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모두를 놀라게 한 병아리의 검술 실력2020.12.03.
제법 혹독한 겨울이었다. 폭설이 내려 정원 출입을 금지당한 이벨리아는 응접실 벽난로 앞에 앉아서 마치 무사들이 경건하게 검을 닦듯이 휴지로 쓱싹쓱싹 목검을 닦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아직 본격적으로 검술 훈련에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이벨리아의 마음만큼은 이미 천하대장군과 다름없었다.
“아기씨, 쓰지도 않으신 검은 왜 닦으십니까?”
이벨리아의 곁에 시립한 카론이 물었으나,
“어허! 대쟝님!”
호칭이 틀려 대장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대……대장님…….”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모시는 아기씨를 대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한데?
[그냥 정령술을 배우라니까? 병아리가 꽃길을 두고 굳이 칼침 밭길을 가려고 하네?]
“어허! 웅디네 너도 대쟝님!”
운디네도 예외는 없었다. 아니, 모시는 왕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시는데 내가 이 뽀시래기한테 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해?
[니예니예~ 대댱님~]
운디네는 이 계약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정령도 비꼴 수 있는지를. 자연 그 자체인 정령들에게 한숨도, 비꼼도 알려주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계약자였다. 당장이라도 훈련을 시작하고 싶어 몸이 단 이벨리아가 동동거리며 발을 굴러도, 휴고는 봄이 올 때까지는 검술 훈련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 추운 겨울에 훈련한다고 나갔다가는 아직 면역력도 체력도 개미 눈곱만한 이벨리아는 감기에 걸려 드러눕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고는 이벨리아를 너무 얕봤다. 검술이라면 어릴 적부터 훈련을 틈틈이 봐서 눈대중으로 대충은 알고 있는 이벨리아는, 제 키만 한 목검을 질질 끌고 2층 회랑으로 올라갔다. 혹시 사람이 지나다니면 다칠 수도 있으니 하인들과 하녀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것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 다음 검 잘 쓴다고 칭찬해 줄 물고기 친구, 운디네를 불렀다.
“웅디네!”
[이번엔 뭔데?]
계약자는 늘 사고 치는 것에 저를 끼워 팔아먹었다. 이제 계약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반갑기보다는 불안했다. 왜, 또 뭔데, 또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데!
“바바아!”
[뭐……뭘 봐? 설마 여기서 휘두를 건 아니지?!]
응 맞아. 얼마나 잘하는지 봐달라고 부른 건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똥그랗게 눈을 뜨고 갸웃거리는 계약자를 본 운디네가 이 병아리가 집 다 부수게 생겼다고 엘리시아에게 날아가려던 찰나. - 쨍그랑! - 쨍그랑!! 빠르기도 하지. 계약자는 단 한 번 검을 휘둘러 화병 몇 개를 장렬히 깨트리고 말았다.
“한 번 휘둘렀는데 왜 세 개나 깨져찌……? 혹시 나 천잰가?”
이벨리아가 목검을 쥔 제 손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운디네는 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정령도 골이 아프다. 커다란 파열음에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손에 목검을 들고 혀를 빼꼼 내밀고 있는 현행범. 이내 다급히 달려오는 엘리시아의 발소리가 들리자 이벨리아는 회랑에 놓인 갑옷 속으로 낑낑대며 숨어들다가 뒷덜미를 잡히고야 말았다. 딸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고 다친 곳 없는 것을 확인하자 우아한 손이 이벨리아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이브, 너!!”
“흐아, 잘못해떠요! 엄마! 아야!”
천재고 나발이고 위험하게도 커다란 꽃병을 세 개나 깨트리는 바람에 엘리시아에게 단단히 혼난 이벨리아는 목검을 압수당하고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시무룩하게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이벨리아가 따뜻한 공작저 안에서 기사단과 죄 없는 운디네를 데리고 대장 놀이를 하는 동안, 정원에 가득 쌓여 있던 눈이 조금씩 녹아 땅이 드러났다. 온통 하얬던 세상이 조금씩 갈색빛으로 바뀌더니 이내 초록색 새싹이 오밀조밀 고개를 내밀었다. 검술 훈련이 예정된 첫날. 비비안은 이벨리아에게 작은 여아용 무복(武服)을 입혀주었다. 가문 특유의 무복은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굵은 허리끈이 둘러져 있었고, 황금색 실로 아르티나 가문의 상징인 황금색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기사단의 가슴팍에서는 진정 승천하는 용과 같이 위엄을 뽐내던 가문의 상징은 조그마한 이벨리아의 가슴팍에 달리자 미꾸라지처럼 쪼그라들었다. 항상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나풀나풀 돌아다니다가 무복을 입고 머리를 위로 높게 묶자 왠지 제가 한층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조아써, 맘에 드러!! 고마어 비비안!!”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 아주 흡족하게 웃은 이벨리아는 이내 자신만만하게 목검을 들고 방을 뛰쳐나갔다. 자, 대륙 최강의 검사가 될 이벨리아 나가신다!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 내려가 연무장으로 달려가니 에딘은 이미 연무장에서 이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에딘뿐이겠는가. 우리 아가가, 또 우리 아기씨가 이 힘든 검술을 잘 배워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인 휴고, 엘리시아, 아르칸, 세드릭,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 모두 연무장에 복작복작 몰려 있었다.
“앗, 늦어서 뎨동합니다, 스승님.”
불과 어제저녁만 해도 에딘의 앞에서 ‘나를 따르라!’ 외쳐댔던 이벨리아는 막상 검술 훈련에 돌입하자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적어도 연무장에서만큼은 아기씨와 가신의 관계가 아니라, 제자와 스승님의 관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일찍 나온 것이니까요.”
