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지배자들을 조련한다!2020.12.21.
아가레스는 제법 기분이 좋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맹이가 저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입꼬리가 씰룩댔다. 제 흥밋거리와 이렇게라도 가까워져서 나쁠 건 없지 않나.
“추뽁제에 갈 건데, 긍데 나간 적이 거이 없어서, 어디를 가야 잘 구경하고 올 수 있는지 모르게써. 다들 이상한 거만 가르쳐죠…….”
축복제에 갈 거라면서 두 손을 불끈 쥐고 눈을 반짝이다가도 다들 이상한 것만 가르쳐준다고 말할 때는 시든 시금치처럼 시무룩해졌다. 감정표현이 이렇게 명확하고 솔직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아주.
“축복제 명소라면, 나보다 잘 추천해줄 사람은 없지.”
그가 으스대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색기 어린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더해지니 더욱 퇴폐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저 안 그래도 사악해 보이는 악마가 조금 더 사악하게 보일 뿐이었다. 어디부터 추천을 해줄까…….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맛집? 단것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디저트 가게? 아니면 역시 행진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
“축복제는 역시 행진이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알려줄까?”
……응? 아가레스도 행진을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아, 설마. 아, 진짜. 그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벨리아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아가레스를 따라 빼꼼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린 은발 머리 소년이 서 있었다. 루드비히는 근래 며칠, 혹시라도 시간이 남아도는 악마가 비밀기지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자기보다 빠르게 이벨리아와 친해질 것이 우려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오늘따라 뭔가 엉덩이가 따끔따끔한 것이 아무래도 오늘이 날인가보다 싶어 결국 집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비밀기지로 올라온 참이었다. 가히 짐승 같은 그의 직감은 옳았다. 뭣도 모르는 악마가 감히 아는 척을 하며 땅 도둑의 환심을 사려고 되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르카디아 제국에서 열리는 축복제다. 제까짓 게 알아봐야 축복제를 주최하는 제국의 황태자인 저보다 잘 알겠는가.
“……진짜 짜증 나네. 야, 너 바쁘지 않아? 바빠야 정상인데?”
평소 한없이 무심한 아가레스의 눈은, 아주 오랜만에 짜증이라는 감정을 담았다. 저 자식 얼굴을 고작 며칠 만에 또 보다니. 그것도 꼬맹이랑 이제 막 재밌는 시간을 보내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원통할 수가.
“할 일 없는 악마보다야 당연히 바쁘지.”
루드비히가 아가레스를 향해 살짝 턱짓하며 대답했다. 너 말이야. 너. 백수.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못하는 머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용하군.”
“동쪽 구석에나 처박혀 있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마음을 안 먹어서 이런 거고, 너는 마음을 먹어도 그 지경이고. 경우가 좀 다르지?”
“…….”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그냥 나 축복제때 어디 가야 맛있는 것도 먹고, 단것도 먹고, 행진도 제일 가까이서 보고, 공연은 어디서 보고, 이런 것만 알려주고 가면 되는데. 이벨리아가 커다란 눈을 슴벅슴벅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오늘은 당황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영리한 이벨리아는 얼마 전, 정원사 글렌이 강아지를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더랬다. ‘앉아!’, ‘손!’ 같은 말을 하고서 아주 우연히 한 번 앉거나 손을 내밀었을 때를 기다려 간식을 먹여주고 쓰다듬어준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앉아!’, ‘손!’ 말해주기를 몇 번 반복하면 말을 잘 듣게 되는 것을 보고 짝짝 손뼉을 친 적이 있다. 다음에 아가 토끼와 흰색 강아지 새끼가 다투면 이렇게 하면 되겠다, 혼자 눈을 빛내었던 이벨리아는 그래서 준비해왔다. 이 빵을.
“자자- 그만!”
이벨리아가 말했으나,
“악마가 축복제에 대해 알면 뭘 안다고 땅 도둑을 가르쳐?”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아직 세포 상태에서 제대로 탈피도 못한 너보다는 잘 알지.”
말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말싸움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그만! 이라고 말하면서 빵을 입에 넣어주고 쓰다듬어주면 되는 거야. 글렌이 하는 거 다 봤어. 그렇게 하면 말 잘 들어. 이벨리아는 자그마한 손에 빵을 쥐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세포……. 어이가 없군. 그대는 소멸도 안 하나?”
“누가 좀 시켜주면 좋겠네. 내가 꽤 강해서 말이지.”
