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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정령왕들의 소소한 복수 (15/323)

15화. 정령왕들의 소소한 복수2020.11.19.

해가 완전히 떨어져 후작저 곳곳에 동동 떠다니는 마법등과 달빛만이 남은 시간. 대화를 나누던 부모님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이 놀고 있는 마당으로 왔다. 폴짝폴짝 뛰어온 이벨리아를 본 엘리시아는 땅거지 같은 딸의 몰골에 경악했다.

16549721309843.jpg“세상에…… 이브!”

토끼를 찾겠다고 진흙탕을 기어 다니느라 본래 노란빛이었던 드레스는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고, 흰 빵 같은 볼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풀 쪼가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1654972130985.jpg“이브, 또 놀러 와요!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후작저에 조금 더 머무르자던 휴고의 판단은 주효했다. 신나게 뛰어논 아이들은 어느새 나쁜 기억은 잠시 잊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16549721309854.jpg“옹! 렌리안도 우리 집 노온러와!”

이벨리아가 렐리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16549721309858.jpg“넌 오지 마라, 이안.”

16549721309862.jpg“오라고 사정을 해도 너 보러는 안 갈 거거든. 공녀님 뵈러 갈 거다.”

16549721309858.jpg“너 이 새끼. 평생 출입 금지다.”

여동생들이 마치 타 대륙 이사 가는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오라버니들은 끝까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한편 어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대형 멍멍이들이 저들의 병아리 아기씨를 구하겠답시고 장렬하게 부수고 들어온 담벼락과 걸려 있던 마법 복구 비용이었다.

16549721309874.jpg“……복구 비용은 내일 중으로 보내겠소. 미안하군.”

1654972130988.jpg“손님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일어난 불상사 아닙니까. 저희가 보수토록 하겠으니 부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각하.”

16549721309874.jpg“푼돈 가지고 뭘. 그냥 받게.”

수도에 있는 저택을 사도 몇 채는 살 법한 금액을 ‘푼돈’이라 표현하는 휴고의 재력에 카시스 후작은 다시금 경탄했다. 정작 담벼락을 거하게 부수고 들어온 아르티나 기사단은 휴고의 뒤에 서서 네가 그랬네, 쟤가 그랬네, 어쨌든 나는 아니네, 서로 손가락질하며 쯧쯧거리고 있었다. 마차에 오른 이벨리아는 마중 나온 렐리안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 창문에 얼굴을 찰싹 붙인 채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다가 여러모로 피곤했는지 이내 휴고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코까지 도롱도롱 골며 곯아떨어진 이벨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16549721309889.jpg“분명 뒷공작은 데퐁트 짓인데.”

16549721309843.jpg“당장은 증좌가 없으니…… 후작부인에게 눈을 좀 붙여두도록 하마.”

마찬가지로 이벨리아를 향한 위협을 뿌리 뽑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엘리시아가 답했다. 한편 마차 밖에서는 기사단이 말을 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654972130988.jpg“하, 마족 소환이라니! 그 발발 떠는 발발이 같은 백작이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 짓을 했겠어. 분명 그 뱀 새끼라니까?”

기사단도 제 주인들과 생각이 같았다.

1654972130988.jpg“하여간 전쟁터에서 한번만 만났으면 소원이 없겠네. 확 베어버리고서 아이코, 이런! 마족이 베었네! 하면 되니까.”

1654972130988.jpg“생긴 것이 딱 얍실해 가지고 절대로 최전선에 나올 용기는 없을 상이야. 그냥 깔끔하고 신속하게 암살하자!”

1654972130988.jpg“암살? 암살하면 또 카론이지. 야, 카론. 오늘 아기씨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실책을 뱀 새끼 목 따는 거로 만회해라!”

하도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기사단이 농을 던졌다. 절대 진심은 아니었다. 주군의 명이 없다면 그들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으니까.

16549721338371.jpg“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러나 답하는 카론의 망토 안에는 잘 닦여져 번쩍번쩍 빛이 나는 단검과 표창 여러 개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저놈 저거…… 쓸데없이 진지하네. 이내 마차가 공작저로 진입하자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이미 중간에 여벌 옷을 가지러 온 하녀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상황. 우리 아기씨, 주무시는 건가, 기절하신 건가. 사용인들이 발만 동동거리는데, 사부작대는 분위기에 이벨리아가 찬찬히 눈을 떴다. 눈을 찌르는 환한 불빛에 휴고의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다 이내 저의 주변을 가득 메운 공작저 사용인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다들 나와 있지?

