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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식량 도둑 황태자와 피 도둑 악마 (22/323)

22화. 식량 도둑 황태자와 피 도둑 악마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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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23177836.jpg“너는 누구지?”

1654972317784.jpg“여전히 말이 짧네.”

16549723177836.jpg“내가 말을 높여야 할 사람은 이 제국에 몇 없는지라.”

1654972317784.jpg“내가 이 제국 ‘사람’이 아닌지라.”

16549723177836.jpg“사람이 아니다?”

16549723177861.jpg“얘는 앙마야. 내 피를 먹을 거래.”

여전히 제 목덜미를 답삭 잡아 올린 채 핑퐁 게임처럼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에, 이벨리아가 병아리만 한 소리로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1654972317784.jpg“꼬맹이, 너 지금 저 까칠한 인간 편들어? 내가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아가레스가 왜인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이벨리아를 돌아보았다.

16549723177836.jpg“악마? 어떻게…… 아, 악마는 소환자가 없어도 인간계에 나올 수 있다고 하던가.”

루드비히가 악마에 대한 지식을 상기해냈다. 마족과는 달리, 악마는 소환자가 없더라도 인간계에 나올 수가 있었다.

16549723177836.jpg“그렇다면 가만 둘 수 없지.”

루드비히가 늘 차고 다니는 검을 뽑기 위해 옆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건만. 아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오늘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 온 참이었다. 슬쩍 민망해진 루드비히가 처음부터 검을 뽑을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려 쥐었다. 금방이라도 원투 펀치를 날릴 모양새였다. 나이에 비해서는 다부지지만 그래봤자 아직은 작은 손을 본 아가레스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1654972317784.jpg“가상하군. 너는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겠어.”

기운이 딱 황제의 아들인데.

16549723177861.jpg“쟤는 식냥 도둑이야. 내 빵하고 쿠키하고 쥬쓰를 다 훔쳐 가써. 악땅이지.”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삐약 끼어들었다.

16549723177836.jpg“땅 도둑, 너 지금 저 악마 편들어?”

루드비히가 허공에 들린 이벨리아를 향해 살짝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이벨리아의 볼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지금 제일 억울한 건 비밀기지를 빼앗긴 난데. 그냥 둘 다 사라져주면 좋겠는데. 나를 고이 내려 두고 둘이 어디 저기 멀리 가서 싸우면 좋겠는데.

16549723177836.jpg“나를 어떻게 알지?”

루드비히가 곧바로 아가레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1654972317784.jpg“너도 날 알 텐데.”

악마의 금안은 이런 설전 따위 지루하다는 감정만을 담고 있었다. 아, 꼬맹이랑 얘기할 때에는 재미있었는데. 이 어린놈은 좀 빨리 꺼져주면 고맙겠는데. 꼬맹이 앞에서 피를 보일 수도 없고. 아가레스가 어떻게 루드비히를 쫓아버릴까 고심하던 동안 루드비히는 아가레스의 머리 색, 눈동자, 외모 등을 천천히 훑더니 한 가지 답을 유추해냈다.

16549723177836.jpg“설마 동(東)마계의 지배자인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종종 들었다. 더욱 격화되려는 1차 인마전쟁을 멈춘 것이 ‘동(東)마계의 지배자’라고. 황제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몇 안 되는 악마가 바로 ‘동마계의 지배자’라고 말했으나, 이는 큰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가레스가 마계의 군주인 바알과 인간계의 군주인 칼라일 및 휴고의 사이를 오가며 전쟁을 종식한 것은 인간에 대한 호의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흥미가 우선이었다. 안 그래도 재미없는 세상. 인간이나 마족 중 어느 한쪽이라도 깡그리 멸종된다면 더욱 심심할 것 아닌가. 딱히 마왕 바알이 죽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종종 그를 경계하면서 날을 세우는 바알을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였다. 그의 눈에 바알은 호랑이의 자리에 앉아 있는 여우와도 같았다. 즉,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재미 때문에 적정한 선에서 전쟁을 막은 것이었다.

1654972317784.jpg“알았으면 공경 좀 하지?”

누구 덕분에 1차 인마전쟁이 끝나서 인간들이 남아 있는데.

16549723177836.jpg“아쉽군. 놔두었으면 그쪽이 모조리 사라졌을 건데.”

