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를 아기씨라고 부르지 마! 대쟝님이라고 부르도록!2020.11.30.
저녁을 다 먹은 뒤, 이벨리아는 응접실로 마시멜로 그릇을 가지고 나와 폭신한 의자에 앉았다. 아르칸과 세드릭, 아르티나 기사단이 줄줄이 응접실로 쫓아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벨리아는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악당이 비밀기지를 침범했다고. 앞으로 꼬박꼬박 식량을 갖다 바치라고 요구했다고. 네놈이라고 불렀다고 막 노려보았다고. 그리고 솔방울을 던지고 도망 왔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보면 내 엉덩이를 걷어찰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랬다가는 오두막과 비밀기지에 출입 금지 명령이 떨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니 재수는 없어도 해를 가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커서 검술도 배우고 정령술도 배워서 통쾌하게 날려줘야지. 이벨리아가 아르칸을 바라보며 남들이 보기엔 뜬금없는 각오를 읊었다.
“오라버니, 나능 강해지꺼야.”
선포하는 여동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아르칸이 그래, 그래, 답했다.
*** 다음 날 아침, 이벨리아는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 기웃거렸다. 요리사 아저씨 바쁜가?
“아기씨? 배가 고프셔요?”
커다란 덩치의 요리장, 세토가 인자한 웃음을 짓고 물었다.
“아아니, 그…… 세또 바빠?”
바쁜 아침 시간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자신도 민망하여 이벨리아가 슬며시 눈치를 봤다.
“으허헛- 아닙니다, 아기씨! 아기씨의 일이 저에게는 가장 바쁘지요!”
마치 곰과도 같은 우렁찬 웃음소리를 내면서 세토가 대답했다.
“저어기, 그러면 빠앙 꿉는 방죽 좀 부타캐……! 안에는 내가 너으께!”
반죽만 드리면 아기씨께서 속을 채워 넣으시겠다니. 주방이든 방이든 엉망이 될 것이 뻔했으나 아기씨가 바라신다는데 그깟 뒷일쯤 중요치 않았다. 세토가 빵 반죽을 만드는 사이 이벨리아는 작은 몸집을 십분 활용하여 살금살금 식자재 창고로 향했다. 여기저기 사부작거리며 뒤적이다가 마침내 고추냉이, 간장, 겨자 등을 발견하고서는 마치 악당처럼 흐흐 웃으며 이것들을 곰돌이 가방에 꼭꼭 숨겼다.
“웅디네!”
[……그 불길한 가방 안엔 뭐가 들은 걸까, 우리 병아리?]
“쉬잇! 이거 방에 좀 가따 놔 줘. 아주 소듕한 자료야.”
[자료가 아니라 재료겠지. 또 사고치는 거 아니지?]
“재료. 재료야. 사고 안 해!”
[어휴……. 방에 놓고 올 테니까 ‘재료’ 다섯 번 읊고 있어.]
운디네는 요즘 이벨리아의 단어 선생님까지 겸하고 있었다. 진정 극한 직업이 따로 없다. 이벨리아는 ‘재료’를 다섯 번 읊으며 세토가 만들어 놓은 반죽을 방으로 가져가고자 슬며시 손을 뻗었다.
“아기씨? 여기서 만드시지 않고요?”
의아하다는 듯이 세토가 물었으나, 이벨리아에게는 반드시 방에서 빵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아니야아. 여기는 세또도 요리사들도 바쁘니까. 방에서 만드러오께!!”
작은 병아리의 계획은 치밀했다. 이 많은 반죽이 죄다 사라지면 세토가 이상하게 볼 테니까, 빵 몇 개는 정상적으로 구워서 세토도 주고, 아빠랑 엄마, 오라버니들도 줘야지. 그리하여 작은 손으로 조물조물. 반죽을 동그랗게 빚은 다음 가운데를 꼭꼭 눌러서 홈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고추냉이를 가득가득 채워 놓은 빵 다섯 개, 겨자를 빵빵하게 채워 넣은 빵 다섯 개, 간장으로 흠뻑 적신 빵 다섯 개. 이것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일반 빵인 것처럼 만들고, 나머지 열 개는 가족들에게 줄 정상적인 빵을 만들었다.
“대따!!”
악마의 빵 주제에 동글동글 예쁘게도 빚었다. 빵을 다 빚은 후, 운디네에게 부탁하여 운디네가 손수 따온 생레몬을 쭉쭉 짜내어 빈 유리병에 담았다. 비밀기지에서 식량을 훔쳐 간 소년에게 복수하겠답시고 온갖 해괴한 빵과 도저히 먹지 못할 주스를 만드는 어린 계약자를 바라보던 운디네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운디네는 이 계약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정령도 한숨을 쉬는지를.
