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브 살려!2020.12.10.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꼬맹이?”
“꼬맨이라고 부르지 마.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아가레스가 묻자 이벨리아가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여전히 아주 작고, 여전히 정령 냄새가 나고. 예전 그대론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피식 웃었다. 부스러기만 한 꼬맹이가 가슴팍을 펴고 애써 으스대는 것이 퍽 웃겼다.
“이거 앙 보여?”
이벨리아가 이거 안 보이냐며 흔드는 목검은 검이라기보다 바늘 같았다. 꼬맹이가 저렇게 자그마하니까 칼도 바늘만 하네.
“보여. 보이는데, 너무 못 하길래 네가 마검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줄 알았지.”
예기치 못했던 아가토끼의 등장에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던 이벨리아는 그제야 물줄기를 퍼부으려던 이유를 상기해냈다. 저 토끼가 나보고 못 한다고 했어!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못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지금 것까지 해서 오늘만 무려 세 번째였다.
“씨이…… 웅디네에!”
믿을 것은 물고기 친구뿐. 한 번 더 불러봤지만 운디네는 아가레스가 아닌 이벨리아 쪽으로 뽈뽈뽈 날아오더니 어깨 위에 올라앉아 속삭였다.
[너의 검이자 방패가 될 것을 맹세했지만 저 악마는 나로는 좀 어렵다, 병아리야.]
“물대뽀도 못 싸……?”
피슛 물줄기 뿜는 거 그것도 못해?
[저런 마기와 부딪히면 바로 역(逆)소환될 거야. 사실 아까도 저 악마가 힘만 조금 흘렸으면 바로 역소환 됐을걸. 직전에 멈춰서 다행이었지.]
그렇게 되면 이벨리아가 위험했다. 겨우 네 살짜리 육체는 아무리 하급 정령의 역소환이라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피를 한 움큼은 토하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이는 아가레스도 잘 알고 있는 상식. 그렇기에 조금 전에도 달려드는 운디네를 무심코 마기로 쳐내려다가, 이벨리아의 정령임을 상기해내고 마기를 뺀 손가락 하나로 막은 것이었다.
[저 악마를 상대하려면 우리의 왕께서 오셔야 해.]
운디네가 병아리 계약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속상하여 시무룩하게 말했다. 감히 하급 정령이 상대할 마족이 아니었다. 풍기는 기운을 어림짐작해도 적어도 72 악마, 그중에서도 최상위의 악마임이 분명했다. 이벨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아가토끼가 그렇게 강하다는 말이야? 아가레스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제 알겠어? 아가토끼 같은 호칭은 좀 아닌 거?”
빙글 웃으며 강함을 어필하였으나 이벨리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강한 거고 나발이고 아가토끼고 나발이고, 제법 신기하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크게 상처를 입은 자존심 회복이 우선이다.
“이짜나, 긍데 나 지짜 못해……?”
“검술? 응. 못…….”
응. 못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려고 했으나 바라보는 바다색 눈이 심히 처량했다. 눈꼬리가 추욱 쳐지자 안 그래도 커다란 눈망울에서 바닷물이 흘러나올 것처럼 찰랑댔다.
“……하지는 않지. 못 하는 건 아니야. 그럼. 아니지.”
악마 생 처음이었다. 하던 말을 번복한 것은.
“못하는 거는 아니야……?”
그러나 쳐진 눈꼬리가 되돌아오지를 않았다. 부족했나.
“그 정도면 잘하는 거지. 처음으로 검을 잡아서 그런 거야. 요령만 좀 익히면 돼.”
아가레스가 보다 힘을 주어 말했다. 악마 생 처음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자, 봐봐. 꼬맹아.”
아가레스가 허공에서 손을 한 번 쥐자, 어느새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온통 묵색인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검에서는 일렁이는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와아-.”
멋들어진 검이 난데없이 나타나는 광경을 입 벌리며 바라보는데, 아가레스가 묵색의 검을 한 번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그었다.
“자, 따라 해 봐.”
이벨리아는 눈으로 아가레스의 동작을 쫓으며 다리를 앞뒤로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바늘 같은 목검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그었다. 바라보던 악마의 눈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니지. 실례 좀.”
아가레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굽힌 다음 아이의 무릎에 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잘못 건드리면 어린 인간이 톡 부서질 것 같아 아주 조심스럽게.
“무릎은 굽히면 안 돼. 펴고 다시.”
“옹!”
이벨리아가 무릎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 따악!
“윽…….”