……잘들 싸운다. 피 도둑, 식량 도둑, 여기 나는 보여? 집에도 못 가게 잡아두고! 이렇게 허공에 달랑 들어두고! 낑낑,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는 듯하다. 도둑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벨리아의 눈이 서서히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16549723177861.jpg“도둑들아.”

나 좀 봐봐. 이벨리아가 세모꼴이 된 눈과는 다르게 소심하게 불렀으나,

1654972317784.jpg“엉.”

16549723177836.jpg“왜.”

피 도둑과 식량 도둑은 자기들끼리 불꽃 튀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벨리아의 부름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벨리아의 이마에 자그마한 실핏줄이 톡 튀어나왔다.

16549723177861.jpg“도둑들아.”

이벨리아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도둑들을 불렀다.

16549723235299.jpg“왜. 말해.”

도둑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번에도 설렁설렁.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지금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에게 허공에 들려 삐약대는 병아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싸가지 없는 악마, 저 주제도 모르는 어린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입술을 앙다문 이벨리아가 허공에 매달린 상태에서 양손을 허리에 챡 올렸다. 안 되겠다, 이 악당들!

16549723177861.jpg“도둑들!! 쥬목!!”

들판을 울리는 카랑한 목소리에 그제야 두 도둑들이 이벨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잔뜩 성이 난 듯 양손은 허리에 올라가 있고, 눈은 자기 나름대로 사납게 부릅뜨고, 입술은 앙다문 병아리 하나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가레스의 손에 번쩍 들려 허공을 비행 중이어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은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16549723177861.jpg“여기는 내 비민기지야! 둘 다 나가서 싸어! 그리고 아무래도 학실하게 해야게써.”

……뭐를? 두 도둑들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16549723177861.jpg“먼져 너, 피 도둑. 내 피는 맛 없떠! 쟤 피 머거!!”

이벨리아가 시선은 아가레스를 향한 채 작은 손가락을 펼쳐 루드비히를 가리켰다. 루드비히가 한순간에 저를 팔아넘기는 병아리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6549723177861.jpg“그리고 너, 식냥 도둑. 이 비민기지는 가치 쓰기로 했지만 내가 대쟝이야. 똑똑히 명신해.”

부정확한 발음으로 참 잘도 말하네. 루드비히와 아가레스는 동시에 생각했다.

16549723177861.jpg“그리고, 나 혼내지 않는다고도 약속해…….”

악마의 빵이랑 주스 먹인 거……. 큰소리를 빵빵 치면서도 염치는 있는지 이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루드비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던 시선은 슬슬 옆으로 비껴갔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뭐라고 항변하고자 입을 열었으나,

16549723177861.jpg“내 말 안 들으면 다아 내쪼차 버릴 거야! 다음에 또 싸워도 다아 내쪼차 버릴 거야! 이제! 그망! 내려나!!”

이벨리아가 재빨리 선수 쳤다. 사납게 삐약대는 병아리에 놀라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내려놓았다. 악마의 손에서 풀려나 땅으로 내려온 병아리는 씩씩대며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16549723177861.jpg“전말! 대는 일이! 항 개도 없떠!!”

검술 연습하러 왔더니, 내 비밀기지에 악당들이 바글거리고 말이야! 내 피를 뽑아먹겠다고 그러더니 둘이서 싸우고 말이야! 나는 허공에 띄워놓고!

16549723235299.jpg“잠깐……!”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동시에 이벨리아를 불렀다. 이게 얼마 만에 본 건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말을 뱉은 것이 또 기분이 나빠 서로 한 번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까지 바라본 이벨리아가 조막만한 손으로 이마를 턱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49723177861.jpg“싸어라, 싸어, 더 싸어!”

이내 목걸이를 돌려 공작저로 돌아가자 남은 두 사람은 이벨리아가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둘이 시선을 맞추었다. 선을 지키지 못하고 대판 싸우는 바람에 그리 만나고 싶던 아이가 돌아가 버렸으나, 다툼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1654972317784.jpg“너 때문에 꼬맹이가 돌아갔잖아. 다시는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

아가레스가 혀를 차며 먼저 입을 열자,

16549723177836.jpg“내가 할 소리. 특히 이곳은 나와 땅 도둑의 비밀기지야.”

