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빠, 아빠, 아빠, 추뽁제……!2020.12.17.
“아으…… 아야야…….”
아침 댓바람부터 아르티나 공작저에는 끙끙 앓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고, 나 죽네……!”
소리의 근원은 알렉이었다. 어제 이벨리아가 검을 질질 끌고 뛰어가 버린 후. 알렉은 장장 두 시간을 휴고의 손에 의해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신나게 굴렀더랬다. 구르는 중간중간에 경쾌한 타작 소리도 빼놓지 않고 들려온 것으로 추측건대 현재 알렉의 몸 여기저기에는 타박상이 가득할 것이었다. 기사단이 머무는 건물은 공작저로부터 걸어서 겨우 10분 거리였다. 쉽게 말해 소연무장만 건너면 공작저로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리 가까운 거리를 알렉은 무려 30분이 걸려 꾸물꾸물 기어 왔다.
“이…… 나도 같이 가아…….”
알렉이 저를 쌩쌩 지나쳐가는 기사들을 붙잡고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놀라우리만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어제 주군이 저만큼 패두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이 흠씬 두들겨 패주었을 것이었다. 감히 어디 우리 작은 아기씨에게.
“오늘 아침 메뉴는 송아지 스테이크라던데? 한 그릇 가지고는 턱도 없겠네!”
드웬이 알렉을 스쳐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무슨 걱정이야! 늦게 오는 사람 것 먹으면 되지!”
헤롤드가 알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내 고기……!”
“아 참, 오늘 디저트는 우리 아기씨가 어제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던 에그 수플레라던데. 또 우리 주방장의 에그 수플레는 이 세상에서 따라갈 자가 없지!”
“어이쿠! 에그 수플레? 그것도 한 접시로는 부족하겠는데?”
“별 걱정을 다 하네. 저기 오늘 내로 밥 먹으러 못 올 것 같은 사람이 있는데.”
“내…… 내 에그 수플레……!”
알렉이 특히 환장하는 에그 수플레. 그러나 주방장이 손이 많이 간다며 특별히 우리 아기씨가 원하실 때만 만들어주는 바로 그 에그 수플레. 알렉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밥도 좀 남겨달라고 외쳤으나 기사단 모두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주군의 응징은 끝났지만 우리의 응징은 아니란다. 대형견들이 성심으로 모시는 아기씨에 대한 한마디 말실수의 대가를, 알렉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치러야만 했다. *** 자기 얼굴만큼 커다란 송아지 스테이크를 아무 무리 없이 싹싹 해치운 이벨리아가 에그 수플레를 크게 한술 뜨며 흘끗흘끗 휴고를 바라보았다. 아빠, 아빠, 저 좀 봐요. 아빠, 아빠, 아빠? 딸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느낀 휴고가 부드럽게 이벨리아를 돌아보았다.
“우리 이브, 무슨 일로 그렇게 쳐다보실까?”
“헤헤.”
이벨리아가 높은 의자에서 꼼질꼼질 내려와 헤실거리며 휴고에게 다가가서 두 팔을 위로 뻗었다.
우리 아가가 바라는 게 있네. 아르칸이 슬쩍 웃었다. 이벨리아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면서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헤실거리면서 안기는 것. 평소에도 귀엽지만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 놓은 눈을 슴벅이며 작은 손을 뻗는 여동생은 정말로 귀여웠다. 그게 뭐든지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르티나 가문의 세 부자를 실패 없이 공략하는 필살기인 셈이었다.
“말해 보거라.”
휴고가 가볍게 이벨리아를 들어 올려 무릎에 앉히며 말하자,
“추뽁제……!”
이벨리아가 축복제에 가고 싶다고 말하며 웃음을 머금고 눈을 빛냈다. 에르카디아 제국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를 꼽으라면 단연 축복제였다. 신년제보다도 더욱 성대하게 치러지는 축복제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농사, 수확,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잘 풀리기를 신들과 정령들에게 기원하는 행사였다. 한 해의 행운을 비는 축제이니만큼 자연히 맛있는 음식들과 화려한 불빛들이 거리를 장식했다. 그에 홀려서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대목에 가게 주인들의 인심은 후해지게 마련이었다. 풍요로운 축복제를 위하여 황실 및 고위 귀족 가문에서도 재물과 음식을 아낌없이 풀어 축제는 더더욱 성대했다. 적어도 축복제 날, 이 제국의 그 누구라도 굶주려서는 안 되었다.
“흐음, 축복제라…….”
휴고가 딸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쁜 마음으로 첫 나들이를 보내주면 좋겠건만. 얼마 전 가문의 정보부는 데퐁트 후작이 고위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고서(古書)를 입수했다는 정보를 물어왔다. 데퐁트 후작이 슬슬 움직임을 보이려는 이 시기에 섣불리 이벨리아를 공작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허락해요, 여보.”
