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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비밀기지에 도둑이야! (17/323)

17화. 비밀기지에 도둑이야!2020.11.26.

도둑을 잡겠다고 결심한 다음날. 이벨리아는 아침 댓바람부터 주방으로 내려가 요리사들에게 아주 맛있는 쿠키를 종류별로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가장 색깔이 예쁜 오렌지주스 두 병을 꺼내어 곰돌이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작은 곰돌이 가방에 주스 두 병이 들어가자 갸름하게 귀여웠던 곰돌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16549721681219.jpg“아기씨, 이걸 전부 드실 건가요?”

초콜릿 맛, 바닐라 맛, 아몬드 맛까지. 다양한 맛의 쿠키를 병아리 모양으로 구운 요리사들이 바구니 한가득 쿠키를 담으며 물었다. 아기씨라면 다 드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16549721681225.jpg“아아니- 더치야.”

다양한 종류의 쿠키들과 색깔이 가장 예쁜 오렌지주스는 바로 덫이었다. 몰래 이벨리아의 비밀기지에 왔다가 소중히 모아둔 식량만 쏙 빼먹고 도망친 식량 도둑을 잡으려는 덫.

16549721681219.jpg“더치요?”

16549721681225.jpg“옹. 덫!”

엉성한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반문한 요리사들에게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며, 이벨리아는 빵빵한 곰돌이 가방을 메고 쿠키 바구니를 두 손에 들었다. 좋았어, 이걸로 도둑을 살살 유인한 다음에 확 덮치는 거야! 방에서 목걸이를 돌려 비밀기지로 이동한 이벨리아는, 비밀기지의 오두막 밖에서부터 오두막 문 앞까지 길을 따라 쿠키를 졸졸졸 놓았다. 그리고 오두막 안에 들어가 쿠키 바구니를 통째로 놓고, 그 옆에 먹음직스러운 오렌지주스도 올려두었다. 자, 어디 훔치러 와 봐라!

16549721681225.jpg“…….”

그런데 그 전에 쿠키 몇 개만 집어먹을까……?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홀랑 걸려들고만 이벨리아는 먹을까, 말까, 손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쿠키 바구니에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한두 개 먹는다고 해서 미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진 않을 거야. 도둑은 분명히 쿠키 바구니랑 주스를 훔치러 올 테니까. 딱 한 개만 먹어야지! 아니, 딱 두 개만 먹어야지!! 다짐이 무색하게도, 이제야 좀 쿠키다운 쿠키를 먹은 것 같아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탈탈 털어낼 때쯤, 쿠키 바구니는 군데군데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16549721681225.jpg“……사실은 내가 도둑잉가……?”

얼마 남지 않은 쿠키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다가, 더는 쿠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천을 살포시 덮어두었다. 덫으로 쓰려고 가져온 주스 두 병 중 한 병도 냉큼 집어든 이벨리아는, 남는 한 손으로 돗자리를 질질 끌고 근처의 풀숲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호랑이처럼 지켜보고 있다가 도둑이 나타나면 단번에 잡는 거야! 그러나 쿠키와 주스로 가득 찬 배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은 잠들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작은 고개는 금세 까닥까닥 흔들렸고, 매처럼 번뜩이던 눈은 어느 순간 동태처럼 몽롱해졌다. ***

16549721681225.jpg“흐아? 졸아따!!”

졸기는 무슨.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꿀잠을 자고 일어난 이벨리아는 화들짝 놀라 오두막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설마 도둑이 벌써 다녀가지는 않았겠지 애써 위안하며. 쿠키 바구니를 살포시 덮어둔 천이 그대로인 것을 보아하니 아직 안 다녀갔나 보다. 이벨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그 옆에 고이 놓아둔 오렌지주스 병에는 공기만이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을 흐엑- 들이마시고 황급히 테이블로 달려가 쿠키 바구니를 덮어 두었던 천을 휙, 걷어내니 안에는 다 먹고 남은 쿠키 부스러기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16549721681225.jpg“이씨잉…….”

눈앞에서 도둑을 놓쳐 또다시 식량을 도둑맞고만 이벨리아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16549721681225.jpg“지짜아…… 지짜 나빠따!! 잡아서 궁둥이를 차버릴 거야!!”

두 손을 꼬옥 주먹 쥐고 빽- 외치는데.

1654972168126.jpg“누구, 나?”

오독, 오독. 무언가를 씹는 소리와 함께 물음이 들려왔다.

16549721681225.jpg“흐아!!”

화들짝 놀란 이벨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이 시릴 듯한 은발이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았다. 도둑 얼굴을 제대로 익혀둬야지 싶어 눈을 마주치자, 홍옥처럼 붉게 빛나는 눈이 제법 신비로웠다. 이벨리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은 절경이다 싶을 만큼 아름다웠고, 소년의 무심한 표정은 마치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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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2168126.jpg“뭘 봐?”

