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러게 상대를 잘 보고 덤볐어야 했다2020.11.12.
휴고로부터 공작저에 머물라는 명을 들은 아르티나 기사단은 병아리 아기씨가 후작저로 떠나버리시고 난 뒤 똥 마려운 강아지 처럼 공작저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우리 아기씨…… 험난한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아무리 주군께서 같이 가셨어도 또 모르는 일인데……. 그러다 후작저로 함께 출발했던 하인이 돌아와서 ‘아기씨가 토끼 인형을 가지고 싶다고 하신다.' 라고 전하여, 상점가에서 인형을 사 모으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마침 공작저 밖으로 나오게 되자 기사단은 어떻게 하면 주군께 혼나지도 않으면서 아기씨를 보러 갈 수 있을까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헤롤드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주군께선 후작저 안에 따라오지 말라고 하신 거잖아.”
“음, 그러셨지.”
“그럼 후작저 담벼락 앞에 서 있으면 주군의 명을 어긴 건 아니잖아? 후작저 안에 들어간 건 아니니까!”
“음, 그렇지.”
“내가 일전에 방문했을 때 봤는데, 아기씨가 계시다는 정원은 후작저 왼쪽 담벼락과 맞닿아 있거든!”
이 새끼…… 천잰데?
“가자! 담벼락!”
대형견들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휴고는 후작저에 따라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진의는 후작저 안이든 밖이든 그냥 제발 좀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작당과 공모를 통해 합리화를 마친 그들은, 걸음도 당당하게 온갖 귀염뽀짝한 동물 인형 친구들을 양 옆구리에 끼고서 후작저 담벼락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아기씨 웃음소리 안 들리나. 우리 아기씨 울음소리는 안 들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기사다안-! 기사다안-!’하고 저들을 부르는 아기씨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호신술은 누가 우리 아기씨 끌고 가려고 할 때 사용하시라고 알려드린 건데! 감히 어떤 개새끼가 우리 아기씨를! 그들은 담벼락을 돌아 정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음에도 급한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둘려 있는 보호 마법을 칼로 때려 부수고 난입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걸려 보호 마법과 담벼락을 부수자마자 아기씨를 둘러싸고 침을 질질 흘려대는 별 꼴같잖은 단탈리온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감히 우리 아기씨를 보고 침을 흘려? 우리 아기씨를 땅바닥에 넘어뜨려? 단탈리온 따위에 우리 주군 칼이 휘둘러지는 것은 아르티나의 수치다! 출동이다, 기사단! 그리하여 주군과 단탈리온 사이에 거나하게 병아리 인형을 패대기친 그들. 나머지 인형들은 우리 아기씨 드려야 하니까 담벼락 나무 밑에 나뭇잎을 깔아 고이 앉혀두고 단탈리온들에게 달려들게 된 것이다.
“감히! 아기씨를! 넘어뜨려?”
헤롤드가 한 단어 내뱉을 때마다 단탈리온 한 마리의 목을 베었다.
‘나 넘어뜨린 거는 쟤네 아닌데…….’
“하, 우리 아기씨가 넘어져서 울고 계신 것이 네놈들 짓이란 말이지.”
드웬이 오해를 키워가고.
“침까지 질질 흘렸어. 이 잡것들, 우리 아기씨 잡아먹을 데가 어디 있다고.”
알렉도 지지 않고 날뛰었다. ……그래 기사단 마음대로 해. 쟤들이 나를 엎어 쳤든 저 녹색 머리 영애가 나를 메쳤든 무슨 상관이겠어.
“너희들…… 하…… 아니, 됐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휴고가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저 멍멍이들이 잔머리 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잘못이지. 아니 애초에 저것들을 모아 기사단을 만든 것이 잘못인가. 황실 기사단도 아니고 귀족 가문의 기사단. 카론까지 하여 겨우 네 명의 기사가 수십 마리 단탈리온을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모두 처리했다. 칼에 묻은 오물과 마기를 얼굴 잔뜩 찌푸린 채로 닦아내는 것을 본 귀족들은 아르티나 가문의 저력을 실감했다. 자자한 명성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히잉…… 힝…… 기사다안…….”
친구 만날 거라고 신나서 파티에 왔더니 뚜렷이 적의를 가진 아이가 저를 죽일 생각으로 마족들에게 밀치지를 않나. 생전 처음 본 마족인 단탈리온은 저를 둘러싸고 침을 질질 흘려대지를 않나. 여러모로 크게 충격을 받은 이벨리아가 세드릭의 품에서 여전히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면서 기사단 쪽으로 작은 두 팔을 뻗었다. 모두가 아기씨의 뻗은 팔로 달려 나가려 발을 떼던 찰나. 카론은 나무 밑에 있던 새로운 병아리 인형 하나를 집어 들고 누구보다 빠르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병아리 인형을 건네주었다.