엘리시아가 휴고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딸은 인형도, 새장에 갇힌 새도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성안에 갇힌 채로 피해 다닐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벨리아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은 것을 보고 또 다양한 경험을 하기를,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어머니의 지원사격을 받은 이벨리아가 어깨를 들썩대며 휴고를 올려다보았다. ……허락 안 해주면 여기서 드러눕겠군.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이벨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말해 봐요, 아빠!!
“축복제 당일 우리는 황제 폐하와 함께 제국민들에게 모습을 보여야 한단다. 그래서 우리 아가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기는 어렵지.”
휴고와 엘리시아, 아르칸은 제국의 수호자와 그 후계자로서 마땅히 황제의 곁에서 축복제를 함께해야 했다.
“그러니 세드릭, 그리고 카론과 함께 가거라.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녜!!”
이벨리아가 양손을 불끈 주먹 쥐고 크게 대답했다. 이 주 뒤에 있을 축복제를 상상하니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볼이 발그레해졌다. 이벨리아는 몇 개의 공식행사 및 비밀기지를 방문을 제외하고는 공작저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바깥세상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공작저 안에만 있어도 항상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하인들과 하녀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그 유명한 축복제는 어린 아가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맛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던데. 축복제가 끝나가는 밤이면 꽃잎이 휘날리는 아주 예쁜 행진도 한다던데!
“중비해야지!”
아직 무려 이 주나 남은 축복제에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벨리아는 휴고의 무릎 위에서 낑낑대며 내려가 방으로 뛰어가다가 발걸음을 멈칫했다. 다시 쏜살같이 돌아와 아르칸과 세드릭의 에그 수플레 그릇을 두 손 가득 집어 들고는 마치 야생의 다람쥐처럼 날래게 뛰어 올라갔다. 휴고가 나직하게 에딘을 불렀다.
“에딘.”
“예, 주군.”
“축복제 당일, 나와 부인이 아니라 이브와 세드릭을 따라가라.”
“존명.”
에딘이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감히 누가 주군이나 마님께 직접 칼을 겨누겠나. 소드마스터이신 주군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마님께서도 이 나라에서 몇 없다는 중급 정령사셨다. 큰 도련님께서도 이제는 웬만한 기사들은 가볍게 상대하실 만큼 검술 실력이 일취월장하셨다. 반면에 우리 아기씨는……. 누구라도 직접 칼을 겨눌 수 있지. 무력이라고는 0에 수렴하시는 분이니까.
“이브를 내보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아르칸이 씁쓸하게 엘리시아에게 말했다. 늘 가족들의 품 안에 있던 여동생이 공작저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에,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다.
“아르칸. 이브도 자란단다. 언젠가는 이 제국 귀족들을 이끌 아이야. 무턱대고 감싸기만 하는 것이 진정 이브를 위하는 길은 아니지.”
엘리시아가 아르칸과 세드릭, 그리고 휴고와 눈을 맞추며 찬찬히 말을 이었다.
“이브는 현명하고 영리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졌어. 너희들도 잘 알 거야. 아이가 직접 세상에 부딪힐 기회까지 우리가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싸고도는 것은 좋았으나 그러다가 이벨리아가 아무런 경험도, 강단도 없는 채로 자라 반쪽짜리 공녀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에 내린 결단이었다. 마음으로는 반대하고 싶었으나, 이성적으로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아도 백번은 옳았다. 아르칸은 애써 수긍하고 고개를 숙였다. *** 축복제에 방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이틀 후. 이벨리아는 조금씩 따사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테라스 안에 놓인 폭신한 붉은 색 의자에 걸터앉아 마시멜로에 초콜릿을 푹푹 찍어 먹으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흔치 않은 기회인 축복제에 가볼 명소들을 미리미리 알아둘 생각이었다. 실상 축복제 때는 황궁에서 귀족들을 위한 연회가 따로 마련되었기에, 귀족들은 그곳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버니만 해도 그랬다. 즉, 이벨리아가 조금만 더 크면 황궁 밖을 나가서 진짜 축복제를 구경하기보다는 황궁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컸다. 그것을 알기에 이번 기회가 더더욱 소중했다. 한 번 나가는 것, 제대로 즐기고 와야 했다. 흐음…… 이제 누구한테 더 물어보지. 그동안 이벨리아는 공작저의 사람들에게 ‘제일 맛있는 꼬기와 쪼꼬를 파는 곳’을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더랬다. 물어보니 하녀들은 제각기 너무나 많은 곳을 추천해주어 결국 어느 곳도 제대로 추천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답변을 해주시는 듯하다가 이내 당신들의 연애 스토리로 빠져버렸다. 이곳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다느니, 이곳에서 첫 불꽃놀이를 보았다느니. 아직도 신혼에 살고 계신 부모님은 이벨리아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오래간만에 떠오른 추억에 폭 빠져버리셨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라버니들 역시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브, 이곳은 위험해. 절대로 가면 안 돼.”
“여기는 도둑들이 많은 골목이야. 우리 아가가 가면 탈탈 털릴 테니 여기도 안 돼.”
추천 장소들을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방문하지 말아야 할 곳들만 줄줄이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뾰로통하게 나온 입으로 마지막 희망인 기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축복제의 묘미는 역시 주점입니다! 크으!”