[저기…… 병아리야. 우리 그보다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해보는 게 어떨까?]
“지긍 하고 이써! 도둑에게 피눙물을!! 피의 철사를!!”
[철사가 아니라 철퇴.]
“철태를!”
도둑에게 피눈물을, 피의 철퇴를. 저런 말은 대체 어디서 주워들어 오는지 모르겠다. 운디네의 잔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이벨리아는 다 빚어진 반죽들을 판에 올려 조심조심 가지고 내려갔다.
“세또, 여기 이거 꾸워줄래?”
“아이고, 아기씨 머리처럼 예쁘게도 빚으셨군요!”
주변을 휘돌던 운디네가 그 말을 듣고 키득거렸다. 그러게. 우리 병아리 머릿속에도 생산적인 일보다는 고추냉이 같은 것만 가득 들었나 봐. 이벨리아는 빵이 구워지는 동안 오븐 앞을 서성거렸다. 자, 감쪽같이 구워져라, 악마의 빵아! 한 30분가량 지났을 무렵, 세토가 빵틀을 꺼내주었다. 뜨거우니 만지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세토에게 알았다고 끄덕이고서 가족들에게 줄 빵과 식량 도둑에게 줄 빵을 구별하려고 하는데,
“……어떠카지……?”
모르겠다. 대체 뭐가 고추냉이가 든 빵인지, 뭐가 정상적으로 구운 빵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빵의 위치로 대략은 알겠는데, 한두 개 정도가 헷갈렸다. 빵들은 모두 알맞게 구워져 노릇노릇한 자태를 뽐내면서 내가 바로 먹어도 안전한 빵이라고 우겨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또록또록 굴리던 이벨리아는 일단 확실한 빵들은 나누어 담고, 남은 네 개의 빵을 곰곰이 노려보았다. 저 중 두 개는 확실히 악마의 빵인데……. 킁킁 냄새를 맡아보아도 구별해낼 수가 없었다.
“웅디네, 어디에 매웅 게 들었지……?”
[……까먹었어?]
운디네가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맛있는 빵들은 모두 휴고와 엘리시아, 그리고 요리장 세토에게로 돌아가고 애매한 빵 두 개는 결국 세드릭과 아르칸의 차지였다. 여동생이 처음으로 구운 빵이라면서 건네주니 감동에 가득 차서 한입 가득 베어 문 두 형제는 다행히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오라버니들에게 준 빵이 제대로 구운 빵인가 봐! 환하게 마주 웃어주고서 바구니를 들고 팔딱팔딱 뛰어 올라가는 이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형제는 급하게 물을 찾았다.
“커헉…….”
“물……!!”
“이게 뭐야? 아가가 우리한테 화가 난 게 있나……?”
빵 속에 잔뜩 들은 것이 초록빛을 띤 고추냉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형제는 여동생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지 종일 되짚었다. *** 오라버니들의 미각을 마비시켜놓고서 신나게 방으로 올라와 목걸이를 돌린 이벨리아는 식량 도둑이 오는지 안 오는지 운디네에게 망을 좀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악마의 빵들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곰돌이 가방에서 레몬을 짜내어 만든 주스도 꺼내어 함께 놓았다. 먹을 것으로 장난친 것을 들킨다면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팡팡 맞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날의 수모를 갚아주지 않고서는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았다. 식량 도둑이 고추냉이가 가득 든 빵을 먹고 너무 매워서 옆에 놓은 레몬주스를 마시고, 이번엔 너무 셔서 팔짝팔짝 뛸 것을 생각하니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보기에는 멀쩡한 빵과 주스처럼 보이는 것들을 보며 키득거린 이벨리아는 식량 도둑이 오기 전에 황급히 다시 공작저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오늘 하루도 고된 일정을 마친 루드비히가 비밀기지로 걸음 했다. 최근 들어 매일 밤손님이 들었다. 대부분 기사들이 처리한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음은 물론이다. 며칠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뻑뻑한 눈 주변을 누르며 오두막의 문을 열어보니 갓 구운 듯 보이는 빵이 화려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빵의 따뜻함을 느끼자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조금 전에 왔다 간 것 같은데……. 무심코 빵을 하나 집어 든 루드비히는 한 입 크게 베어 물고서 이내 신음을 내뱉었다.
“윽…….”
매워……! 코가 알싸하고 머리가 띵한 고추냉이 맛에 황급히 옆에 있던 주스를 집어들은 루드비히는 시원해 보이는 주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가. - 푸웃! 너무 떫고 셔서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이 땅 도둑이 진짜……!!”
