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병아리의 작고 소중한 비밀기지2020.11.23.
“안 대게써……!”
카시스 후작의 생일파티 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맘때. 이벨리아는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황금색 머리칼을 나부끼며 다부지게 주먹을 쥐고 외쳤다.
“아기씨?”
이벨리아의 곁에 서 있던 비비안이 왜 그러시냐는 듯 물었다.
“비민…… 기지를 만드러야게따!!”
이벨리아가 발딱 일어나면서 외친 말은, 공작저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
“그거 들었어? 아기씨가 비밀기지를 만드신다던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카론 경이 아기씨를 태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쁘시다더라.”
사용인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비밀기지 이야기를 하며 웃음 지었다. 벌써 이만큼 크셨나. 혼자만의 장소를 가지시겠다며 비밀기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아기씨가 마냥 귀여웠다. 시도 때도 없이 방에 침입하는 오라버니들과 아버지, 슬슬 예법 공부를 시키려는 어머니, 방 밖으로 나가면 벌떼처럼 모여드는 아르티나 기사단. 질려도 단단히 질려버린 이벨리아는, 혼자만의 시간과 장소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직 사춘기는 아니지만, 이춘기 정도는 온 것 같았다. 방은 안 되고, 마구간도 안 되고, 정원도 안 되고, 부엌도 안 되고. 혼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장소들을 곰곰이 생각하던 이벨리아는, 어느 날 밤 세드릭이 읽어주는 동화책 속에 나오는 ‘비밀기지’를 듣고서 눈을 반짝였다. 이거다! 비밀기지!! 그 이후였다. 혼자서는 비밀기지를 만들 장소를 찾으러 돌아다닐 수 없는 이벨리아는 호위 기사 카론을 본격적으로 부려먹기 시작했다.
“카롱! 비민기지 찾으러!”
세 살의 끝 무렵이 되며 보다 발음이 정확해져, 카론의 호칭은 ‘카안-!’에서 ‘카롱!’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연히 이를 들은 아르티나 기사단은 배를 잡고 웃다가, 이후부터 카론을 ‘카로옹- 카로옹-’ 부르며 놀려대고 있었다. 원래 조금만 놀리다 그만두려 했는데, 이벨리아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조그마한 털장갑을 기사단 앞으로 휙 던지며,
“내 호이 기사를 개롭히다니! 헤론드 경, 겨튜를 신명난다!”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불확실한 발음과 틀린 단어로 이리저리 결투를 신청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귀여워 카론을 더욱 짓궂게 놀린다는 것은 어른들만의 비밀이었다. 여하간 이벨리아가 비밀기지를 찾으러 가자고 외치면 카론이 이벨리아를 말에 태우고 뒤에서 안전하게 감싸 안은 뒤 공작저 근처, 혹은 더 멀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딱 원하는 장소, 즉, 배산임수에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하며 근처에 위험한 몬스터와 사람이 없고 새가 짹짹 울며 꽃이 만개한 장소를 찾기는 어려웠다. 애당초 고작 비밀기지치곤 원하는 바가 너무 많았다. 상심한 이벨리아가 아무런 기대 없이 물고기 친구, 운디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웅디네에- 나 비민기지 만들고 시픈데... 물도 있고, 돈물도 있고, 새도 있고, 꽃도 있는 곳이 왜 없으까……?”
또 엉뚱한 짓을 시작한 계약자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들으며, 운디네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병아리는 대체 커서 뭐가 될래? 응?]
“변아리는 커서 닭이 되지. 웅디네는 바보구나.”
우리 계약자는 정말로 커서 뭐가 되려나. 왕이시여, 아무래도 인장을 잘못 찍으신 것 같습니다…….
[비밀기지 장소는 우리가 알려줄게. 좋은 곳을 알고 있어. 대신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기야?]
“웅디네는 천재구나! 지금 가자! 잠시마안. 카롱!! 카롱!!!”
작은 주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황급히 뛰어 올라온 카론은, 이내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비밀기지만 아니어라……. 제발 비밀기지만 아니어라……. 비밀기지만…….
“가자! 비밀기지!”