“몇 년만 기다려. 내가 해줄 테니까. 미리 감사하다고 인사나 좀 해두고.”
“내 마기는 마음대로 조절이 잘 안되거든. 죽어도 탓하지 말고.”
“…….”
정신없이 이어지던 대화에, 잠시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이때다!!
“그만!”
이벨리아가 큰소리로 외치며 옆에 있는 아가레스의 입에 빵 한 덩이를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루드비히에게도 달려가 그의 입에도 빵 하나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으웁……?”
“아이고- 차카다!”
높게 까치발을 들어 루드비히의 머리를 한 번 쓰담, 사실 키가 잘 안 닿아서 앞머리만 쓰담.
“올치, 우리 토끼도 차카네!”
다시 아가레스에게로 달려와 돌을 밟고 올라가 머리를 한 번 쓰담.
“이게 ‘그만’이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일러주기까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존재를 탐내는 상대방을 죽일 듯 노려보던 두 지배자는, 처음으로 다른 의미의 눈빛을 마주했다.
‘얘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도 몰라……?’
둘이 시선을 마주치자 또 싸우기 시작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이벨리아는 다시 훈련을 반복했다.
“그만!”
야, 잠깐, 우리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올치! 말도 잘 듣네.”
어리둥절한 아가레스 한 번 쓰담, 빵 하나 투여.
“오구구, 차카다 차캐.”
영문을 모르는 루드비히 또 한 번 쓰담, 빵 하나 투여. 황당함으로 얼어버린 두 지배자가 훈련 덕에 얌전해졌다고 단단히 착각한 이벨리아는 뿌듯하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이제 그만 싸우고 나 가르쳐줘! 추뽁제!!”
“와, 나 이런 기분 처음인데.”
아가레스가 칠흑 같은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루드비히 역시 흔들리는 붉은 눈으로 답했다. 이렇게 개 취급받는 건 진짜 처음이야……. 내가…….
“얼릉 얼릉!!!”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든 말든. 두 지배자가 오물거리며 빵을 넘기는 동안 이미 수첩을 펼치고 옆에 놓아둔 펜을 집어 든 이벨리아는 다리를 달랑거리면서 재촉했다.
“후…… 뭐부터 가르쳐줄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바압!”
“밥이라면 역시 페네치아지.”
“……뭘 좀 알긴 하는군.”
처음으로 두 지배자의 의견이 일치했다.
“페네찌아?”
이벨리아는 따라 읊으며 수첩에 적었다. ‘배나띠야.’
“아니지, 배가 아니고…… 아니, 줘 봐. 이렇게 적어야지.”
“너 아직도 글을 못 써? 아니 그보다 이게 그림이야, 글씨야.”
루드비히가 허리를 숙이고 한 글자, 한 글자, 수첩을 짚어가며 글자를 교정해 주었다. 아가레스는 충격받은 얼굴로 마치 세상 둘도 없는 바보를 보듯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옹. 나 ‘네 잘’이야.”
“그런데 이 지경이야?”
“원래 잉간 네 잘은 이 지경이야.”
이벨리아는 당당했다. 거의 글씨가 아니라 그림을 그려두긴 했지만, 우리 집 식구들은 나 잘한다고 칭찬도 듬뿍 해줬는걸.
“페네치아의 대표 메뉴는 ‘레스트 에르 이브’야. 새우와 고기를 올리브유에 볶아서 특별한 소스를 넣은 다음에 빵과 함께 먹는 거지.”
[친구 관계, 이것만 알면 백전백승!] 책에 적힌 ‘뭐든지 먹을 거로 유인해라’라는 배움을, 이 제국의 작은 군주는 착실히 실행하고 있었다.
“우와…… 뒤집어지게 맛있겠다!”
이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자그마한 입술을 한 번 혀로 핥더니 오물오물했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작은 코는 기대하듯 발름거리고 고개는 신이 난 것처럼 까닥까닥 흔들린다. 두 지배자는 그 모습을 보고 설핏 웃음 지었다.
“디저트는 페로나가 가장 유명해.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라서 미리 하인을 통해 예약해두는 게 좋아. 아르…….”
