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지금이 바로 호신술로 모두 물리쳐 버릴 때인가?2020.11.05.
반 시진 달려 도착한 카시스 후작저는 공작저와는 또 다른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마법으로 유서 깊은 가문답게 성의 담벼락은 푸른색 마법으로 감싸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투명한 마법진들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아르티나 공작저가 무가(武家)답게 창과 칼이 가득하다면 카시스 후작저는 그보다는 녹음이 푸르른 분위기였다. 아르티나 공작이 도착했다는 것을 하인으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카시스 후작은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두 팔 벌려 공작을 맞이했다.
“하하하- 각하, 방문해 주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카시스 후작은 아르티나 공작과 함께 최전선에서 전쟁을 이끌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도 밝은 달이 뜬 밤마다 수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전쟁만 끝나면 제대로 회포를 풀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니 둘 다 국정을 돌보느라 황궁 밖에서는 제대로 만날 일도 없었다. 후작이 휴고에게 파티가 열리는 시각보다 일찍 와주십사 부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오지 않고 배기겠나. 그대가 황궁의 내 집무실에 드러누워 며칠 밤낮을 졸라대는데.”
사실 휴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두고 참석하자니 저녁 동안 아빠를 찾을 딸이 눈에 밟혔다. 그렇다고 데리고 오자니 아직 이 더러운 사교계 생태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카시스 후작의 초대를 거절했건만, 이후 카시스 후작의 진정한 투정을 맛보아야만 했다. 카시스 후작이 황궁 내 휴고의 집무실에 사흘 밤낮을 드러누워 생떼를 부렸기 때문이다. 상기시키자 카시스 후작이 민망한 듯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으하하하, 사실 공작 각하보다야 공녀님을 뵙고 싶어서 그랬지요. 제국 내에 소문은 무성한데 공작저에 방문해도 통 뵙기가 힘드니 말입니다.”
공작저에 몇 번 방문하긴 하였으나, 마주친 건 딱 한 번이었다. 그마저도 이벨리아가 여느 때와 같이 2층에 진열된 갑옷들 뒤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 심취한 와중이었다. 마침 후작이 휴고와 함께 걸어가다가 이벨리아가 갑옷 뒤에서 크왕! 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뎨동합니다…….’하고 사과한 것이 전부였다. 후작의 입에서 제 이야기가 나오자, 이벨리아가 어디선가 본대로 한쪽 다리를 살짝 뒤로 빼고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살포시 올린 다음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후작님께 쟈바놓은 마법이 가득하길. 이벤리아 아르티나입니다.”
실상 마법사에게 건네는 제대로 된 인사말은 ‘잡아놓은 마법’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나’인 데다가 자세 또한 엉성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써 어른들의 인사법을 따라 하려는 아이가 제법 깜찍하여 후작은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내뱉었다.
“하하하, 우리 공녀님께서 못 뵌 새에 벌써 어른이 되셨군요!”
“헤헤.”
어른이 되었다는 칭찬이 그 어떤 찬사보다 듣기 좋은 이벨리아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 이쪽은 제 아들과 딸입니다, 공녀님. 우리 렐리안은 몸이 약하여 여태 친구가 없는데, 공녀님께서 친구가 되어주시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후작이 영식과 영애를 소개하며 사족을 덧붙였다. 후작 영애 렐리안 카시스는 이벨리아보다 세 살 많은 여섯 살이었는데, 태어나길 몸이 약하게 태어나 후작저 밖을 나선 적이 손에 꼽았다. 자연히 또래 친구도 만나지 못하였기에, 카시스 후작은 렐리안과 이벨리아가 이크리안과 아르칸처럼 절친한 친구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크리안 카시스입니다. 귀한 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녀님.”
이크리안이 이벨리아의 두 걸음 앞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 살포시 웃었다. 여느 귀족 영애들에게 하는 예법처럼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가져다 대고자 하였으나, 손을 올리자마자 세 부자로부터 너무도 명백한 살기가 느껴져서 슬그머니 다시 원위치했다.
‘이런……. 손이라도 까딱했다가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겠네.’
이크리안 카시스는 오라버니들이 이야기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양아치’라는 혹평을 들었건만. 진보랏빛 머리칼과 눈은 어딘가 고혹적이고 진중한 느낌을 주었다. 여우 같아, 여우! 살랑살랑 꼬리치는 여우! 이크리안이 씨익 웃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후작부인의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여자아이를 불렀다.
“렐리안, 공녀님께 인사드려야지?”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진 여자아이가 주춤주춤 이벨리아 가까이 다가왔다. 으왕! 친구! 친구! 이벨리아의 눈은 이미 반짝이다 못해 번쩍이고 있었고, 작은 손은 어서 친구의 손을 잡고 싶어 옴찔옴찔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렐리안은 바닥을 보고 걸어오느라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저…… 렐리안 카시스라고 합니다, 공녀님. 조…… 좋은 친구가 되면 좋겠어요……!”