카론의 수려한 얼굴은 곧바로 핏기를 잃어갔다. 아기씨가 성공적으로 비밀기지를 만드실 때까지 모험은 계속될 것 같다. 이럴 바에야 그냥 아르티나 기사단을 동원하여 멀쩡한 산 하나를 삽으로 떠내고 꽃을 심은 다음 땅을 깊숙하게 파서 샘물도 만들어버리는 것이 빠르겠다. 카론의 머릿속에선 산 하나를 도려낼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말 위, 카론의 앞에 앉아 카론에게 편안히 기대어 가면서 운디네가 지시하는 방향을 카론에게 알려주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북부 마족 접경 지역에서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카론은, 아기씨의 비밀기지를 찾고자 산천을 누비며 저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으나 이내 마음을 비웠다. 뭐 어떻겠는가, 아기씨가 웃으시는데.
“흐와……! 이쁘다아!”
운디네가 가르쳐 준 방향대로 말을 달리다가, 이내 더 말이 들어갈 수 없는 험준한 길이 나타나자 말에서 내려 10분 정도를 사박사박 걸었을 때였다. 사방이 풀숲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장소. 가장자리에는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는 자그마한 샘물이 있었다. 주변의 나무에는 달큼한 향기가 퍼지는 나무 열매가 침샘을 자극했다. 지나가던 노루 한 마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벨리아와 카론을 한번 바라보고 쏜살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산을 자주 오르던 카론도 감탄사를 뱉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날카로운 감각에 몬스터의 기운도 잡히지 아니한 것을 보아하니, 산 자체가 매우 정갈하고 깨끗한 것 같았다.
“여기에 세우자! 비민기지!!”
이벨리아가 도도도 달려 들판의 한 가운데에 서서 반쯤 뒤를 돌아 카론과 운디네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꽃잎이 이벨리아의 황금색 머리 위에 달라붙자 마치 꽃밭에서 춤추는 작은 요정 같았다. 그래, 작은 주인이 저리 웃으실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전체를 아기씨의 비밀기지로 만들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론은 그의 주인을 향해 마주 웃었다. 어휴, 우리 병아리 계약자 예쁘네, 예뻐. 정령인 나도 넋을 빼놓게 만들다니. 운디네가 고개를 부르르 저었다. 꽃들 사이에 선 이벨리아가 등에 메고 있던 곰돌이 모양 가방을 풀어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다가 이내 검은색 목걸이 하나를 꺼내었다.
“그게 카시스 후작님께서 선물하신 목걸이입니까?”
“옹, 마자!”
일주일 전 후작이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이벨리아에게 미안하다면서 보내온 선물은 돈으로는 그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마법 물품이었다. 후작 정도의 마법사나 되어야 만들 수 있는 목걸이는, 원하는 좌표를 입력해두면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물품이었다. 단 두 좌표만 입력이 가능하며 목에 걸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무겁다는 제약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의 이벨리아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이벨리아는 자신의 방과 비밀기지를 목걸이에 새겨 둘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언제든 비밀기지와 방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요량으로.
“우웅…… 이러캐애…….”
후작이 알려준 대로 목걸이를 바닥에 두고 꾸욱 누르자, 목걸이에서 미약한 빛이 반짝했다.
“돼따!!”
이벨리아는 반짝이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제 집을 지어야 해!”
집…… 집을? 이벨리아는 황망한 표정의 카론을 뒤로 한 채 작달막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두막을 어떻게 지을까 고심하다가 일단 공작저로 돌아갔다. 연무장에 있던 아르티나 기사단 앞으로 가 세상 가련한 눈동자로 ‘비밀기지를 찾았는데, 오두막집이 없어서 야생동물이 저를 확 물어 채갈 것이 분명하다.’라고 종알거렸다. 야생동물이 아기씨를 물어간다는 말에 ‘아기씨를 보호할 오두막이 없으면 안 되지!’하고 외친 기사단. 그들은 그 후로 약 이 주. 매일같이 비밀기지에 출석해서 통나무를 옮기고, 자르고, 대못을 박고, 지붕을 올리며 널리 칭송받는 현란한 검 솜씨를 통나무를 다듬는 데에 아낌없이 사용했다. 운디네가 보기에는 천하의 호구가 따로 없었다. 이쯤 되니 운디네는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런데 병아리야. 비밀기지인데 다들 이렇게 장소를 알아도 괜찮아? 저 인간들이 너의 비밀기지에 막 찾아오고 그럴 텐데?]