16549721309854.jpg“헤헤, 다녀와따…….”

눈을 반쯤 감고 배시시 인사하는 아기씨를 본 사용인들은 겨우 따라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우리 아기씨, 정말 강하시고 기특하시네. 잠에 취해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비비안의 손에 안겨 목욕을 끝마치고 작은 병아리가 가득 그려진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벨리아는, 방문을 열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16549721309854.jpg“이…… 이게 다 모야……!!”

토끼, 병아리, 오리, 강아지, 고양이뿐만이 아니라 아기상어, 물고기, 참새까지. 육해공 모든 동물 친구들이 모여 이벨리아의 방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이 덜 깨서 잘못 봤나 보다. 눈을 비비적거리고 다시 바라봐도 동물 친구들은 미동도 없이 꼿꼿했다.

1654972130988.jpg“어머! 기사님들께서 아기씨 선물을 이렇게 많이 사두셨군요!”

기사단은 이벨리아가 후작저에서 토끼를 찾으면서 뛰어다닐 때 미리 공작저 하인에게 인형을 이벨리아의 방에 가져다 두라고 지시했었다. 그들의 아기씨가 방문을 열자마자 귀여운 동물 친구들에 감격하시기를 바라며.

16549721309854.jpg“…….”

그러나 침대 위, 아래, 탁상 위, 의자 사이할 것 없이 눈을 번뜩이고 서 있는 동물 친구들은 귀엽다기보다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애써 기사단의 노고를 포장하려던 비비안도, 이벨리아의 방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말을 아꼈다. 어휴, 이 정도를 모르는 기사님들!

16549721309854.jpg“……전말! 내가! 못! 싸라!”

이벨리아는 마치 사고 친 강아지들에게 말하듯 입을 앙다물고 인형들을 하나하나 넘어 침대까지 도달했다. 그 와중에도 자기가 보기에 특히 귀여운 동물 인형들은 차곡차곡 들고 온 이벨리아는, 비비안에게 나머지 인형들은 공작저 밖 어려운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로 나누어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1654972130988.jpg“어쩜…… 우리 아기씨는 마음씨도 이리 고우실까요.”

그냥 처리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뿐이었는데, 과하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 바라보는 비비안이 부담스러워 이벨리아는 이불을 폭 덮었다. 지나치게 과해 타박하긴 했으나, 곁을 지키는 아기상어와 병아리 등이 생겨난 것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기상어 인형을 끌어안은 이벨리아의 작은 입술이 오물대며 미소를 띠었다. 깊은 밤. 꿈엔 숲속에서 만난 악마가 출현했다. 봐. 난 정말 귀여운 토끼야. 또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왔어. 이벨리아는 기묘하게도 예쁜 말만 종알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악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기상어 인형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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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시스 후작의 생일파티가 파하자마자, 데퐁트 후작과 세레스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마차에 올랐다. 휴고가 백작과 영애를 참수하며 오로지 세레스만 정원에 남겨둔 것은 경고였다. 섣불리 이벨리아를 건드렸다가는 세레스도 저렇게 될 것이라는, 혹독한 경고. 처참히 죽던 광경과 끈적한 피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쿠션을 집어 드는 세레스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세레스는 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만인지상. 그보다 더 자신을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여겼다. 오늘 파티에서 공녀의 콧대를 눌러 모든 귀족들에게 이를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추후 사교계를 장악할 자는 공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아르티나의 위명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깟 공녀 따위 언제든 짓밟아버릴 힘이 있음을. 그러나 아니었다. 공녀는 자신의 도발에도 덤덤했으며, 단탈리온의 앞에서도 살아남았다. 태양처럼 빛나는 밝은 금발은 자신의 생각보다 조금 더 아름다웠고, 공자들 역시 제 오라비 따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듬직했다. 게다가 묘하게 자신을 멀리하는 후작가 기사단과는 달리 아르티나 기사들은 공녀를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빼줄 듯했다. 무엇보다도, 공녀는 정령을 불러내어 미로네 백작이 마족의 계약자임을 단번에 찾아내었다. 반면에 자신은 물벼락을 맞아 망신을 당하였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었다. 그깟 계집 따위, 그깟 계집이 뭐가 잘났다고.

16549721366547.jpg“아버지! 오늘 분명 공녀에게 큰일이 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분을 이기지 못한 세레스가 데퐁트 후작에게 소리쳤다.