렐리안은 오라버니인 이크리안 이외의 사람들과는 좀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벨리아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아주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감수할 만큼 렐리안은 이벨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렐리안이 후작저 안에만 있어도 공녀님의 소문은 들려왔다. 아주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에 바다 같은 푸른색 눈을 가지고 계시다던데. 정령들의 사랑을 받아 첫 생일 즈음에 계약까지 맺으셨다지. 게다가 그 고귀하다는 아르티나 가문의 공녀님이시니. 나처럼 몸도 약하고 소심한 아이는 아마 친구로 마음에 들지 않으실지도 몰라. 렐리안이 이벨리아의 반응을 살피고자 슬그머니 눈을 올리려던 찰나,
“칭구! 칭구! 잘 부타캐-!”
이벨리아가 와락 렐리안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꼬옥 쥐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렐리안의 얼굴과 귀는 톡 건드리면 팡! 하고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이를 바라보는 두 가문의 어른들과 오라버니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때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데는 큰 계기가 필요하지 않다. 훗날, 이벨리아와 렐리안은 이 순간을 회상하곤 했다. 첫인사를 건네던 순간. 처음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던 순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이라 직감했던 이 순간을. *** 휴고와 카시스 후작은 못다 한 회포를 풀고자 응접실로 올라갔고, 엘리시아와 후작부인은 가벼운 티파티를 즐기기 위하여 온실로 향하였다. 자연히 저들만의 자유시간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이크리안의 방으로 다 함께 올라갔다. 마법사 가문의 영식답게 방에는 두꺼운 마법서들이 가득했다. 검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어 침대 바로 옆쪽 벽에는 샴쉬르(*초승달 모양의 칼)도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창틀 바로 앞, 이미 쿵 짝이 맞아버린 이벨리아와 렐리안은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버터 향이 고소하게 올라오는 브리오슈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나누어 먹기보다는 렐리안이 이벨리아에게 먹여주고, 이벨리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웅냠냠냠 받아먹고 있었다. 동생들이 처음으로 친구를 사귄 광경이었다. 더 녹아내릴 수도 없이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 오라버니들은,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공녀님 정말 귀여우시다. 너희가 왜 맨날 자랑했는지 알겠어. 수도에 떠도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것도 알겠고.”
이크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아르칸과 세드릭에게 말했다.
“그리고 뭐랄까…… 우리 렐리안과는 다르게 정말 밝으시네. 별 같아. 땅콩별.”
땅콩별. 뭘 말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너, 행여나 꿈도 꾸지 마라. 벗의 손에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면.”
아르칸이 도끼눈을 뜨고 이크리안에게 엄포를 놓았다.
“난 연상이 취향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연하보다는 능숙하게 리드해주는 누님이 좋다고. 공녀님은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시잖아.”
이크리안이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제 고작 열한 살짜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크리안이 얘기하니 묘하게 어울렸다.
“그 마음 변치 마라, 이안.”
아르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마치 병아리를 채가려는 솔개를 보는 농장 주인의 눈빛 같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후일 공녀님의 애인이 될 사람이 불쌍하다. 너 같은 것과 너 같은 것 2를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니.”
“우리 아가의 애인이라니! 난 싫어!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세드릭은 상상만 해도 정말로 싫은 듯 방금까지 맛있게 씹어 넘기던 초콜릿 쿠키를 거칠게 내려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칸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손가락 관절에서 뚝뚝 소리를 냈다. 두 형제를 바라보던 이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휴, 진짜 불쌍하네. 누군진 몰라도 연애 한 번에 목숨과 가문을 걸어야겠어. 파티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두 시간. 이벨리아와 렐리안은 무섭게 빵을 먹어대며 둘 이외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재잘대었다. 세 오라버니들은 그러한 여동생들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크리안은 항상 정적이던 렐리안을 저리도 환하게 웃게 만드는 이벨리아가 마냥 달가웠다. 마치 여동생이 하나 더 생긴 기분. 기가 막히게 좋았다.
***
"공자님들과 공녀님, 그리고 도련님과 아가씨께선 저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고 아이들을 안내하던 하인이 몸을 돌려 정원 방향을 가리켰다. 열여섯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파티에 초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파티에 참여하게 되면 도무지 수습할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카시스 후작의 생일파티처럼 어린아이들까지 초대하는 경우, 아이들만의 파티장을 따로 마련해주고는 했다. 카시스 후작이 마련한 어린 아이들용 파티장은 완벽했다. 참석한 아이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빼고는. 가지런히 놓여 있던 특대형 푸딩은 이미 뭉개져서 땅에 뒹굴고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땅에 떨어진 푸딩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일부 아이들은 나무 막대기로 칼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어린 영애들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부채를 어설프게 펼쳤다 접었다 하며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다.
