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중에는 내가 태얌까지 먹나 바2020.12.31.
“아기씨.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되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페르세스가 이벨리아를 내려놓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검집에서 손을 뗀 카론이 이벨리아를 다그쳤다. 항상 그가 모시는 작은 주인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만 바라보던 카론의 눈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일렁였다. 제 작은 주인이 사라졌음을 인식한 순간. 카론은 그 냉철한 이성이 암전됨을 느꼈다. 맥박이 고동치고 시야가 흐려졌다. 기척을 느끼는 것에는 도가 튼 암살자 출신답게 모든 감각은 주인을 찾아 예리하게 깨어났다. 넘실대던 예기는 페르세스가 주인을 내려놓고 돌아가자 이내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갈무리하지 못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흐우…….”
항시 더 녹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던 호위 기사가 화가 난 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당황한 이벨리아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미…… 흐잉…… 미앙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러웠다. 예쁜 언니 구하러 갔던 건데. 잘못한 건 맞는데. 그래도 잘한 것도 있는데. 어린 주인의 눈에 눈물이 그득 들어차자 그의 기운이 한순간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아기씨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닭꼬치를 사러 간다고 아기씨로부터 떨어진 제가 잘못이지.
“후…… 아니, 죄송합니다, 아기씨.”
카론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덮었다. 걱정했었다. 정말로.
“화내지 마아…….”
이벨리아는 잘못한 것은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었다. 엘리시아는 딸을 한없이 아끼면서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엄하게 타일렀기 때문에. 그 덕에 이벨리아는 잘못한 것에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쓸데없는 것에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걱정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제가 아기씨께 화를 낼 리 있겠습니까.”
“그래 이브, 카론 경은 화가 난 게 아니야. 공작저 밖에는 우리 이브를 한입에 털어서 잡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했잖아. 그래서 걱정한 거야.”
끄덕끄덕. 세드릭이 속삭이자 이벨리아가 커다란 눈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지. 혼내는 거 아니야.”
풀 죽은 눈이 돌아오지 않자 세드릭은 동생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기를 몇 분. 아이답게 서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벨리아가 세드릭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제 호위 기사를 바라봤다.
“저기, 근데 내 다꼬치는……?”
내 닭꼬치 사러 갔었는데. 왜 닭꼬치는 없고 카론만 있지? 작은 주인을 찾느라 닭꼬치 따위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기에, 저 멀리 떨어진 닭꼬치는 사람들의 발에 이리저리 차이고 밟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다시 사 오겠습니다.”
모시는 주인께서 사 오라 하시면 사 와야지 별 수 있겠는가. 닭꼬치 포장마차 근처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검은 무복을 갖추어 입은 장신의 기사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것을 보고는 스리슬쩍 길을 비켰다. 암살자 출신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고작 닭꼬치 사는 데 쓸 줄은 몰랐는데. 구 암살 길드 유망주, 현 아르티나 기사단 기대주 카론은 눈을 부라리며 전쟁에 참여했다. 닭꼬치 전쟁에. ***
“맛있어?”
“옹.”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이 가져온 닭꼬치 두 개는 순식간에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벨리아의 손에는 커다란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와앙- 하고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면 얼굴 전체가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쯤 되니 세드릭은 동생의 정체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중에는 이렇게 돼지처럼…… 아니, 내가 우리 이브한테 무슨 생각을.’
그렇지만 우리 아가 저 작은 배에 이게 어떻게 다 들어가는 거지?
“오라버니.”
“응?”
“용똔 조.”
“……또 뭐 먹으려고? 대체 배 속에 뭐가 들은 거야?”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기어코 입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용! 똔!”
그러거나 말거나, 이벨리아는 양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은 세드릭을 향해 위풍당당하게도 뻗었다.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삥을 뜯습니다!
“이제 그만 먹어야 하는데. 딱 하나만 더 먹고 그만 먹는 거야? 우리 아가 밤에 배 아플까 봐 그래.”
세드릭이 돈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들며 말했다.
“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오라버니는 내가 대지인 주 아라?”
“헐, 돼지 아니…….”