16549721366551.jpg“시끄럽다! 무슨 생각으로 먼저 공녀에게 다가간 게야! 아르티나를 상대할 때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거늘!!”

16549721366547.jpg“그렇지만, 그 계집이 있는 한 저는…….”

16549721366551.jpg“황후 자리에만 오르면 그만 아니더냐! 곧 황태자가 수도로 귀환한다고 하니, 황태자나 제대로 사로잡거라!”

세레스가 황후가 되고 그 소생이 훗날 황제가 된다면 아르티나 가문을 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터였다. 두 부녀가 이 제국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며 잠시간 행복한 망상에 빠져 있던 찰나. - 쿠웅! 마차가 크게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휘청거렸다.

16549721366547.jpg“꺄악……!”

16549721366551.jpg“으억……!”

마차가 거칠게 넘어지자, 반동으로 후작이 마차 바깥으로 튕겨 나갔고, 세레스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늘어졌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하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후작과 세레스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인간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두 존재가 이를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1654972130988.jpg“흐음…… 이래도 되는 거야? 이거 규율 위반 아닌가 몰라.”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16549721405525.jpg“이 정도는 괜찮다.”

남자가 이 정도도 많이 참은 것이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

1654972130988.jpg“뭐, 네가 안 하면 나라도 뒤집으려고 했어, 엘라임.”

진갈색 피부에 초콜릿 색 머리칼, 흑색 눈을 가진 소년의 입이 매혹적으로 호선을 그렸다. 하위 정령들의 수다로부터 이벨리아가 바깥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엘라임은 그 모습을 물에 비춰 보다가, 같잖은 마물이 나타나고 웬 미역 머리가 아이를 밀치는 것까지 모두 목격했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난 엘라임 덕분에 정령계의 수분이 싸늘히 식었다. 하위 정령들은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그러자 마침 정령계에 머무르던 땅의 왕, 트로이가 애먼 정령들 힘들게 하지 말고 후작을 찜쪄먹든 다져 먹든 알아서 하라며 엘라임을 질질 끌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힘이 신에 필적하여 멋대로 인간 생사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 법칙. 계약자를 두지 않은 지금 제약을 거스를 힘은 없다. 그리하여 엘라임은 후드리 챱챱하고 싶은 욕망을 애써 참고 마차를 뒤집어엎는 정도로 그친 것이었다. 아이가 우리를 부르기만 하면. 언젠가 제대로 갚아준다. 정령왕들은 한 조각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두 부녀를 주시했다. 인형 친구들 사이에 폭 파묻혀 편안히 꿈나라를 여행 중인 이벨리아는 전혀 모르는, 왕들의 작은 응징이었다. *** 정령계로 돌아온 엘라임은 이벨리아의 영혼을 처음 만난 날을 상기했다. 아주 오랜 세월 그랬듯 정령계는 고요했다. 하위 정령들은 감히 왕께서 쉬고 계시는 영역에서 시끄럽게 재잘대지 않았다. 그 어떤 바다보다도 맑은 푸른색 물이 너울거리는 물의 영역. 물빛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탁탁 치고 있었다.

16549721405525.jpg“지루하군.”

1654972130988.jpg[유희라도 다녀오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왕이시여.]

남자의 발치에 앉아 있던 상급 정령이 제안했다.

16549721405525.jpg“그것도 지겹다.”

그는 물 그 자체. 약 5,000년을 존재했다. 길고 긴 삶 속 황제, 기사, 상인, 뒷골목의 왕. 살다 살다 안 해 본 유희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질리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그러한 엘라임이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느낀 것은 딱 하나였다. 인간들은 전부 이기적이고, 희생을 모르고, 그리하여 그 영혼은 추악하다는 것.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고역이었다. 검고 칙칙한 색은 이제 바라보는 것도 신물이 났다.

16549721405525.jpg“다른 차원이나 구경하고 올까.”

엘라임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사실 몇 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여 구경하고 돌아왔으나 그곳 인간들도 다를 바 없었다. 이토록 일관성 있는 존재를 창조한 주신께서도 참 악취미다, 생각하며 엘라임이 차원의 문을 열었다. 그때, 엘라임의 주변을 맴돌던 운다인 하나가 미처 잡을 틈도 없이 차원의 틈새로 빠지는 것이 보였다.

16549721405525.jpg“이런…….”