이벨리아가 카론에게 안겨들었다. 아기씨의 포옹을 차지한 승리자는 카론이었다.
“저 약삭빠른 새끼.”
“저 인형 내가 사왔는데…….”
“내일 대련 원픽은 저 자식이다.”
아이들의 파티엔 호위 기사라 해도 지근거리 호위는 불가능했다. 본저와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마침 정원 가까이에 도달해있었던 아르칸보다 한발 늦게 도착했다. 카론의 얼굴은 자괴감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단탈리온을 불러낸 자는 누구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을 본 휴고가 정원에 나와 있는 귀족들에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휴고의 손은 여전히 검집에 닿아 있었다. 단탈리온의 매개체가 있다면 바로 벨 심산이라는 것을 모든 귀족들은 직감했다. 굳이 아이들이 있는 곳에 단탈리온을 소환하였다는 점, 이곳에 있는 아이들 중 처음으로 외부활동을 한 것은 이벨리아 뿐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처리 목표는 확실했다. 그의 딸, 이벨리아.
“공녀님.”
이크리안이 카론의 허리께에 매달려 훌쩍대는 이벨리아에게 가까이 귀를 대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벨리아가 그에게 귀를 바짝 대자, 그가 속삭였다.
“운디네를 부르세요, 공녀님. 운디네가 단탈리온을 불러낸 자를 찾아줄 겁니다.”
정령은 인간보다 수월하게 마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차기 대마법사의 재목이라 불릴 만큼 온갖 고서를 섭렵하는 이크리안이기에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쩍……. 웅디네에…….”
허공에서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운디네가 대체 왜 저를 부르지 않았냐는 듯 탁탁 꼬리를 쳤다.
[바보 같은 계약자. 바보 같은 계약자! 정말 큰일 나면 어쩔 뻔했어!]
툴툴거리면서도 운디네는 이벨리아를 위해 착실하게 마족의 냄새가 나는 자를 찾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머리 위를 휘돌던 운디네가 멈추었다. 이벨리아를 마족들에게 밀친 초록 머리 영애의 아빠. 미로네 백작의 바로 앞.
“아……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꼬박꼬박 신전도 다니고 있어요! 신관들을 불러 물어보시면…….”
조악한 변명이었다.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휴고가 그만 입을 다물라는 듯 손을 들자 말꼬리가 흐려졌다. 휴고가 손을 검집 위로 까닥까닥 움직였다. 인마전쟁 이후, 마족과의 계약은 제국법상 즉결처분이었다. 게다가 고의로 이벨리아를 노린 것이 명백한 소환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만, 휴고는 황제의 권위를 위해 잡아다 황제에게 넘길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냥 처분할지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친우의 면을 살려주어야겠다, 그리 생각하고 황제에게 넘기기 위해 기사단들에게 미로네 백작을 추포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 렐리안이 자그마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처분을 결정하시기 이전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벨리아를 구하기 위해 집어 들었던 얇은 나무 막대기는 여전히 한 손에 꼬옥 쥐여 있었다. 평소 더듬거리던 목소리와는 달리 또렷한 목소리였다.
“단탈리온이 나타났을 때 공녀님도 저와 함께 뒤로 물러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로네 백작 영애가 공녀님을 마족들 쪽으로 밀쳤…….”
렐리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한층 더 짙어진 살기와 서늘함이 정원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비는 마족을 소환하고, 자식은 내 딸을 마족들에게 밀쳤다라.”
결심한 듯 휴고의 손이 까닥임을 멈췄다.
“밀치지 않았어요!! 공녀님께서 의자에서 내려오시다가 발이 걸려서 넘어지신 것뿐……!”
미로네 영애가 살기 위해 발악했으나.
[거짓말.]
마치 이벨리아를 보호하듯 곁을 휘감아 돌던 운디네가 차갑게 말을 끊어냈다. 이벨리아가 소환하여 자연력을 불어 넣었기에 운디네의 모습은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에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목소리도 청명하게 울려왔다.
[우리가 봤어. 저 아이가 우리 병아리…… 아니 계약자를 밀치는걸.]
“각하, 각하……! 살려주십시오. 절대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 겁니다. 절대로……!”