그리고 그 그림은 재수 없었다.

1654972168126.jpg“이 쿠키 맛있네.”

게다가 덫으로 놓아둔 쿠키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16549721681225.jpg“이…… 도둑이 너구나!!”

1654972168126.jpg“아니, 도둑은 너지.”

소년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16549721681225.jpg“내 쿠키도 주스도 다아 머겄으면서?!”

1654972168126.jpg“너는 내 땅에 무단으로 집을 지어놓았으면서?”

16549721681225.jpg“이게 왜 네 땅…….”

이벨리아가 소년을 ‘네’라고 칭하자마자 소년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소년의 키, 분위기 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작은오라버니인 세드릭보다는 어려 보이긴 했으나, 적어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기는 했다. 이벨리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호칭을 변경했다.

16549721681225.jpg“네놈…….”

쓰읍-.

16549721681225.jpg“짜네……?”

1654972168126.jpg“……”

16549721681225.jpg“끄대……?”

소년이 하,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1654972168126.jpg“마음대로 불러, 그냥.”

16549721681225.jpg“그래, 그럼 네놈! 이 땅이 왜 때문에 네놈 땅이야?”

경고도 주었으니 최소한 자네와 그대 중 골라서 부를 줄 알았건만. 순식간에 ‘네놈’이 되어버린 소년이 실소했다.

1654972168126.jpg“원래 내가 비밀기지로 쓰고 있었어. 잠깐 일이 있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니 누가 멋대로 침입해서 오두막집을 지어놓았더라고? 내 비밀기지에?”

16549721681225.jpg“머……먼저 챠지한 사람이 잉자지!”

소년이 먼저 쓰고 있던 비밀기지라는 말에 속으로는 풀이 죽고 기도 죽고 삐질 식은땀도 흘렀지만 질 수 없었다. 어떻게 만든 비밀기지인데!

1654972168126.jpg“내가 먼저 썼다는 증거가 있으면 되는 건가?”

소년이 이 유치한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과 말투만으로는 마치 국가 간의 영토 협상을 하는 중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16549721681225.jpg“옹! 나능 집도 지어놓고 싱량도 이러캐 많이 가따놨잖아!”

봐, 넌 나처럼 집도 없고 식량도 없지? 집과 식량의 존재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은 이벨리아가 가슴팍을 쭈욱 펴며 대답했다.

1654972168126.jpg“따라와 봐, 땅 도둑”

소년은 오두막집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에서 삽을 꺼내 오더니 땅을 얕게 파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삽질에 이벨리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16549721681225.jpg“나 무더버리려고……?”

묻긴 뭘 묻어, 저 병아리가. 소년이 아래를 턱짓했다.

1654972168126.jpg“소중한 것들을 담아 놓은 상자야. 나한테 안전한 장소는 이곳 하나뿐이지. 어때, 내가 너보다 먼저 비밀기지로 사용했다는 걸 믿겠어?”

자그마한 머리를 아무리 굴리고 굴려봤자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1654972168126.jpg“자, 이제 땅 도둑을 어쩔까? 엉덩이를 확 걷어차 버릴까?”

불과 10분 전만 해도 도둑을 잡아서 엉덩이를 확 걷어차 줄 거라고 큰소리를 빵빵 쳤는데. 오히려 저가 엉덩이를 걷어차이게 생기자 아주 당혹스러웠다. 분명 이 사람이 도둑인데……. 내 쿠키도 주스도 다 먹었는데……. 왜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여야 해?

16549721681225.jpg“쿠키 더 머글래……?”

쿠키로 꼬여내 봐야겠다.

1654972168126.jpg“땅을 훔쳐놓고 쿠키로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땅 도둑?”

안 통한다. 똑똑한 자식.

16549721681225.jpg“조아, 그러면 가치 써! 대신 나도 오두막집 쓰게 해주께!”

1654972168126.jpg“흠, 조금 모자란데……. 앞으로도 쿠키랑 주스, 빵 가져다 놔. 그러면 같이 쓰게 해 주지.”

날강도도 저런 날강도가 없었다.

16549721681225.jpg“씨이.”

1654972168126.jpg“씨이?”

이벨리아가 소심하게 반항했으나, 소년이 반문하면서 눈썹을 슬쩍 올리자,

16549721681225.jpg“씨이……도 심어 노으까?”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나는 저놈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 절대로 아니야! 비밀기지를 지키려는 노력이지! 소년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더니 이내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땅을 바라보며 신발 앞쪽으로 땅을 쿡쿡 쑤시고 있던 이벨리아가 웃음소리에 의아해하며 눈을 슬며시 들었으나, 소년의 표정은 마치 단 한 번도 미소 지은 적 없는 것처럼 무심했다. 잘못 들었나 보다.

