물어. 당연히 나지.”
여인의 입꼬리가 매혹적으로 호선을 그렸다. 바람의 왕, 페르세스는 이벨리아가 사제들의 손에 축복을 받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그러다가 아이가 꽃바구니에 있는 꽃을 한 움큼 집어 말 그대로 ‘패대기’치는 것을 보고서는 황급히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들을 불러내어, 꽃잎이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나하나 나르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 한 마디에 동실동실 떠다니며 축복제를 구경하던 수백, 수천의 실프들은 꽃잎을 들고 날아다니며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웬일이야. 힘쓰는 건 귀찮다고 잘 안 하지 않았나, 예전부터?”
이프리트가 어둠이 녹아든 지붕에 벌렁 드러누우며 의아하다는 어조로 묻자,
“언니라잖아. 나보고.”
바람에 밀려온 꽃잎 하나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잡은 여인이 나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 한편 마차가 행진하는 광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 커다란 나무 위. 축복제를 구경하러 간다는 작달막한 꼬맹이가 못내 걱정된 아가레스는 종일 이벨리아의 기척을 잡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있으니 어련히 알아서 호위가 붙겠지만, 인간들의 호위란 그의 시선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기에. 아주 만약에라도 꼬맹이의 호위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는 거지.”
생각에 잠기던 그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스스로 답했다.
“흥미로워서.”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다. 일각이 지난 뒤에 다른 답을 내었다.
“재밌으니까.”
두 가지 답을 내었으나 뭔가 약간은 부족했다. 그 이후로도 답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아직 어린 인간이니까. 어린 인간은 한없이 약하니까. 내게 초콜릿 두 알을 주었으니까. 아. 검술에 있어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잖아. 그러나 전부 다 오답. 고작 그 정도 얕은 관계성으로 이런 마음이 들 리 없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성정이 제법 냉혹한 것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이가 무려 소리 증폭기에다가 대고 꽃바구니 하나를 통째로 달라고 사제에게 요구하자 못내 시원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욕심도 많네, 조그만 게.”
이내 ‘꽃잎을 잡아서 친구들에게 나눠 주려고 했다.’라는 대목에서는 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친구라는 게 누굴까. 황태자일까. 내가 모르는 다른 어떤 친구일까. 그 안에 나도 들어가 있으면 좋겠는데. 나무 위까지 날아온 꽃잎 하나를 가볍게 잡아챈 악마가 부드러운 눈으로 꽃잎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알았다. 내내 생각하던 문제의 답을. 일평생 검만을 잡아 온 단단한 손에, 부드럽고 가녀린 꽃잎은 어울리지 않았다. 일평생 베고 또 베어 핏물만 배인 악마의 손에, 향기 어린 꽃잎은 전혀 조화롭지 않았다. 어쩌면 친구가 되기엔 너와 나도 이렇게 부조화스러울 수도. 살짝만 쥐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꽃잎을 소중히 손안으로 감아 넣었다. 거친 손에 쥐어진 꽃잎은 너무도 연약하여 그 존재감마저 희미했다. 그는 악마다. 가진 욕망에 누구보다 충실한 존재. 영토, 권력, 재력. 무엇이든 힘으로 쟁취해왔으나 친구라는 걸 욕망해본 적은 없어 가질 방도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빌어볼 수밖에. 축복받은 아이가 뿌린 꽃잎을 잡으면 축복이 가득하다지. 손에 기대어오는 꽃잎을 바라보길 한참. 단단한 입매에서는 처음 가져보는 소망이 나지막이 새어 나왔다.
“……언젠가 너에게 친구라 불릴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