루드비히가 ‘나와 땅 도둑의 비밀기지’임을 강조하며 씨익 웃었다. 여덟 살 아이다운 유치함이 빛을 발했다. 너는 이런 거 없지?

1654972317784.jpg“알 텐데. 마음만 먹으면 인간계의 모든 땅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16549723177836.jpg“이 제국의 모든 땅은 이미 내 건데.”

1654972317784.jpg“황가의 예절교육은 엉망이군.”

16549723177836.jpg“마계는 교육 자체가 없으면서.”

1654972317784.jpg“내가 오늘 꼬맹이에게 검술을 가르쳤지. 우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16549723177836.jpg“나와 땅 도둑은 비밀기지를 공유하는 사이지. 땅 도둑이 직접 만든 빵도 난 먹어봤어.”

1654972317784.jpg“하- 그깟 빵. 너야말로 꼬맹이가 준 초콜릿을 받아본 적 있나?”

아가레스가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초콜릿 두 알을 살랑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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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계에서 둘도 없는 권력자라는 아가레스와, 이 제국의 작은 군주 루드비히는 비밀기지의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두고 점점 유치하게 변질된 말싸움을 벌였다. 실상은 비밀기지 문제가 아니라, 비밀기지에서 만날 수 있는 이벨리아 때문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이 비밀기지는 그 어떤 땅보다도 중요했다.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조금 전부터 마치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흐리더니 역시나였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자 가열한 말씨름을 벌이던 둘은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자신들의 입에서 이런 유치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낯설었다. 항상 바른 몸가짐을 강요받던 루드비히의 귓가가 붉어졌다. 늘 누군가를 내려보기만 했던 아가레스의 오만한 시선이 멋쩍은 듯 허공을 향했다. 뽐내듯 흔들던 초콜릿 두 알이 다시 주먹 속으로 말려 들어 갔다. 빵과 초콜릿 자랑이라니. 루드비히가 먼저 비밀기지에서 내려갈 것처럼 몸을 돌렸다. 못마땅히 바라보던 아가레스도 마력을 써 마계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저딴 놈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 마계의 동쪽 영역.

16549723291737.jpg“주군. 오늘 바알 님께서…….”

1654972317784.jpg“시끄럽다. 나가.”

16549723291737.jpg“이건 들으셔야 합니다. 영토와 관련된 이야깁니다, 주군.”

1654972317784.jpg“지금 이 영토보다 더 중요한 땅이 걸렸어. 나가.”

아가레스의 충복, 마르바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보다 더 중요한 땅이라니, 우리 주군께서 드디어 바알을 잡고 중앙 땅을 차지하시려는가. 드디어! 됐다, 그날이 왔다. 모든 마족들이 우리 주군의 앞에 무릎을 꿇을 날이 왔다! 마르바스는 속으로 환호했다. 충복이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러나자 아가레스는 슬그머니 에르카디아 황가의 가계도와 현 귀족들의 세력도를 펼쳤다. 누구 목부터 날려야 삐약대던 작은 병아리를 더 편히 볼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작은 초콜릿 두 알은 여전히 책상 위에 소중히 놓여 있었다. *** 황궁의 중앙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황태자의 방. 루드비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549723291737.jpg“전하. 오늘 저녁 식사는…….”

시종장이 들어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렸으나, 루드비히는 한 손을 저어 식사를 물렸다. 지금까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어 숨기는 것과 쓰고 있던 양피지를 두 손으로 휙 감춘 것은 덤이었다.

16549723291737.jpg“하오나 전하. 식사를 거르시면…….”

16549723177836.jpg“나가라. 바쁜 일이 있으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지금 저녁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 전하께서 정말 중요한 공부를 하고 계시나 보다. 시종장은 더 방해하지 않고 깊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루드비히는 읽고 있던 책을 다시 슬그머니 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책이었다. [친구 관계, 이것만 알면 백전백승!] 제목조차 아주 마음에 든다. 홍옥 색 눈에 찬찬히 내용을 담던 이 제국의 작은 주인은 어느 구절에 이르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옮겨 적고 있던 양피지에는 작은 병아리 친구와 친해질 수 있는 비법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중요한 곳에는 아낌없는 밑줄과 별표가 그려졌다.

16549723177836.jpg‘뭐든지 먹을 거로 유인해라…….’

이것 참 좋은 비법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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