1654972168126.jpg“하나 더.”

소년이 상자에 다시 흙을 덮어 올리며 첨언했다.

16549721681225.jpg“진짜……!”

오두막집 제공에다가, 쿠키랑 빵이랑 주스까지 채워주면 됐지, 진짜 너무하네!! 엉?

1654972168126.jpg“진짜 뭐?”

16549721681225.jpg“조타고!”

이벨리아의 눈이 왼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이 수모는 언젠가 갚는다! 꼭 갚는다!

1654972168126.jpg“네가 내 땅에 비밀기지를 만든 건 비밀이야. 너는 나를 이곳에서 만난 적이 없는 거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거고.”

소년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면서, 허리를 굽혀 이벨리아와 눈을 맞추었다. 마주치는 홍안은 오묘하게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이벨리아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마지못해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1654972168126.jpg“너 진짜 작다. 한참 숙여야 하네.”

소년이 허리를 펴며 투덜거렸다.

16549721681225.jpg“긍데 왜 비밀이야? 범재자야? 악당이야?”

이벨리아가 소년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물었다. 성깔이 더럽게 생긴 것도 그렇고 내 비밀기지를 이렇게 빼앗으려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악당이 맞는 것 같다. 기사들한테 잡혀갈까 봐 비밀로 하라는 것 같았다. 이벨리아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1654972168126.jpg“그래. 범죄자에 악당이다. 그러니까 조심해.”

소년이 나무 뒤로 삽을 다시 가져다 놓으면서 대충대충 대답했다. 비밀기지를 정체 모를 소년과 함께 쓰게 된 이벨리아는 소년이 뒤로 돌아 있는 동안에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하다가, 오늘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갚을 마지막 자존심을 부렸다.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 하나를 주워들어 한쪽 눈을 감고, 뒤돌아 있는 소년의 머리를 정확히 조준한 뒤, 있는 힘을 다해 날렸다. - 휘익. - 딱! 명중이오!

1654972168126.jpg“아!!”

소년이 괘씸한 땅 도둑을 잡으려고 뒤를 돌았으나,

16549721681225.jpg“언젠가 가파준다!! 가고해!!”

이미 거한 선전포고만을 남긴 채 목걸이를 돌려 공작저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방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곰치를 껴안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비비안이 오늘 저녁 디저트는 아기씨가 제일 좋아하시는 과일 마시멜로라고 말해줄 때까지. *** 당차게 선전포고를 한 뒤 치졸하게 ‘뿅’하고 사라져버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던 루드비히는 스스로의 웃는 얼굴이 어색하여 입매를 한 번 쓸었다. 북부를 한 바퀴 돌아보는 순찰대를 참관하고 수도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어릴 적부터 남들의 눈을 피해 종종 가던 비밀기지로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세력을 불린 황비가 제 소생인 황자 에드윈을 차기 황제로 올리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전해 들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 4년 전 황후였던 어머니가 타계하신 이후 황태자 루드비히는 수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루드비히가 황위에 오르길 원치 않는 자들은 많았다. 방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예사요, 식사에는 빈번히 독이 섞여 나와 웬만한 독은 내성마저 생겼다. 본디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의 여정이 가장 고되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가혹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깟 궁중 암투 따위에 죽어버릴 목숨이라면 드넓은 대륙을 치세하기는 무리였으니까. 잠시라도 편히 쉴 곳을 간절히 원하며 황궁 뒤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비밀기지에 닿았을 때 즈음. 북부로 시찰 가기 이전에는 없었던 작은 오두막 하나가 보였다. 루드비히의 홍옥 색 눈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기분이 나빴다.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을 정체도 모르는 이에게 빼앗긴 것만 같았다.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탁자 위에 마시다 만 오렌지주스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육포와 빵들은 그 옆에 가득 쌓여 있었다.

1654972168126.jpg“쌓아둔 식량의 양을 보니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해츨링의 레어인가.”

제 비밀기지에 떡하니 오두막을 지어놓은 것이 못내 괘씸했다. 그래서 소중히 비축해 둔 것처럼 보이는 식량을 근처의 노루, 새 등 야생동물들에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아주 치졸한 짓이었으나, 그만큼 유일하게 아끼던 장소를 빼앗겼다는 분노가 컸다. 동물들에 나누어주고도 남은 빵들은 저의 입으로도 남김없이 집어넣었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빵이었지만 꽤 많은 양을 먹어 치웠다. 적어도 독이 들지 않은 음식은 루드비히에게 소중했다. 이후로 며칠. 비밀기지를 오고 갔는데도 땅 도둑을 만나긴 영 쉽지 않았다.