돼지 아니었어?! 본심이 나올 뻔한 세드릭은 그랬다가 아버지와 형님의 손에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스치자 아름다운 마무리로 방향을 선회했다.
“-지! 돼지라니.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야!”
그럼, 당연하지. 돼지 아니지. 끄덕이던 아기 돼지 한 마리는 세드릭이 쥐여준 돈을 손에 꼬옥 쥐고 아장아장 길 어귀로 걸어갔다. 뒤를 따르던 카론은 이내 아기씨가 이번만큼은 정말 무엇을 먹으려고 용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환한 불빛이 내리는 길거리에서 단 한 발짝 벗어난 골목 어귀는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져 평소보다 더욱 어두웠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골목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어두운 곳. 웬 노파 한 명이 앞에 바가지 하나를 두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간 이벨리아는 잠시 말없이 노파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구걸하는 아이들도, 지금의 노파도. 이벨리아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이에게는 넓디넓은 공작저가 세상의 전부였다. 보고 자란 것들이라고는 온통 풍요롭고 값비싼 것들뿐.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한 적이 없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모두가 다 자기처럼 사는 줄로만 알았다. 황궁과 카시스 후작저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나온 제국민들의 영역. 그 빛, 그 소리. 그리고 그것에 가려진 그림자.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었기에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그저 싫었다. 마음이 불편했고, 돕고 싶었다.
“……한머니, 추뽁 가득한 한 해 대세요.”
노파가 죽은 자와도 같은 눈으로 금화 몇 푼을 내려놓는 이벨리아를 올려보았다.
“감……사하오.”
말라붙은 목에서 겨우겨우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마저도 마른 목에 붙어버린 것처럼.
“큼, 큼. 상냥한 아가씨로군.”
이벨리아는 무어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런 세상도 존재한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이러고 계신 걸까? 왜 나처럼 금화가 와르르 쏟아지지 않는 걸까? 왜 닭꼬치를 마음껏 사드시지 않는 걸까?
“크흐흐…… 귀한 아기씨로구먼. 세상엔 이런 생도 있다오.”
닳고 닳은 노파는 이벨리아의 눈빛만 보고도 아이의 감정을 알아챘다.
“곧 떠날 늙은이가 귀하신 분에게 금언 하나 남겨도 되겠소? 선량함에 대한 보답이오.”
금언? 알아듣지 못한 이벨리아가 갸웃하자,
“시답잖은 예언이라고 해두지.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는 종종 미래를 본다고 꽤 유명세를 치렀었거든.”
노파가 비릿하게 웃으며 첨언했다. 종종 예언을 한다는 그 능력 때문에 쫓기고 쫓겨 결국에는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말도 끝을 흐리듯 뱉었다.
“오랜만에 힘을 좀 써볼 터이니 너무 놀라지 말고.”
노파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생기 없는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던 안구에는 오로지 흰자만이 남아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이벨리아가 카론의 무복 자락을 꼬옥 손으로 쥐자, 카론이 이벨리아를 슬쩍 뒤로 물렸다.
섬뜩한 흰자가 몇 번 번뜩였다. 이내 노파의 버썩 바른 입이 천천히 열렸다. 「 머리카락 나부끼는 별이 나타날 때, 구름은 세 개의 태양을 드러내리라. 커다란 마스티프는 밤새도록 울부짖으리. 지상에는 검은 이리와 붉은 원숭이 떼가 날뛰고 뱀들은 동쪽 해안에 놓이리라. 평화는 하늘로부터 파괴되고 대지는 진동하며 헤센 강과 티베레 바다의 물결은 높아지고 부정한 것들은 타오르리. 커다란 마스티프는 태양을 물어 채고 천산에서 솟아오르는 별은 관을 쓰리라. 」 갈라지고 찢어지던 칼칼한 목소리는 또렷한 울림을 내었다.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 골목 어귀, 검은색 거적을 걸치고 쪼그려 앉아 미래를 읊는 노파는 괴기스러웠다. 노파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본래의 생기 없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크허헉, 크흠, 잘 들어두었나, 아가씨?”
