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고위 악마를 아주 무섭게 위협하는 아가2020.11.16.
카시스 후작의 생일파티는 미로네 부녀의 참수로 막을 내렸으나, 후작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굳이 생일파티를 연 목적인 ‘공작과 공녀의 얼굴 보기’는 이미 성공한 참이었고,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이뤄진 것 같았으니. 남은 감정은 그저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큰일을 겪은 이벨리아에 대한 미안함 뿐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뒤처리가 완료될 때까지 조금만 더 머물러 주기를 휴고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벨리아가 렐리안과 함께 어울리며 충격을 가라앉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휴고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지금. 다섯 아이들과 휴고와 엘리시아,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은 후작이 손수 마련해 준 손님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작은 놀랐을 이벨리아를 위해 달콤한 디저트를 산처럼 준비해두었다. 이벨리아는 모닥불이 따뜻하게 비추는 의자 위에 앉아 이를 맛있게 집어먹다가도 정원에서의 일이 생각나면 ‘호엥……’ 훌쩍거리다 다시 코를 흥, 풀어내고 디저트를 집어 먹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아가, 다리는 괜찮아?”
아르칸이 따스하게 물었고,
“이브, 더 빨리 달려가지 못했어……. 미안해.”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아르칸의 뒤를 따라 마족에게 돌격하려 했던 렐리안이 울상으로 말했다.
“으으응- 고마어, 렌리안. 아주 위험해. 그러면 안……대!”
이벨리아가 나뭇가지 하나에 의지해 무모하게 달려온 렐리안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듯 엄하게 말했다. 이벨리아도 똑똑히 보았다. 그 소심하던 렐리안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도끼눈을 뜨고 저에게 달려오려던 것을. 그러나 아르칸이 단탈리온을 막아내기 전에 렐리안이 먼저 다가왔더라면 무사치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두 아이들은 처음 사귄 친구를 먼저 걱정했다. 너무나 순수한 아이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라버니들은 다시금 데퐁트 후작가에 대한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이 후계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라도 데퐁트와 우방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터다. 한편 손님 방 모닥불 앞에서 이어지는 훈훈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방문 바로 앞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가 분명, 공작저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기어코 저의 명령을 듣지 않고 공작저를 뛰쳐나와 후작저로 쳐들어온 멍멍이들을 향해 휴고가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주군! 주군께서는 후작저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지 공작저에 있으라고는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헤롤드가 ‘우리는 잘못한 거 하나 없어요!’라는 표정으로 해맑게 답했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죄송함다, 주군!”
경험상 이땐 숙이는 것이 뒤탈 없다. 기사단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죄송하다 외쳤다.
“북부로 다시 쫓아내 버리던가 해야지 원…….”
뭐라고 말을 이으려던 휴고가 현명하게도 포기했다. 무려 20년 이상 키워온 기사단이었다. 얘기해서 들을 것들이었다면 애당초 북부로 쫓아내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정신없어 보여도 할 때는 하는 녀석들이다. 게다가 오늘 후작저로 쳐들어와서 다른 귀족들에게 아르티나 기사단의 무용(武勇)을 똑똑히 보여주었으니 그냥 넘어가자…… 싶었다. 시급한 뒤처리를 마친 후작이 휴고와 엘리시아에게 응접실로 와주십사 부탁했고, 아이들은 후작저 뒤편 작은 마당으로 몰려갔다. 후작은 아껴두었던 가장 좋은 술을 따라 휴고에게 건네었다.
“손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공녀님께서 큰일을 겪으셨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각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표정은 침통했다.
“……언젠가 있을 일이었다. 이브의 능력이 2년 전 황제궁에서 전부 드러났으니.”
휴고가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마시며 답했다.
- 렌리안! 저기! 저기 바……! 토끼! 토끼!
- 와아! 정말이네요! 우리 정원에서 토끼는 처음 봐요!
- 앙대! 그러지 마! 그러능 거 아니야! 이 바보들!!