미로네 백작이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줄을 잘못 섰다. 깊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데퐁트 후작은 공녀를 처리하면 중앙 정계에 진출할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후작영애가 황후의 관을 쓰면 저에게 후작의 지위를 준다고 했다. 그깟 세 살배기 아이 하나 처리하는 것이 뭐 어려울까 싶었다. 설령 실패해도 자신이 마족과 계약한 건 누구도 모를 것이므로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뒤를 데퐁트 후작 각하가 봐주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미로네 백작은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데퐁트 후작은 언제든 쉬이 저를 버릴 사람이었다는 점.
“아르칸. 이브를 데리고 들어가라. 카시스 영식은 다른 아이들도 전부 데리고 들어가고. 단, 데퐁트 영애와 미로네 영애는 제외다.”
휴고의 목소리에 배인 진득한 분노. 이벨리아는 망설였다.
‘마족을 소환한 미로네 백작은 그렇다 치고, 영애까진 좀 과한 거 아니야……?’
고작 열 몇 살 내외로 보이는 영애가 아버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생각을 눈치챈 듯 말했다.
“전혀 과하지 않아. 미로네 백작영애는 제국법상 가장 금기시되는 마족을 소환한 가문의 영애인 데다, 이브를…….”
아르칸이 입술을 깨물고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이브를…… 크게 다치게 할 뻔했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벨리아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가정으로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르칸의 코가 시큰해졌다. 아르칸이 이벨리아를 달랑 들어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해. 지금 여기서 백작과 영애를 즉결처분하시더라도 이 제국의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처분을 현명하다 할 거야.”
이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저의 하찮은 도덕심일 뿐, 감히 마족을 이용하여 공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한 백작영애의 처분은 당연하다는 것을. 이벨리아는 성자가 아니었다. 멍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황 판단에 있어서는 굉장히 영리하고 똑똑했다. 지금 자신이 백작영애의 용서를 구한다면 오히려 아르티나를 우습게 보이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웅.”
이벨리아가 아르칸을 따라 들어가자, 정원에는 미로네 백작의 애원 소리와 이제야 사태 파악을 한 백작영애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데퐁트 후작이 시켰노라고, 저는 시키는 대로 한 것이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건만. 치밀한 데퐁트 후작은 계약 당시 ‘데퐁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두었기에 미로네 백작은 꺼억- 꺼억- 목 막힌 소리만 내뱉었다. 간절히 바라보는 미로네 백작의 핏발 선 눈을 데퐁트 후작은 쉽게도 외면했다.
“처리해라.”
아이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휴고가 기사단에 명하며 돌아섰다. 비릿한 피 냄새가 정원에 퍼져나갔다. 세레스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저택에서 종종 하녀들을 채찍질하여 피를 보긴 했으나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공작 각하가 왜 저만 이곳에 남으라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백작과 영애가 참수당하는 것을 본 데퐁트 후작은 미미한 비소를 지었다. 장기 말 하나를 잃은 것은 조금 아쉬우나 저 정도의 말쯤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었다. 참수된 부녀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휴고가 일순 검을 뽑아 후작의 목에 겨누었다.
“허억……!”
눈치채지 못한 사이. 목 끝에 와 닿은 검을 보며 후작이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주특기가 연금술이라. 살기 난무하는 전쟁의 최전방에 선 적 없는 데퐁트 후작이 휴고의 기운을 당해낼 리 없었다. 후작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를 줄 알았나, 후작.”
휴고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검부터 거두시고 말씀하시지요.”
어차피 공녀를 죽이라 사주하였다는 증좌는 없다. 공작은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항상 주위를 살피게. 증거가 부족하여 제국법으로 처분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람 목숨이 꼭 법에 달린 건 아니지 않나.”
휴고가 데퐁트 후작의 귓가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검을 거두고 후작저로 들어가는 휴고의 뒤를 아르티나 기사단이 따랐다. 늘 어딘가 가벼운 모습, 바로 조금 전까지 아기씨에게 인형을 가져다 바치며 온갖 재롱들을 부리던 모습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기사들의 배후에는 경시할 수 없는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귀족들은 정원의 풀을 진득한 피로 물들이고 누워있는 미로네 백작과 영애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짧은 평화에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평화가 어느 가문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 어느 가문이 격렬한 전쟁의 선봉에 선 덕분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절 아르티나 가문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를.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르티나는 건재했다. 어쩌면 그 시절보다 더욱 강대했다. 인마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날개를 편 황금색 용은 이제 그 기개로 세상을 덮었다. 그 잔혹하던 시절. 수많은 기사들과 가솔들의 피를 흘리며 아르티나가 지켜낸 평화였다. 감히 그를 무너뜨리려던 대가. 그리고 그들의 하나뿐인 공녀를 노리려던 대가는, 정원을 질척하게 적시고 있는 피처럼 짙고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