1654972168126.jpg‘오늘은 있으려나.’

햇살이 맑은 어느 날 비밀기지로 올라가 보니 오두막 쪽으로 길을 따라 졸졸졸 떨어뜨려 놓은 쿠키들이 보였다. 미끼라고 뿌려놓은 건가……? 설마, 바보가 아니고서야. 오두막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반쯤은 땅 도둑이 먹어버렸는지 바닥이 드러난 쿠키 바구니가 흰 천으로 살포시 덮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색이 예쁜 오렌지주스가 놓여 있었다. 오늘도 괘씸한 땅 도둑의 얼굴은 못 보는 건가. 왠지 모를 아쉬움에 얼마 남지도 않은 쿠키와 오렌지주스를 다 먹고 손을 탁탁 털며 문 쪽으로 향하는데, 우다다-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 근처에 다다라도 줄이지 않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하니 온몸으로 몸통 박치기를 하여 문을 열어젖힐 심산인 것 같았다. 루드비히는 황급히 문의 측면으로 몸을 피했다. 쾅-! 해츨링이 아니라 멧돼지였나. 그러나 문을 박차고 황급히 뛰어 들어온 존재는 해츨링도, 멧돼지도 아닌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16549721681225.jpg“이씨잉…….”

칭얼거리는 아이의 황금색 머리칼은 열린 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을 머금어 그 자체가 태양인 것처럼 환한 빛이 났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두 볼은 젖살이 빠지지 않아 오동통하여 볼록 튀어나온 것이 그대로 보였다. 아르티나 가문. 루드비히는 한눈에 아이의 정체를 눈치챘다. 차림새를 보니 귀족이 확실했고, 이 제국 귀족 중에서, 아니 평민까지 모두 셈하더라도 저리 밝은 빛을 내는 황금빛 머리칼은 오로지 아르티나 가문의 직계밖에 없었다. 공녀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아직 아주 어림에도 얌전하며 능력도 출중하다던데.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었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여태껏 들었던 아르티나 공녀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는데, 볼록 보이는 두 볼이 서서히 새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16549721681225.jpg“지짜아…… 지짜 나빠따!! 잡아서 궁둥이를 차버릴 거야!!”

이내 오두막집을 짜랑짜랑 울리는 외침이 들렸다. ……궁둥이…… 공녀는 얌전하다며……? 대체 어디서 나온 잘못된 정보야? 한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된 몸이니, 비밀기지 때문에 치졸하게 어린 애랑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충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궁둥이를 차버린다는 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654972168126.jpg“누구, 나?”

놀라서 돌아보는 아이의 눈은 아르티나 가문의 공자들과는 달리 오르카스 해(海)를 그대로 담아 놓은 듯한 맑은 푸른빛이었다. 못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툭툭 아이를 놀리니, 아이는 부르르 떨면서 맞서오다가도 이내 깨갱 꼬리를 내렸다. 조금 더 놀고 싶었다. 위엄, 암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군가와 이렇게 편안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하면서도 제법 좋았다. 나무 뒤로 삽을 가져다 놓으면서도 빠르게 다음 주제를 생각해내고 있었는데, 요망한 병아리가 솔방울을 휙 내던지고 야무지게 선전포고를 한 뒤 쌩하니 내빼버렸다. 뒤통수가 아려왔다. 그러나 저도 어쩌지 못할 웃음은 이미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숨통이 트였다. 웃음을 머금은 폐가 알싸하니 시원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킥킥대며 웃던 루드비히가 이내 허리를 숙여 저의 머리를 가열하게 들이받았던 솔방울을 집어 들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황궁에서도 이 솔방울을 보면 간간이 기분이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1654972168126.jpg“또 같이 놀 수 있을까.”

조금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조금 더 놀면 좋았을 텐데. 제법 아쉬운 얼굴이 딱 일곱 살짜리의 그것이었다. 가기 싫다……. 루드비히는 솔방울을 만지작거리며 발걸음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황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드높은 궁을 눈에 담자마자 부드럽던 홍옥 색 눈동자는 다시 핏빛으로 굳었다. 호선을 그리던 입매는 단단히 매여진 채였다. 장난기 있던 아이의 얼굴은 지배자의 가면을 썼다. 일곱 살. 극한의 상황에 몰린 작은 군주가 담담해지기엔, 아니, 그런 척하기엔 부족함 없는 나이였다. 빈틈은 곧 죽음이다. 황제 혹은 시체, 그 아슬아슬한 칼날 위. 바로 그가 딛고 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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