“…….”
“…….”
하인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아이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살랑살랑 여유롭던 이크리안의 얼굴이 퍼렇게 경직되었으며, 늘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르칸의 표정에 균열이 보였다. 지옥이야!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다!
“아…… 요즘 검술 수련에 조금 게을렀던 것 같네……! 아르칸, 대련이나 하러 갈래?”
이크리안이 뻣뻣한 목을 돌리며 제시하자,
“간만에 좋은 생각이야.”
아르칸이 손목을 풀며 덥석 받아들였다.
“나도! 나도 갈래! 검술 수련은 중요하지!”
여동생과 논다는 명목하에 검술 수련을 농땡이 친 횟수를 도무지 셀 수도 없는 세드릭 역시 질세라 손을 번쩍 들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저 지옥도를 보니까 갑자기 검술 수련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해진 것 같아! 세 아이들 모두 저 지옥으로 뛰어들어 구경거리가 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우리 공녀님과 렐리안은 어떻게 하실까요?”
이크리안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이벨리아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요망하게 접히는 눈이 마치 다 함께 연무장으로 가서 우리끼리 놀자고 유혹하는 듯했다.
“으음…… 나는 갈래! 저기에!”
이벨리아가 잠시 고민하다가 정원을 가리켰다. 저 헬게이트로 오라버니들 없이 혼자 뛰어든다는 것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또래 친구들을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
“그……그러면 저도…… 이브와 함께 갈래요.”
렐리안이 이벨리아의 곁으로 가서 섰다. 자신을 ‘공녀님’이라고 칭하는 렐리안에게 '이브'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같이 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려 결국 친밀한 애칭으로 불리게 된 이벨리아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크리안은 지금껏 제게서 떨어지지 않던 렐리안이 처음으로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친구와 함께 간다고 하는 것이 마냥 기꺼웠다. 마치 여동생의 성장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좋아, 우리 아가들. 누가 괴롭히면 크게 오라버니들을 불러야 해. 알았지? 바로 뛰어갈 테니까.”
아르칸이 두 아가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뎡……마! 나 배워써! 호싱술!!”
이벨리아가 제법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 그 쓸데없는 호신술……? 사용했다가는 오히려 가소로워 보일 것 같은 그 호신술……?
“우리 아가, 그냥 오라버니들 부르자. 꼭 그래야 해?”
“……? 옹!”
마치 여동생들을 아주 먼 사지로 보내는 것 같이 행동하는 오라버니들을 보면서, 길 안내를 돕던 하인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부디 두 아기씨들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그리하여 저기서 푸딩을 엎어치기 메치기하고 있는 귀족 아이들이 깡그리 피를 보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정원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렐리안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랐고, 이벨리아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평안했다.
“저기 봐!”
“설마 아르티나 공녀님이야?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
“우리 아버지가 진짜 아름답다고 그러셨는데…… 정말 예쁘다…….”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제법 크게 이벨리아의 귀로 날아들었다. 좋아! 나는 긴장 따위 하지 않았어! 얘네들은 다 돌멩이다, 돌멩이다, 눈 코 입 달린 숨 쉬는 돌멩이다……. 그러나 얼굴색만 말짱하지 실상은 걸을 때 왼팔과 왼발이 같이 나가고, 오른팔과 오른발이 함께 나가 고장 난 병아리처럼 빳빳하게 걷고 있음을 이벨리아는 몰랐다.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정원의 가장 안쪽, 둘을 위해서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차마 다가올 용기는 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을 무렵. 한 여자아이가 입술을 앙다물고 인사를 건넸다.
“저어…… 공녀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카렌 백작가의 모리안 카렌이라고 합니다.”
그 인사가 시발점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귀족은 귀족. 상위 귀족들은 남을 찍어 내리는 것에, 하위 귀족들은 본능처럼 강자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에 익숙했다. 모처럼 외부 활동에 참여한 공녀다. 또 언제 뵐 수 있을지 모르니 이 기회에 조금이라도 공녀 또는 후작 영애와 친분을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아이들, 특히 하위 귀족의 아이들은 벌떼처럼 이벨리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로 모여들었다.
“공녀님, 저는 아벨 자작가의……!”
“저는 로지 백작가에서……!”
“공녀님, 언제 기회가 되시면 저희 집에도 방문을……!”
……지금이 바로 호신술로 모두 물리쳐버릴 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