해가 지고 마법등만이 아스라이 밝히는 마당.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토끼를 발견해 흥분한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기사단이 토끼를 잡으러 뛰어갔는지 그들을 말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휴고와 후작은 이를 들으며 재차 술을 기울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마냥 여리지만은 않은 이벨리아에게, 그리고 이벨리아를 만나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렐리안에게. 아버지들은 그저 고마웠다. *** 이벨리아는 하얀 토끼를 잡으러 뛰어가려는 기사단을 ‘이 바보들아!’라고 외쳐 겨우 중지시켰다. 거대한 기사단이 쿵쿵거리고 뛰어가면 토끼는 멀리 도망갈 것이 분명했다. 허리에 야무지게 양손을 얹고 나름 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서는,
‘내가 차자보께! 토끼 잡는 거 아니야! 먼리서 구……경하는 거야!’
라며 기사단을 다그치던 이벨리아가 토끼를 찾겠다고 수풀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사박사박,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갈아입은 이벨리아의 노란 드레스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었으며, 이벨리아가 얼굴이 가려워 긁는 바람에 얼굴에도 검댕이 묻어났다. 그러나 조금 전 보았던 귀여운 흰색 토끼를 가까이에서 구경하겠다는 일념에 가득 찬 이벨리아에게는 전혀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풀숲을 헤치자 탁 트인 드넓은 숲이 보였다. 이벨리아가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토끼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시 돌아가려는 이벨리아의 눈에, 나무 밑동에 허공에 떠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뭐지? 반짝반짝…… 보석인가보다!
“보석……! 밥쭐!”
토끼는 찾지 못했지만 보석을 가지고 가서 자랑할 생각에 들뜬 이벨리아가 반짝이는 그것 쪽으로 아장아장 다가가 허공을 콱, 움켜쥐었다.
“아!”
보석은 보석이었는데, 어느 남자의 귀에 달린 귀걸이 보석이었다는 점은 정말 몰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남자는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흐아?”
귀걸이를 잡아당기자 악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남자. 깜짝 놀라 입만 크게 벌리고 바라보는데, 서서히 남자의 형체가 또렷해지면서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과 황금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입술은 너무도 붉디붉어 마치 바로 전 피를 짜내어 마신 것만 같았다.
“이 꼬맹이가, 무슨 짓이야. 아니, 그보다 나를 어떻게 봤지?”
남자의 머리 위에는 각진 두 개의 뿔이 달려 있었는데, 탈부착용인지 고개를 흔들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
보석을 잡아당겼더니 사람이 나타난 영문도,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멍하니 물었다.
“누구야?”
남자가 씩 웃으며 답했다.
“악마.”
*** 72 악마 중 하나. 아가레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인간이 단탈리온을 소환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심심풀이 겸 소환의 흔적을 따라 올라왔다. ‘동(東)마계의 지배자’라 불리는 그는 하잘것없는 정복 전쟁이라던가, 마왕의 자리라던가, 그딴 시시껄렁한 것들엔 관심 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오로지 흥미를 줄 수 있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으므로. 단탈리온들이 개박살 나는 장면까지 눈에 담은 아가레스는, ‘좀 하네. 저것들이 그 유명한 아르티나 가문이로군.’생각하고는 시끄러운 정원을 벗어나 후작저 뒤편 숲에서 잠이 든 참이었다.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생각보다 영 흥미롭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들키면 귀찮으니 모습을 감추고 제일 커다란 나무 밑에서 소위 ‘꿀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귀걸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비겁하게 세상 누가 귀걸이를 잡아당기면서 기습을 해? 잔뜩 눈을 찌푸리고 잠에서 깨어보니, 웬 꼬맹이 하나가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말간 푸른 눈으로 놀란 듯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기습한 건 넌데 왜 네가 놀라, 놀라도 내가 놀라야지.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에 힘을 써서 그런가, 깊은 잠에 들며 한쪽 귀걸이만 은신이 풀렸나보다, 생각하며 꼬맹이를 마주 바라봤다. 악마라는 말에 놀란 푸른 눈동자가 더더욱 커지는 걸 바라보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앙마……? 마독?”
“어디 그런 거랑 비교를 해. 마족을 지배하는 게 72 악마고, 나는 그중 두 번째라고.”
마족이냐며 물어오는 꼬맹이의 말에 아가레스가 으스대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아, 마독…… 마독…….”
그러니까 마족이라는 거잖아! 아가레스는 단탈리온처럼 징그럽게 생기지 않았다. 때문에 단탈리온을 마주했을 때보다 시각적인 두려움은 덜했다. 그래서인지 단탈리온의 앞에서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던 ‘공작저 바깥에서 마족이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하시라고 말씀드렸죠?'’에 대한 대답이 이제야 생각났다. 아-주 무섭게 이협해!