“……!”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는 양, 이벨리아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운디네가 보기에는 천하의 바보가 따로 없었다. 여하간 그렇게 기사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벨리아의 다음 타깃은 요리사들이었다.
“비민기지에 가져다 둘 거야! 으음…… 빵이랑, 쿠키랑, 초코랑……!”
비밀기지에 가져다 두시고 오래 드시려면 보존이 중요하지! 우리 아기씨 드시는 것을 보아하니 상해도 그냥 드실 것 같으니까. 요리사들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천연방부제 ‘리시안’풀을 사기 위해 가문의 이름을 아끼지 않고 팔아댔다. 그 외에도 침대 협찬은 오라버니들, 탁상 협찬은 엘리시아. 혹시 모를 몬스터 등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계 마법 협찬은 휴고. 주변에 심으면 무럭무럭 잘 자랄 씨앗들 협찬은 정원사 글렌. 이벨리아는 공작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협찬을 아주 탈탈 털어냈다. 이미 공작저 사람들 모두가 그 위치와 생김새를 알아 비밀기지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으나, 이벨리아의 비밀기지는 어쨌든 원하던 장소에, 원하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 이벨리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비밀기지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요즘 들어 이틀에 한 번꼴로 비밀기지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방 안에 있다가 순식간에 마법 목걸이를 사용하여 비밀기지로 이동해버리니, 호위하는 카론은 죽을 맛이었다. 오늘도 맛있게 구워진 쿠키 바구니를 양손 가득 들고 비밀기지 안으로 들어선 이벨리아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디가찌……?”
오늘 쿠키와 함께 먹으려고 남겨두었던 오렌지주스 병이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분명히 반 정도 남겨두었었는데!
“다 머겄나……?”
오렌지주스를 다 마셨던가? 가물가물 기억이 희미했다. 이내 음식이 배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은 많이 해 보았으니까. 분명 내가 다 마셨었나 보다! 생각하며 포도주스 한 병을 새로 꺼내어 들었다. 공작저로 돌아가기 전. 내일의 간식은 얼마나 가져와야 할까 파악하기 위해서 분명히 포도주스 반병을 남겨둔 것을 확인하고, 쿠키도 열 개가 남은 것을 확인했다. 바구니를 잘 덮어둔 이벨리아는 내일은 주스와 쿠키를 새로 가져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목걸이를 돌렸다. ***
“없떠!!”
없었다. 분명 없었다. 반을 남겨두었던 포도주스도, 열 개를 남겨두었던 쿠키도, 모두 없었다. 혹시 모를 비상시에 먹겠다며 차곡차곡 모아둔, 곡식 창고에 가득 들어 있었던 빵과 육포들도 잔뜩 사라졌다.
“…….”
내 비밀기지인데……. 만든 지 이 주도 안 되었는데…….
“히잉…….”
다시 목걸이를 돌려 공작저로 돌아간 이벨리아는, 타박타박 1층으로 내려갔다. 축 처진 어깨와 울먹이는 눈동자를 보고 아르칸과 세드릭, 그리고 시답잖은 게임을 하고 있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황급히 달려왔다.
“우리 아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기씨!!”
모두가 이벨리아에게 몰려들어 어르고 달래자 순식간에 비밀기지가 털려버린 이벨리아는 한층 더 서러워졌다.
“흐잉…… 도둑이야……. 비민기지에 도둑이야……!”
“도두욱? 아가, 오라버니 보자. 도둑이 뭘 훔쳐 갔어?”
이벨리아의 비밀기지에 도둑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세드릭이 이벨리아의 양 볼을 잡고 눈을 맞추며 물었다.
“쿠키 10개, 포도주스 반병, 그리고 곡식 창고에 윱포…….”
도둑 맞아? 아기돼지가 든 거 아니야? 딱 우리 아기씨 같은? 아르칸과 세드릭, 그리고 기사단이 보기에 값비싼 장식품들은 모두 놓아두고 굳이 먹을 것만 먹고 간 도둑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도둑이라기보다는 야생동물이 아닐까 싶었다.
“훌쩍…… 잡히면 가만 안 도……!”
그러나 비밀기지 주인에게 있어선 동물이든 사람이든 식량 도둑은 식량 도둑이었다. 꼭 잡아서 엉덩이를 때려줘야지! 이벨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씨근대었다. 사냥 시작이다, 식량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