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토끼네 토끼야2020.12.07.
알렉이 느른하게 팩트로 폭행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돌이 된 듯 굳었다. 우리 아가가, 우리 아기씨가 행여라도 들으셨으면 알렉 너는 오늘 연무장에 피와 살을 묻는 거다. 제발 못 들었어라.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계셨으니 아마 못 들으셨을 거야. 모두가 속으로 간절히 읊으며 이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눈을 반짝이며 검을 휘두르던 이벨리아의 어깨가 순식간에 추욱 늘어졌다. 자그마한 어깨가 내려가자 짧똥한 목검이 땅에 톡 닿았다.
“지금…… 뭐라고 해떠……?”
이벨리아가 알렉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궁금한 것을 묻는다기보다는 방금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바다색 눈은 눈꼬리가 추욱 처져 세상 더 없이 처량해 보였다.
“으아-! 아기씨가 검을 처음 배우시는데도 참 잘 쓰신다고 말했습니다!”
헤롤드가 수습을 위해 알렉의 못된 말 위에 칭찬의 흙을 뿌렸고,
“그래, 우리 아가는 처음인데도 정말 잘 휘두르네! 형님 어릴 적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아!”
세드릭이 한 줌 더 왕창 가져다가 뿌렸으며,
“이 아비 어릴 적보다도 훨씬 나은 것 같구나. 그렇지 않나, 에딘.”
휴고는 토닥토닥 흙을 다졌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기씨 참 잘하신다! 못한다고 말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 다 들어써…….”
그러나 알렉의 못된 말은 덮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연무장이 너무 조용했었다. 분명 처음치고는 잘하는 것 같은데, 한 번 검을 휘둘러서 화병 세 개를 한 번에 깨트린 적도 있는데. 그리고 설령 못한다고 하더라도 꼭 그렇게 대놓고 말을 했어야 속이 시원했냐!! 이벨리아의 통통한 두 볼이 더욱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연습해 오꺼야! 아무도 따라오지 마!! 대쟝의…… 대쟝…… 히잉……!”
요 몇 달간 입에 달고 살았던 대로 ‘대장의 명령이다!’라고 외치려 했는데, 검술 실력이 부정당하니 대장이라고 주장하기도 영 부끄러웠다. 그래서 끝을 얼버무리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목검이 땅에 질질 끌리면서 이벨리아가 뛰어간 길을 따라 연무장 바닥에 긴 흔적을 남겼다. 별것도 아니었다. 못하면 배우면 된다. 재능이 없으면 더욱 노력하면 그만이다. 다만, 스스로 차후 이 제국 최강의 검사가 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믿던 기사에 발등 찍혀 와장창 무너지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방으로 들어가 종이를 한 장 꺼내어 ‘아무라도 추립 긍지’라고 본인만 알아볼 수 있을 수준의 출입 금지문을 삐뚤빼뚤 써서 떡하니 붙여놓고서 카시스 후작이 준 목걸이를 돌렸다.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연무장이 아니라, 참견하는 사람 없이 저 혼자 고요하게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
“밤길 조심하십시오. 알렉 경.”
카론이 이벨리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알렉에게 한 글자씩 짓씹듯이 말했다. 늘 고요하던 눈동자는 오늘 밤이라도 알렉의 암살을 시도할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밤길만 조심한다고 안전할 것은 아니었다. 카론이라면 방 안에서도 밤의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줄 수 있었으니. 아기씨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로 스쳐 지나가신 데다가 카론의 살인예고까지 더해지자 그제야 눈치 없는 자신의 입이 또 멋대로 움직여 사달을 냈구나, 싶은 알렉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큰일 났다……. 큰일 났네……! 한편, 잔뜩 심통이 나서 연무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이벨리아와 그 뒤를 따르는 카론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일제히 알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이 자식…….”
에딘이 이를 꽉 깨물고 알렉을 노려보았다. 단장 에딘은 아르티나 기사단 중 유일하게 신사적인 인물로 아무리 화가 나도 기사들에게 항상 '경'이라는 존칭을 붙여주는 자였다. 에딘이 기사를 ‘이 자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르티나 기사단은 물론이고 휴고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 그만큼 에딘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에 알렉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야, 알레기. 검 들어라. 어디 너는 뭐 얼마나 잘하나 보자.”
헤롤드가 알렉과 쓰레기를 합쳐 ‘알레기’라고 칭하며 알렉의 검 쪽으로 손을 까닥거렸다.
“잠깐, 헤롤드 경. 이브의 일이니 내가 먼저야.”
아르칸이 한 손을 들어 헤롤드의 앞을 막으며 이내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솔직히 못하시기는 했는데…….”
대련을 신청한다며 줄줄이 서 있는 기사들과 아르칸을 바라본 알렉이 처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못하신다고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못하시긴 했잖아……. 물론 내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못하긴! 우리 아가가 뭘 어디를 못하긴 했지! 아니, 뭘 어디를 못해!”
아차, 숨기려던 본심이 섞여 나와버렸다. 알렉을 향해 부정하듯 소리치던 세드릭이 황급히 말실수를 수정했다.
“알렉.”
끝판왕. 휴고가 알렉을 부른 뒤 검지를 까딱하고서 몸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휴고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했으나 넘실대는 살기로 짐작하건대 따라간 알렉이 처참한 몰골로 발견될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휴고가 손속을 봐주지 않고 대련을 한다면, 견딜 수 있는 기사는 아르티나 기사단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으아…….”
알렉이 짧은 침음을 남기고 휴고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끌려간 지 5분가량 지났을까.