“아르르르르르릉.”
이벨리아가 자그마한 송곳니를 내보이며 목에서부터 울리는 사자 소리를 내었다. 머릿속에서야 동물의 제왕 같은 사자 소리였지만, 바깥으로 나오는 소리는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 뭐야, 이 꼬마, 수인족인가. 아무리 뜯어봐도 인간인 꼬맹이가 동물 소리를 내는 것은 오랜 세월 존재한 악마에게도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너 수인족이냐? 이상하네. 귀도 없고, 손톱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머리 위와 손, 그리고 엉덩이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아아니, 잉간! 아르르르르릉.”
위협하는 도중에도 잘못된 정보는 바로잡아줘야지!
“……그거 무슨 소리야?”
내가 인간 꼬맹이를 상대로 당황을 하다니.
“아-주 무섭게 이협하는 소리.”
위협하는 도중에도 물음에는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소리만으로 무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손톱도 함께다! 이벨리아가 양손을 얼굴 근처로 올린 다음 오므려 금방이라도 손톱으로 덮칠 것만 같은 자세를 만들고 다시 한번 땅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었다.
“으하하하하!”
혼신의 힘을 다한 위협이 뭐가 그렇게도 웃긴 지 아가레스는 배를 부여잡고 땅까지 치며 웃었다. 웃음이 멈출 때쯤, 여전히 위협을 계속하고 있는 이벨리아를 보며 다시 웃음보가 터지기를 몇 번. 겨우 멈춘 아가레스가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아, 잘 웃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의 잔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입가에 있었다.
“왜, 웃어? 무섭게 이협했는데.”
기사단조차 겁먹게 한 저의 위협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여태 착각하고 있는 이벨리아가 눈을 살포시 찌푸리며 물었다. 잘못된 교육의 폐해였다.
“악마들은 원래 무서우면 웃어. 그냥 그러려니 해.”
왜 웃는지 진정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에 한 번 더 웃음이 터질 뻔한 아가레스가 변명을 하며 입술을 꾹 눌러 참았다. 아까 본 아르티나 공작가의 아이인 것 같은데, 심지어 희미하게 정령의 냄새도 나네. 원래는 죽여야 맞겠지만…… 아가레스는 이렇게 크게 웃어본 것은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재미있겠는데, 당분간만 살려둘까.
“이름, 모야?”
단탈리온과는 달리 별로 적의가 보이지 않는 악마, 아가레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이벨리아가 물었다.
“아가…… 아니, 악마들은 함부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아.”
천진한 물음에 저도 모르게 답하려던 아가레스가 황급히 멈추었다. 악마들은 함부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역마로 부리려면 악마의 이름을 아는 것이 그 첫 번째 조건. 따라서 인간계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악마들은 매우 꺼렸다.
“아가? 이름이 아가야?”
까르륵, 이벨리아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야…… 어디 위엄 넘치는 내 이름을 아가로 만들어……. 아가레스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두었기에 그들의 대화는 숲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 토끼를 찾으러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이벨리아를 걱정한 기사단과 오라버니들이 숲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가레스의 감각에 잡혔다.
“꼬마, 이름이 뭐야?”
“이벤리아.”
“이벤리아?”
“아니이, 이. 벤. 리. 아.”
벨이라고 이 바보야!
“그래, 이벤리아. 나를 만난 건 비밀로 해주면 좋겠어. 그냥…… 음…… 토끼를 봤다고 해주면 더 고맙고. 비밀을 지켜주면 언젠가 갚을게.”
그 말까지 끝낸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 사라졌다.
“우리 아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세드릭이 달려와 물었다. 뭐라고 답할까. 찰나의 순간 고민한 이벨리아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비밀은 지켜줄 생각이었다.
“으음…… 아가…… 토끼를 봤어.”
“토끼? 찾았어?”
“옹. 아주 귀여운 토끼. 또 보면 조케따.”
달랑 들고 돌아가는 아르칸의 품에 안겨 나무 근처를 이리저리 바라보았으나, 아가레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무 위. 이번에는 제대로 은신하고 숨어 있다가 이벨리아의 말을 들은 아가레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벤리아라고 했지. 실컷 웃느라 잔뜩 힘을 주었던 배가 아직까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