“히익! 미아내!!”
그러게 누가 내 앞에 앉아 있으래!!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검술 못함 정도’를 너무 간과했다. 악마가 앞에 앉아 있으면 검을 내리긋다가도 적정선에서 멈추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머리를 강타한 것을 보아하니 그 당연지사조차 없는 검술 실력이었다. 앞에 있다가는 종일 두드려 맞을 것만 같아, 그가 이벨리아의 뒤로 돌아가 다시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박하 향이 알싸하게 밀려들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향기.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댔다. 아가레스는 그렇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 동안 이벨리아의 자세를 하나하나 고쳐주었다.
“팔은 여기서 멈춰야지. 몸은 정확히 직각으로. 손목은 조금 더 꺾고. 그렇지.”
뒤에서 아이의 두 팔을 잡아 몇 번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리면서도 힘을 주지 않고자 무던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얇고 부드러워서 뭘 잡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나 혼자 해볼래!!”
“그래. 해 봐.”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것도 처음이다. 번복도, 거짓말도, 가르침도. 익숙지 않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리 불쾌하진 않았다. 대가로 이 꼬맹이가 주는 재미면 충분했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이벨리아가 검을 내리긋는 것을 바라보았다. 애써 잡아준 자세는 다시 흔들거렸고, 무릎은 다시 굽혀졌으며, 손의 각도는 다시 비뚤어졌다. 영 답이 없다. 이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재능의 문제인 것 같은데.
“자…… 잘하네.”
그러나 또 거짓말.
“헤헤- 졍말?”
저 눈. 저 눈 때문이다. 차마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못된 말도 할 수가 없다. 바람에 황금빛 머리를 날리며 뒤를 돌아보고서 웃는 모습이 그다지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래. 이제 잘해. 가끔 여기서 가르쳐줄게.”
못하면 좀 어떤가. 만날 때마다 그가 가르쳐주면 되는 것을. 영리한 악마는 앞으로도 종종 이 작은 흥밋거리를 볼 수 있도록 떡밥을 던졌다.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던 이벨리아가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마따, 나 다 아는데. 마독이랑은 친하게 지내지 말랬는데.”
지금까지 헤실대며 잘만 놀아놓고 딴소리를 한다. 도무지 나쁜 악마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지금까지 들어온 말들이 있었다.
“마독은 나쁘고, 썽질도 더럽고, 욕심 많고, 아! 그리고 잉간에게 친절하게 한 다음에 피를 마신다고…….”
당사자 앞에서 신빙성 없는 뜬소문을 줄줄 늘어놓던 이벨리아는 문득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나 알았어. 나 알아냈어. 이 아가토끼가 이 깊은 산 속까지 왜 날 찾아왔는지 알아냈어.
“피를…… 내 피를…….”
어쩐지. 입술이 피를 발라놓은 것처럼 붉더라니. 어쩐지. 마족은 종종 인간의 환심을 사서 홀랑 잡아먹기도 한다더니. 슬쩍 올려다보니 씩- 웃고 있는 표정이 딱 악당처럼 보이기도 했다. 절로 눈치가 보였다. 목소리는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나는…… 맛이…… 없써요…….”
이 마족이 왜 저를 이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왔겠는가. 왜 저에게 친절하게 검술도 가르쳐 주었겠는가. 하녀들에게 들었던 ‘특정 마족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실상 하녀들이 말했던 마족은 ‘몽마(*인간을 홀려 정기를 빨아먹는 마족)’였지만 그것까지 구분하기에는 아직 지식이 부족했다. 카시스 후작이 준 목걸이를 돌려 공작저로 도망을 가려는 심산으로 목 부근을 더듬거렸으나, 하필 목걸이는 검술 수련을 하겠답시고 바닥에 풀어둔 채였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땅 파고 드러누워 흙까지 덮는 이벨리아를 바라보며 또 웃음을 지을뻔한 아가레스는 한 손을 올려 마치 잡아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얼굴을 덮으며 겨우겨우 참아냈다. 아, 역시 찾아오길 잘했다. 조금만 놀려볼까.
“맛있을 것 같은데?”
아가레스가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입술은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은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야. 차깍이야.”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가레스의 표정을 보지 못한 이벨리아는 심각하게 도리도리, 착각이라고 일러주며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아가레스가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섰다. 붉은 입술을 혀로 한 번 훑으며.
“이…… 이거 아니야……?”