- 끄아아악!! 주군!! 으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알렉의 처량한 비명이 대 연무장의 옆쪽, 소 연무장에서 널리 울려 퍼졌다.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업자득이었다. *** 공작저와 마찬가지로 비밀기지에도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고 여기저기 꽃봉오리가 맺혀 알록달록한 풍경이 아름다웠다. 아직은 조금 서늘하다 싶은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무와 풀마저도 여유롭게 바람에 몸을 맡긴 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풍경과 매우 부조화하게도, 이벨리아는 바람도 씹어 삼킬 듯한 표정을 하고 손에는 목검을 야무지게 쥐고서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듕에 바바라. 내가 대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러 줄 꺼야.”
앙다문 입술에서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연습하면 돼! 잘할 수 있어! 아까 에딘의 자세를 두 눈에 똑똑히 담아 두었더랬다. 머릿속으로는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으로 담아둔 것을 곰곰이 곱씹으며 두 손으로 목검 손잡이를 쥐고 머리 위로 높이 올린 다음 내려치기를 십수 번, 슬슬 팔이 아파진다 싶던 찰나였다.
“와, 더럽게 못하네.”
이벨리아의 뒤편에서 바람을 타고 나지막한 평가가 들려왔다. 소리와 함께 알싸한 박하 향도 은은하게 밀려들었다. 넌 죽었다. 식량 도둑.
“웅디네!!”
이벨리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저 악당한테 물을 한 바가지 퍼부어 줘!!
“워어, 역소환 시킬 뻔했잖아. 위험하게.”
비밀기지에 방문할 사람은 저를 제외하고는 식량 도둑 단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던 이벨리아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식량 도둑의 목소리보다는 훨씬 더 저음이며 성인의 목소리에 가까운 것을 알아채고 누구인지 확인하고자 몸을 돌렸다. 검지를 펼쳐 운디네의 머리를 톡 건드리고 있는 자는 묘하게 낯이 익었다. 실상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황금색 눈동자를 담은 눈이 반으로 휘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입술은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나 기억나?”
“토끼!! 아가 토끼!!”
이벨리아가 크게 끄덕이며 외쳤다. 저번에 카시스 후작저에서 봤던 아가 토끼네!
“어? 여기 마족은 못 드러오는데?”
이벨리아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저 아가 토끼는 분명히 악마라고 했었는데. 악마도 마족인데. 아빠가 분명 몬스터나 마족이나 기타 등등 삿된 것들은 못 들어온다고 했었는데.
“마족 아니고 악마. 그리고 나 정도 되면 이런 결계로는 좀 많이 부족하지.”
아가레스가 어림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턱을 치켜올렸다.
“하나 더. 나 정도 되면 아가 토끼로 불리는 건 좀 많이 자존심이 상해. 호칭을 바꿔.”
아가레스가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살랑거리던 검은 머리칼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럼 아가!”
“……다른 건 없어?”
“토끼?”
“……또 다른 건?”
“우웅, 염소?”
이봐 꼬맹이, 자꾸 풀 먹고 사는 애들만 나열하는데, 내가 그런 종족이랑은 거리가 정말 멀어. 진짜야.
“됐다. 그냥 ‘아스’라고 불러.”
다른 마족들이나 인간들에게는 ‘동(東)마계의 지배자’라고 불리나 이 작달막한 꼬맹이한테서까지 그런 어두침침한 예명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성심껏 가르쳐줬건만, 이벨리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기는 내 비민기지야. 너는 그만 나가주면 좋게써. 대체 어떠캐 차자찌?”
네 호칭은 별로 안 궁금하고, 어디를 다스리든 말든, 그러면 다스리는 장소에나 가서 놀지. 이러다가 비밀기지가 정기모임 장소가 되겠네.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대체 이 장소를 어떻게 찾아냈는지가 궁금했다. 한편 아가레스는 실소했다. 너라니. 이 작달막한 꼬맹이가 호칭 정리 제대로 못 하네. 기껏 역소환에 꼬맹이 다칠까 봐 정령에게 힘도 안 쓰게 주의까지 해줬건만.
“정령 냄새는 흔하지 않잖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길에 누군가 궁금해서 올라와 봤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료해서 인간계를 터덜거리며 걷던 아가레스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서 미약한 정령 냄새를 맡았다. 일반 정령사들보다는 조금 강하고, 또 상급 정령사라고 보기에는 약한 어중간한 냄새.
‘그때 그 꼬맹인가 본데.’
안 그래도 이전에 저를 위협한답시고 땅강아지 같은 아르르르릉- 소리를 내었던 꼬맹이가 종종 생각나던 참이었다. 그런 하찮은 위협은 처음 보아서. 그리고 마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톱까지 바짝 치켜세우는 것이 퍽 재미있어서. 별 감정은 없었지만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었다. 흥밋거리가 없으면 당장 내일 소멸해버리고 싶은 생이기에, 아가레스는 재미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날 후작저 뒤편에서 폐부 깊이 밀어 넣은 웃음은 제법 중독성이 있었다. 다시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을 정도로. 기대를 안고 향한 곳에는 전에 보았던 꼬맹이가 아주 엉망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팔을 그대로 위로 들었다가 내리면 되는 간단한 건데, 대체 왜 팔이 올라가면 다리도 쭈욱 펴졌다가 팔이 내려오면 다리도 같이 구부려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내리치는 방향도 직선이 아니라 사선이었다. 삐뚤빼뚤한 사선. ……저렇게 엉망인 검술은 처음 보는데. 멋진 무복을 갖춰 입은 이벨리아의 결연한 표정과 엉망인 검술이 지나치게 상극이었다. 수려한 입매에는 또 진한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다가 문득 아가레스는 적어도 자신이 저 꼬맹이를 눈에 담고 있을 때는 무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전에 꼬맹이를 본 이후 늘 그렇듯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금 흥미로 가득 차올랐다. 그가 이벨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린아이에게 건네는 말투로는 어떤 것이 적절하더라.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