그는 진정으로 탄식했다. 하위 정령은 존재를 믿는 자 없는 곳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흘러간 차원에서 운다인은 소멸을 맞이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영겁과도 같은 세월. 곁을 지킨 자식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들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곳에서 홀로 쓸쓸히 소멸을 맞이하는 것을 달가워할 부모는 없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자식의 흔적을 따라 다른 차원으로 발을 옮겼다. 적어도 소멸만은 곁에 있어주고자. *** 휘황찬란한 불빛은 눈이 부셨다. 거대한 건물들은 마치 벌집을 연상시켰다. 한마디로, 그 어느 곳보다 정신없는 차원이었다.

16549721405525.jpg“저 꼴같잖은 마차는 또 뭐야.”

엘라임이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보며 실소를 내뱉었다. 불안한 것처럼 두리번거리던 운다인은 본능적으로 소멸을 직감한 듯 했다. 이내 소멸만이라도 자신이 가장 편히 여기는 곳에서 하고 싶은지, 눈앞에 보이는 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16549721405525.jpg“미안하다.”

엘라임이 들리지 않을 사과를 건네며 안쓰러운 눈으로 운다인을 응시했다. 그때.

1654972130988.jpg“아기! 아기가!”

당황스러운 소리로 외치는 여자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령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엘라임이 설마 운다인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싶어 찬찬히 고개를 돌리는데, - 풍덩. 이미 인간은 없었다. 물로 황급히 시선을 내리니 운다인이 뛰어든 계곡으로 신발을 벗고 망설임 없이 뛰어든 인간이 보였다.

16549721405525.jpg“가지가지 하는군.”

엘라임은 진심으로 당황하여 물색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물의 정령을 물에서 구하려다 인간이 익사한 사례는 자신이 존재한 5,000년 간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던 일. 아마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어이없는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저를 구하고자 뛰어든 인간을 구명하고 싶어 운다인이 왕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엘라임은 한 손을 들어 운다인을 말렸다.

16549721405525.jpg“……저 인간의 새로운 생은 내가 보장하지. 그때 갚거라.”

운다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을 구하려다가 물에 빠져서 죽은, 전례 없이 바보 같은 인간.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인간은 엘라임에게 딱 그 정도였다. *** 부지불식간에 죽으면 다시 기회를 달라며 울고불고하는 것이 인간들의 특성이다. 하물며 인간도 아닌 물의 정령을 구하려다 익사했다고 설명했으니. 엘라임은 곧 다가올 난리에 단단히 마음먹었다. 고맙긴 한데, 아주 귀찮게 됐어. 번거롭다는 생각 사이를 뚫고 인간이 입을 열었다. 엘라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1654972130988.jpg“그래서, 그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어?”

……안 울어? 예기치 못한 반응에 살짝 당황하여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흑요석처럼 요요한 빛을 품은 말간 눈동자가 저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눈이 저렇게 맑을 수가 있던가. 저도 모르게 여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엘라임은, 여자가 왜 답을 하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그제야 황급히 대답했다.

16549721405525.jpg“덕…… 흠흠, 덕분에.”

한순간 눈동자에 홀렸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건만, 살짝 삑사리가 나 목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한, 당황스러운 목소리였다.

1654972130988.jpg“다행이네. 그럼 됐어.”

16549721405525.jpg“…….”

목숨 버린 희생 후에 미련 없이 웃을 수 있는 영혼. 생을 버리고서도 다른 존재를 염려하는 영혼. 수천 년 보아온 인간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영혼이다. 엘라임은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영혼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정령왕에게, 일순 여자가 가진 영혼의 색이 잔상처럼 스쳤다. 황금색. 처음으로 마주한 황금색이었다. 동요 없이 바라보던 요요한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은 순간, 두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크게 존재를 알렸다. 그 때문이었나 보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게 해 달라 애원하는 작은 머리를 그도 모르게 쓰다듬은 것은. 실수로, 진한 흔적을 남긴 것은. *** 새로 태어났어도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영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는 손에 쥔 모든 것을 함께 사는 인간들과 나누고, 때로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푸른 눈으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자랐다. 처음 마주한 황금색 영혼을 가만가만 바라보고 있는 것만 해도 흥미로웠다. 그렇게 어느 순간, 종종 물의 거울로 아이를 비추어 보는 일이 엘라임의 낙이 되었다. 그의 의지에 따르는 물이 세상 모르고 잠든 아이를 비추었다. 아기상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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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존재하는 것 외엔 다른 의미가 없던 생.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다. 아이의 방랑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검이자 방패가 되어주고 싶었다.

16549721405525.jpg‘어서 나를 불러줘, 이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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