수련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먹으려고 무복 주머니에 몰래 숨겨두었던 초콜릿 두 알을 꺼내어, 자그마한 손바닥에 올려놓고 아가레스에게 건네었다. 아마 이 냄새일 거야. 이거 줄게. 이거 먹고 나는 먹지 말아줘. 두 걸음만큼 떨어져 있었던 아가레스가 갑자기 훅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이벨리아의 귓가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흐음, 아닌데. 넌데.”
속삭였다. 아까보다 더욱 진해진 박하 향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솜털이 오소소 일었다. 초콜릿을 쥔 이벨리아의 손이 달달 떨렸다. 이래서 그랬던 거야. 이래서 마족들은 다 믿으면 안 된다고 그랬던 거야. 조금 방심한 것이 이렇게 날름 잡아먹히는 결과를 낳을 줄이야.
“흐앙…….”
목검으로 때릴까. 기사단이 알려준 대로 아르르릉- 위협을 해볼까. 어떻게 하면 살아날까.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너무 심하게 놀렸나 싶어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떨어져.”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울렸다. 다가오는 기척은 이미 느끼고 있었으나 워낙 작은 기운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 이 꼬맹이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자는 아닌 것 같았으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 아가레스가 아직은 저보다 한참 작은 은발 소년의 홍옥 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까칠하군. 어른 공경 안 배웠나?”
아가레스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무심한 눈으로 말했다. 이벨리아에게 닿던 시선과는 전혀 달랐다. 미미한 웃음을 담던 눈은 무감정하게 식었다. 그는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흥미를 느낀 요 병아리 같은 꼬맹이는 제외하고. 은발 소년은 눈에 경계심과 긴장을 가득 담은 채로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 땅 도둑. 누가 잡아가면 좀 곤란해서.”
*** 루드비히는 지난 다섯 달 동안 가끔 괘씸한 땅 도둑을 떠올렸다. 아니, 처음에는 가끔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도 모르게 땅 도둑이 투척하고 간 솔방울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문득문득 생각났다. 탁 트인 들판도, 시원한 바람도, 사심 없이 촐랑대는 아이도, 바다색 눈도, 태양 같은 머리칼도. 비밀기지에 방문하는 시간이 잘 맞지 않아 무려 다섯 달이나 만나지 못하다가, 저 멀리에서 황금빛 머리칼이 반짝이는 것이 보여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무슨 말을 먼저 하지? 잘 지냈나? 아니, 그건 너무 어색해. 저번에 그 악마의 빵과 음료수 함정을 파놓고 간 것을 다그칠까? 아니, 그러다가 다신 안 오면 어떡하지. 잰걸음으로 걸으면서도 영민한 머리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조금 더 가까이 가자 땅 도둑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머리칼이 검은 것은 보아하니 공작도, 아르칸도, 세드릭도 아닌데. 아르티나 기사단 기사 중 한 명인가.’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땅 도둑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눈꼬리는 아래로 추욱 처져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앞으로 뻗은 손은 달달 떨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땅 도둑이 저의 비밀기지에서 웬 위협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아직 내가 갚아줄 게 있는 땅 도둑이라고. 한편 악마는 악마대로 꼬맹이와의 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사라졌으면 싶었다. 유일하게 흥미로운 대상과의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인데. 한편 치열하게 노려보는 고래들 사이에 끼인 작은 새우, 이벨리아는 제 피를 빨아먹으려는 피 도둑 악마와 얼마 전 고추냉이가 가득 든 빵을 먹여서 저에게 복수할 것이 뻔한 식량 도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지를 깨달은 통통한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져 갔다. 어디에 잡히든 큰일이다……! 망했다! 망했어!! 슬금슬금. 피 도둑과 식량 도둑이 서로 말없이 노려보는 와중에 이벨리아가 자그마한 발을 한걸음, 두 걸음 옆으로 옮겨 바닥에 내려 두었던 목걸이를 냉큼 집어 들려던 찰나. 달랑, 이벨리아의 몸이 위로 들렸다.
“흐아?”
무복 뒷덜미를 잡고 마치 토끼를 들어 올리듯 들어 올린 것은 아가레스였다. 거의 동시에, 루드비히는 이벨리아의 목걸이를 옆으로 밀었다.
“어디 가려고.”
“가지 마.”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동시에 말하더니 다시 서로 찌릿 노려보았다.
“히잉…….”
식량 도둑과 피 도둑은 아무래도 저를 순순히 보내줄 용의가 없는 것 같았다. 내 비밀기지가 왜 악당들의 모임 장소가 된 거야! 어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