에딘이 흐뭇하게 웃으며 예의를 차리는 이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자라셨나, 우리 아기씨. 나비 같은 드레스가 아니라 무복을 갖추어 입고 야무지게 목검을 쥔 채 스승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을 본 군중들은 심장 한편이 아려왔다. 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으면서도 또 예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는 상반된 감정이 어느 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맞섰다.
“자, 아기씨.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에딘이 검술의 가장 기초를 이벨리아에게 물었다. 체력이지. 체력과 정신력. 모든 기사단이 속으로 읊었다. 아기씨, 체력하고 정신력이에요!
“거엄!”
……거엄. 틀린 말은 아니지. 검이 있어야 검술을 하니까. 우리 아기씨 똑똑하시네!
“거엄……도 중요하지만 검을 들 수 있는 체력,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검을 놓지 않는 정신력이 중요합니다.”
예상치 못한 해맑은 대답에 순간 당황한 에딘이 정답을 일러주자,
“옹. 체녁, 정신녁.”
이벨리아가 알았다는 듯이 끄덕거리며 한 번 따라 읊었다.
“자, 목검은 내려두십시오.”
검을 배울 건데 왜 목검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이벨리아가 갸웃대며 목검을 살포시 내려두었다.
“뛰십시오. 아기씨 뒤에서 아기씨를 잡아먹으려는 숲 괴물이 달려온다고 생각하십시오.”
“뛰……뛰어? 숲 괴물?”
“숲 괴물 옵니다! 첫날이니 세 바퀴!!”
네 살인 이벨리아의 눈높이에 맞춘 에딘의 구령에, 이벨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면서도 착실히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안에서 두 팀 나눠 축구를 하고도 남을 법한 넓은 연무장을 아직 조그마한 이벨리아가 세 바퀴나 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딘 역시 이벨리아가 진짜로 세 바퀴를 다 돌기를 바라면서 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의욕, 의지, 기초 체력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높이 묶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토끼처럼 가볍게 깡충깡충 뛰어간 이벨리아가 연무장 한 바퀴를 돌아왔을 때. 출발할 때의 상큼한 모습과는 달리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숨소리는 헥헥- 거칠어져 있었다. 두 바퀴째. 오동통한 볼은 콕 누르면 터질 것처럼 빨갰고 입에서는 연신 히잉- 흐이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그만. 잘하셨습니다.”
두 바퀴면 충분하다. 기대보다 체력도 좋으시고 또 의지도 강하시다. 에딘이 이쯤이면 되었다며 이벨리아를 말렸다. 처음으로 연무장 두 바퀴나 되는 장거리를 뜀박질한 여동생이 기특하여 아르칸과 세드릭도 각자 물과 손수건을 들고 걸어왔다. 그런데,
“세 바퀴라며.”
단호하게 말한 이벨리아가 다시 연무장을 돌기 시작했다. 몹시 의외였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애초에 왜 두 바퀴가 아니라 세 바퀴를 말한 건지 에딘이 괘씸하기도 했다. 기사단과 아르칸, 세드릭, 심지어 휴고마저도 에딘을 노려보았다. 두 바퀴면 됐지. 애초에 두 바퀴라고 하지. 저 쿠키 부스러기 같은 우리 아가한테 두 바퀴면 충분하지. 내일 대련 원픽은 단장님이다! 가족들과 기사단이 에딘을 사납게 노려보아 에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를 무렵. 이벨리아는 끝끝내 세 바퀴를 완주하고 돌아왔다. 힘들다는 투정 한번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도 ‘봐, 나 잘하지?’뽐내는 듯 당당하고 거만하게 웃는 입매가 도련님들과 참 닮았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아기씨. 그러면 목검을 들어보실까요?”
에딘이 웃는 이벨리아와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마주 웃으며 진심으로 칭찬을 건넸다. 이벨리아가 목검을 집어 들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큰오라버니가 왜 훈련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폐부를 뚫는 알싸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땀이 마르면서 느껴지는 시원함도 상쾌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왠지 모를 고양감을 주었다.
“검술은 점과 선입니다. 찌르는 것과 베는 것이 전부이지요. 가장 기본적인 것, 아래로 내려 베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열 번, 따라 해보십시오.”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시연. 에딘이 간단한 설명을 건네고 검을 아래로 내려 베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던 이벨리아도 에딘의 검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저의 목검을 두 손으로 꼬옥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 그리고 모든 기사들이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제국 제일의 무가(武家), 아르티나의 핏줄이니만큼 아르칸과 세드릭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배웠다.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진 아르칸은 이제 웬만한 기사들과 대련해도 밀리지 않았다. 재능은 있으나 노력은 부족한 세드릭의 검술은 대신 센스가 빛을 발했다. 상대방의 검술에 맞추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드릭의 검술은 그 누구도 꿰뚫어 보기 쉽지 않았다. 그런 가문의 막내시다. 아기씨의 실력은 또 오죽하실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벨리아가 에딘이 요구한 열 번을 채우기 위해서 입술을 앙다물고 검을 내리쳤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기사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세상에…….”
헤롤드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우리 아가.”
아르칸과 세드릭의 동공도 크게 확장되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휴고도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쩜 좋아…….”
엘리시아마저도 고운 손으로 입을 막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에딘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벨리아가 검을 휘두르는 소리 이외에는 연무장에 그 어떤 소리도 스치지 않았다.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어디 가서 아르티나 가문이라고 주장했다가는 귀족 사칭죄로 연행될 솜씨였다.
“……나 저렇게 못하는 사람 처음 봐. 우리 아기씨 진짜 못하셔.”
모두가 침묵할 때 사실을 말하는 용기. 알렉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