‘아르티나 가문이라고 하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서 줄 거야.’라고 말하려던 루드비히가 일순 멈칫했다. 그는 땅 도둑의 정체를 알았지만 땅 도둑은 그의 정체를 몰랐다. 사실, 땅 도둑은 그의 정체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다. 땅 도둑에게 저는 그저 비밀기지의 식량 도둑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자신을 황태자가 아닌 그저 비밀기지의 공유자로, 식량을 훔치는 식량 도둑으로 여겨주길 바랐다. 아가레스 역시 굳이 루드비히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인간계에서 황태자란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 좋은 쪽으로든, 좋지 않은 쪽으로든, 꼬맹이가 휘둘리는 것을 그는 절대로 원치 않았다.
“아르…… 음…… 아름답게 먹을 수 있어.”
황급히 말을 돌린 루드비히가 아무 말 대잔치에서나 볼 법한 말을 내뱉었다.
“페로나는 ‘몽슈슈’가 유명하지. 얇은 페이스트리 안에 초콜릿 크림을 잔뜩 넣어 놓은 거야.”
단것은 취향이 아니라, 이를 먹어보지는 않은 아가레스가 자주 들려온 소문을 기반으로 추천했다.
“몬슈슈……! 우웅, 갈래. 뻬로나.”
이벨리아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수첩에 받아적었다. ‘빠노라.’
“이거 또 잘못 적었어. 빠가 아니라 페야. 로는 이렇게, 나는 이렇게 써야지.”
루드비히가 한 번 더 글자를 차근차근 교정해주었다.
“나는 ‘네 잘’이야.”
왠지 민망한 이벨리아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한 번 더 작은 목소리로 강조했다. 글씨는 못 쓰는 게 당연하다고. 사실 이 수첩은 폼으로 들고 온 거라고. 이벨리아가 잘못 쓴 글자 위에 찍찍 선을 긋고 루드비히가 쓴 글자를 따라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적었다.
“이거 마자?”
제대로 썼는지 갸웃대는 이벨리아를, 두 지배자는 풀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잘 썼네. 맞아.”
세상 걱정이라고는 몽슈슈를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전부일 것 같이 해맑은 아이를 보고 있자면 삶에, 책무에, 잔혹함에 짓눌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엄 핸진은?”
축복제의 성대한 행사 중에서도 행진은 모든 제국민들이 특히 주목하는 절차였다. 행진을 하는 중앙 마차에 탄 정령사들과 신관들은,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어린아이를 마차에 태워 축복을 내려준 뒤 꽃잎을 널리 뿌리게 했다. 축복을 받은 아이가 뿌리는 꽃잎을 잡으면 그해에 행운이 따른다는 오래된 미신이 있어 마차가 행진하는 길 주위에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벨리아 역시 그 꽃잎을 여러 개 낚아채어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버니들, 그리고 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행운을 준다는 꽃잎을 잔뜩 잡아서 나누어주면 다들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행진 때에 꽃잎을 잡으려면, 마차 바로 앞보다는 광장의 시계탑 바로 측면의 분수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가장 좋아.”
이번에는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수첩과 펜을 받아들고 찾기 쉽도록 그림을 그려주었다. 시계탑과 분수대를 그린 후 올라갈 자리에 자그마하게 동그라미까지 쳐 주었다.
“헤헤- 고마어 둘 다. 꼰잎을 잔뜩 잡아서 꼭 나너줄게.”
드디어 쓸 만한 정보들을 얻었다! 이미 며칠 전 둘이 치고받고 싸워 잔뜩 삐져 돌아갔던 일은 아이답게 잊어버린 이벨리아가 수첩을 소중히 안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행운과는 전혀 거리가 먼 생을 사는 그들에게 행운을 준다는 꽃잎을 잡아 나누어주겠다는 예쁜 말을 들은 두 지배자의 눈도 부드럽게 휘었다.
“아, 그런데 축복제는 누구랑 가?”
아가레스가 슬쩍 물었다. 딱히 갈 사람 없으면 나랑 가도 되는데. 나랑 가면 분수대 위에 안 올라가도 목말 태워서 가장 잘 보이게 해줄 수 있는데. 꽃잎도 내가 다 잡아줄 수 있는데.
“땅 도둑이 누구랑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루드비히의 홍안이 마치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아가레스에게로 향했다. 설령 땅 도둑이 함께 갈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야지 왜 네가 가. 네가 뭔데.
“그러는 너는 무슨 상관이 있으셔서 그리 예민하나?”
두 지배자의 미간이 콱 찌푸려졌다. 으르렁대는 두 도둑들을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 오라버니랑 갈래.”
……우리 둘 다 오라버니인데! 두 지배자가 이벨리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동시에 물었다.
“오라버니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