기사단은 술잔을 털어 마시는 흉내를 내며 ‘크으’하는 소리를 내다가 아기씨 앞에서 별소리를 다 한다며 단장 에딘에게 크게 혼이 났다.
“우리 집은 틀려떠.”
적어도 이 공작저에는 축복제에 방문해야 하는 명소를 딱 짚어서 알려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초콜릿 퐁듀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러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냠냠 핥아 먹고 옆에 있던 빵 바구니를 챙겨 카시스 후작이 준 목걸이를 돌렸다. - 딸깍. 목걸이를 돌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에 내려앉았다.
*** 비밀기지는 조용했다. 오늘은 피 도둑과 식량 도둑이 방문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며칠 전 제가 떠나고 난 뒤에 둘이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두막집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있었더라면 기필코 엉덩이를 차 버리려던 이벨리아는 오두막을 요리조리 살펴본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따뜻한 바람이 불 시기가 되었는지, 검술 연습을 하러 왔던 며칠 전보다는 한층 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꽃가루들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을 보아하니 조만간 비밀기지에도 여러 가지 꽃이 만개할 것 같았다.
“에췽!!”
꽃가루 하나가 콧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시원한 재채기를 하고서 쏘옥 나온 콧물을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로 쓱쓱 닦아내는데,
“지지. 이걸로 닦아.”
누군가 뒤에서 손수건을 건네왔다. 손수건에서는 짙은 박하 향이 났다.
“토끼!!”
기척 없이 다가온 존재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뒤를 도니 마치 밤하늘 같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환한 대낮에 흩날리는 어두운 머리칼은 봐도 봐도 아름다웠다. 아가레스는 며칠 전 화를 내고 돌아가 버린 이벨리아가 왜인지 마음에 걸려 계속 이 근처를 맴돌았더랬다. 혹시 오늘은 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비밀기지가 있는 산 근처를 서성대면서 혹시라도 아이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밀기지가 있는 언덕 쪽에서 청량한 정령 냄새가 흘러오자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왔구나.”
마치 가벼운 장난을 치듯 몬스터들을 한 마리씩 나누어 도륙하고 있었으나, 아이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크게 검을 휘둘러 일격에 주변 모든 몬스터들을 몰살시켰다. 묵색의 검을 가볍게 허공으로 던져 올리니 검은 허공에서 서서히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비밀기지 안,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이 시원하게 날리는 것이 보였다. 혹시 얼마 전 일로 아직도 화가 나 있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풀어주지. 눈치를 보는 스스로가 어색하여 애써 합리화도 곁들였다. 재미있는 것을 이렇게 놓칠 수는 없지 않나.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는 것쯤 아깝지 않은 대가지.
“마침 잘 와써, 토끼! 이리 안자바.”
꼬맹이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토끼…….”
그러나 호칭을 바꾸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그의 추종자들이나 적들이 듣는다면 웃겨서 뒤집어질 호칭이었다. 악마는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이의 곁으로 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이벨리아는 아직 서 있었으나, 아가레스가 바위 위에 걸터앉은 것보다 더 자그마했다.
“자, 꼬맹이, 너도 앉아.”
아가레스가 그의 옆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자, 이벨리아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건 뭐야? 좋은 냄새가 나는데.”
“이거, 빤이야. 빠앙.”
빵. 전에 만난 어린 것이 나는 먹어봤노라 자랑했던 빵. 아가레스의 눈이 빛났다.
“한 개만 줘.”
“안 대. 이거는 쓸 곳이 이써.”
이벨리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 빵은 쉽게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빵이 아니었다. 이따가 꼭 필요한 곳에 쓸 요량이었다. 단호한 거절에 악마는 더 억지 부리지 않고 깔끔히 물러섰다. 중요한 건 빵이 아니라 이 꼬맹이에게 미움받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치사하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어느새 곰돌이 모양 가방에서 수첩과 펜까지 야무지게 꺼내든 이벨리아를 보며 그가 물었다.
“추뽁제……! 추뽁제 가바써?”
추뽁제……? 아, 축복제!
“축복제? 많이 가봤지. 아주 많이 가봤어.”
어디 그냥 ‘많이’만 갔겠는가. 에르카디아 제국이 왕국이었을 시절에도 존재하던 그였으니 축복제뿐만이 아니라 축제란 축제는 안 가본 것이 없었다. 여러 축제를 다녔지만 에르카디아 제국의 축복제가 가장 성대하고 화려했다. 그래서 적어도 축복제만은 이따금 챙겨 가는 편이었다. 그가 많이 가봤다고 대답하며 시선을 돌려 이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벨리아는 너무도 작아 아가레스가 내려다보면 대부분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고개를 바짝 들고 있는 바람에 바다색 눈동자와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얽혀들었다.
“가……가바써? 지짜? 많이?”
아이의 눈이 과도하게 반짝였다.
“그럼. 많이.”
드디어 좀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 아니 악마를 찾았다!
“나 좀 도아줘!!”
악마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