“…….”
“…….”
카론과 세드릭이 침묵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다지 좋은 예언은 아닌 것 같았다. 노파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무슨 뜻이냐고. 마스티프는, 태양은, 뱀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이벨리아에 관한 예언이라면,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예언이 흉(凶)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저 예언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미리 없애버려야 했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상관없으나 우리 이브, 우리 아기씨에게만은 안 되었다. 절대로. 카론과 세드릭이 노파를 향하여 한발 내디디려는데.
“옹, 고마씁니다.”
이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눈을 슴벅이며 대답했다.
“이브?”
알아들었어, 설마? 사실은 아기의 눈높이에 맞춘 예언이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항 개도 모르게찌만, 내가 태얌을 먹는 마……마…….”
“마스티프?”
“옹. 그거. 그거. 나중에는 내가 태얌까지 먹나 바.”
그 구절은 말이 되네. 우리 이브는 저 기세로 큰다면 태양까지 씹어 먹을 수 있지. 예언자는 스스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신의 눈을 통하여 예언만 듣고 전달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의미를 노파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저 예쁜 아기는 기껏 예언을 떠먹여 줘도 죄다 뱉어내는 해석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태양을 먹긴 뭘 먹어……. 이벨리아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팔자 모양으로 만드는 노파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만’ 감사합니다, 한머니. 추뽁 많이 바드시고, 저히는 가보께요.”
“그만 아니고 ‘금언’이야.”
“옹 그거.”
카론과 세드릭은 저 노파를 잡아 뭔가를 더 캐물을까 고민하였지만, 왜 따라오지 않느냐는 듯 반쯤 뒤를 돌아 손짓하는 이벨리아를 보고 그 생각을 고이 접었다. 어차피 예언자조차 예언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 모두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이었다. 세드릭이 발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상관없지.”
“같은 생각입니다.”
카론 역시 동의했다. 예언이 무엇을 뜻하든, 그래, 상관없었다. 길(吉)이라면 더욱 상서롭도록 꽃을 뿌려줄 것이고. 흉(凶)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감히 걸음 딛지 못하도록 지킬 것이니. *** 골목 밖으로 나오니, 끊임없이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행진을 시작하나 봅니다.”
이벨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꼰잎! 카롱, 거기에 가자!”
이벨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거기’, 아가레스가 알려준 바로 그 시계탑 옆 분수대 위로 가자며 카론을 졸랐다. 이미 행진은 꼭 여기서 보아야 꽃잎을 많이 잡을 수 있다고 알려준 참이었기에 카론도 제 작은 주인이 원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눈여겨 봐두었었다. 아까보다 사람이 더더욱 많아져 인파 사이를 뚫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카론은 이벨리아의 허락을 받은 뒤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저어기! 쩌기!”
머리칼이 마치 달리는 말의 고삐라도 되는 마냥 꼬옥 움켜쥔 어린 주인에 그는 으윽……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육아는 힘들군.’
오늘만 해도 몇 번째 하는 생각인지 두 손으로는 차마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카론 덕분에 인파에 찌부러지지 않고 무사히 분수대까지 도착했다. 보아하니 아가레스가 이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꽃잎을 잡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우웅, 하나아…… 두울…… 세엣…….”
분수대를 밟고 올라선 이벨리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자 세드릭이 물었다.
“뭐해, 이브?”
“꼰잎 몇 개 쟈바야 하는지 세는 거야.”
그래?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오시입.”
욕심이 좀 과한…….
“배애액.”
욕심이 좀 많이 과한…….
“옹. 백 개 정도면 충성하게따!”
“아가, 충성이 아니고 충분.”
“충분하게따!”
……뿌리는 꽃잎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바구니를 통째로 훔쳐서 도주해야 할 판이었다. 충실한 호위 기사, 카론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백 개를 잡아보고, 다 못 잡으면 은신해서 꽃바구니를 빼내오는 거다.’
발군의 암살 능력을 꽃바구니 쟁탈을 위해 사용하는 것쯤은 일절 아깝지 않았다. 우리 아기씨 꽃바구니를 위해서라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