두뇌 싸움, 전략싸움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이리 치졸한 뽀시래기 싸움은 그의 일생에 처음이었다. 반 토막만 한 땅 도둑의 함정에 홀랑 속아버린 그는 분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예쁘게 빚어진 빵 하나하나를 가를 때마다 간장, 겨자, 고추냉이가 튀어나왔다. 정상적인 빵 두 개는 아무래도 실수로 넣어둔 것 같았다. 저를 골리겠답시고 이 빵들을 하나하나 빚었을 땅 도둑의 정성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공녀님은 제법 승부욕이 강하신가 보다.
“만나기만 해봐라.”
그러나 병아리만 한 아이를 상대로 뭘 하자니 또 꼴이 우습다. 그렇게 루드비히가 악마의 빵과 주스를 먹고서 딱 이벨리아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을 무렵. 아침부터 열심히 빵을 빚은 이벨리아는 살랑살랑 바람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곰치를 껴안고 편안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골탕을 먹인 것이 못내 속 시원한지 입맛을 다시는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슬슬 찬 바람이 불어오는 날씨. 이벨리아는 요 며칠 내내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과 아르티나 기사단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검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거엄-! 거엄-! 나도!”
“아기씨는 아직 어리셔서 안 되십니다. 조금만 더 크면 가르쳐드리지요.”
나도 아르티나 가문인데. 무려 검으로 제국에 위명이 높은 그 가문의 공녀인데. 검을 다루지 못해서야 쓰겠는가. 거기다가 오라버니들과 기사단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우리 아가, 한 10살이 되면 배우자. 응?”
“오라버니는 아주 아기일 때부터 배워쓰면서!”
그 말대로 아르칸과 세드릭은 이벨리아보다 훨씬 어릴 때 검을 잡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숟가락보다 검을 잡는 것이 더 능숙했달까. 오라버니들은 다 하는데 저만 못하는 것이 못내 속상한 이벨리아는 한 달 동안 공작저를 짹짹거리며 돌아다녔다. 거엄-! 거엄-! 심지어 세 살의 마지막으로 외친 말 역시 ‘거엄!’이었으니, 배우고픈 열망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렇게 새해. 올해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공작저에서 포근한 신년제를 보낸 이벨리아가 저녁으로 거하게 고기를 먹고 볼록 솟은 배를 통통 두드릴 무렵이었다. 휴고가 화려한 포장지로 감싼 기다란 무언가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벽난로 앞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이벨리아가 벌떡 일어나 눈을 빛냈다. 저 긴 것은 설마……?
“풀어 보거라, 아가.”
휴고가 기다란 것을 건네며 씨익 웃자, 이벨리아는 포장지를 아기 살쾡이처럼 쭉쭉 찢어냈다. 포장지 속으로 보이는 것은 이벨리아의 키에 맞추어 조금은 짧똥한 목검이었다.
“으왕!! 검이다!!”
비록 목검이었으나 이벨리아가 생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신의 검이었다. 그 어떤 새해 선물보다도 바라고 바라던 것을 선물해 준 아빠가 너무나 고마워 이벨리아가 휴고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아빠!!”
“검은 늘 조심히 다뤄야 한다.”
휴고가 저에게 달랑 매달린 이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린 딸이 검을 잡는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었건만, 이번에도 휴고의 고집을 꺾은 것은 엘리시아였다.
‘이브는 몸을 지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익혀야 해요. 훗날 이브를 잃고 후회하지 말아요, 우리.’
그 말은 휴고에게 차가운 현실을 일깨웠다. 그의 딸은 보통의 영애가 아니었다. 언제 위협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아르티나의 공녀였다. 이왕 가르치는 검, 제대로 가르치기로 이미 엘리시아와 합의한 상황. 휴고는 기사단을 눈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벨리아에게 검술을 가르칠 스승은,”
아르티나 기사단 모두의 눈이 번쩍거렸다. 호위 기사 자리는 놓쳤으나 검술 스승의 자리는 놓칠 수 없다!
“저요, 주군!! 저요!!”
“이 자식 옆으로 좀 비켜!! 내가 가리잖아!!”
눈에 들고자 티격태격하는 기사들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휴고가 단호하게 지명했다.
“에딘.”
번쩍이던 기사단의 눈들이 피시식 꺼졌다. 다른 놈이라면 결투를 신청해서 아기씨의 검술 스승 자리를 빼앗아오기라도 하겠는데, 무려 단장님이시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 불리는. 공자님들의 검술 스승도 단장님이 맡고 계시니, 아기씨의 검술 스승도 단장님이 맡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은 에딘이 자기 키만 한 목검을 들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아기씨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기씨는 영민하시니 아무래도 수월하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 이제 나를 아기씨라고 부르지 마! 대쟝님이라고 부르도록!!”
병아리 아기씨는 진검도 아닌 목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서 마치 주군의 말투와 표정을 흉내 내며 폭주하고 있었다. 에딘은 생각을 정정했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