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주 강력한 호신술을 배우다2020.11.02.
카론의 마음가짐이 무색하게, 이벨리아는 세 살이 될 때까지 공작저 내에서 가족들과 기사단의 사랑을 먹으며 안전하게 자랐다. 호위 기사가 선발된 후에 휴고가 아르티나 기사단을 다시 북부로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실패했다. 미친개들이 가기 싫다고 공작저 앞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마치 석고대죄 하듯 우리 아기씨 더 볼 권리를 달라며 며칠 밤낮을 소리 지르는 바람에 제국민들이 한번씩 구경을 하고 가곤 했다. 그럼에도 휴고가 마음을 돌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황제에게까지 상소가 올라갔다.
‘제국 유일 공작가가 기사단 인권을 빼앗는다. 악독하다. 우리에게 아기씨를 볼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마족보다 날뛰어주겠다.’
난감해진 황제가 그대의 기사단 좀 어떻게 해보라고 휴고를 황제의 집무실까지 부르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벨리아가 딱 다섯 살이 되는 해까지 만이다. 앞으로 마족 소탕은 팀을 나눠서 순차로 다녀오도록.”
결국은 휴고가 한발 물러서게 된 것이다. 만족스레 웃은 기사단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2년 뒤, 아기씨가 다섯 살이 되셨을 때에는 또 어떻게 공작저 생활을 연명할지 이미 창대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휴고는 전혀 몰랐다.
*** 환한 햇살이 이벨리아의 방을 비추고, 작게 지저귀는 새 소리가 조롱조롱 울려 퍼졌다. 어디를 보나 아침이었지만, 이벨리아는 여전히 이불을 침대 밑으로 밀어내고 꿈나라 여행 중이었다. - 똑똑.
“우리 아가, 아직 자나?”
“옹…….”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오라버니…….
“해가 저렇게 높이 떴는데도?”
“아냐……. 아침, 아니야…….”
“아침 맞아. 우리 아가, 이렇게 안 일어나면 다시 아가로 변한다?”
“흐우웅…… 이어나…….”
다시 아가로 변한다는 말에 이벨리아가 손으로 더듬더듬 이불을 찾다가 부스스 눈을 뜨고 세드릭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벨리아는 바로 어제, 검을 배우겠다고 기사단과 아버지, 오라버니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더랬다. 모두가 아직 아가라서 검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거절하자, 허리에 두 손을 챡 얹고 자신은 이제 어른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참이었다.
“우리 이브, 바로 어제 어른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
“아니었나?”
“그거 치소……. 안아줘어 오라버니…….”
그랬던 당당한 선포는 단 하루 만에 취소되었다. 세드릭이 이벨리아를 달랑 들어 안고 계단을 내려가 식당으로 가니, 이미 식탁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아르칸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어제부로 어른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왜 세드릭한테 안겨서 내려오지?”
“……아침에는 아가고 저녁에는 어른이야. 지금은 아침이니까 아가지!”
잠이 덜 깨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와중에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어내고 뿌듯해하는 이벨리아를, 이제 열한 살이 되어 제법 소년티가 나는 아르칸이 받아 안았다. 공작저는 아침부터 매우 활기가 넘쳤다. 겨우겨우 잠에서 깨어난 이벨리아가 식탁에 자신을 위한 초대장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으로 초대장을 받았다. 이벨리아는 봉투를 소중히 손에 쥐고 ‘나도 이제 초대장을 받을 나이가 되었다’며 저택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러 돌아다녔다.
“조은 아침이야, 헤론드! 이거 바……바!”
“앙녕, 하데-! 이거 뭐-게?”
그리하여 오전 11시경이 되자, 정원사부터 요리사까지 공작저의 모든 사용인들은 우리 아기씨가 초대장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벨리아는 아직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을 나이인 열여섯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초대장은 아르티나 가문에 보내면서 온 1+1 사은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너무도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에 그 누구도 아기씨에게 그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카시스 후작저에서 보낸 초대장이로군요.”
이벨리아에게 생전 처음으로 온 초대장은 카시스 후작의 생일파티 초대장이었다. 카시스 후작 가문은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하는 가문이었으며, 현 카시스 후작은 황제 및 휴고와 함께 험난하던 시절 전장을 누벼온 전우였다.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이벨리아를 두 손으로 덥석 들어 올린 아르칸과 세드릭은, 이벨리아에게 카시스 후작가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카시스 후작가는 마법사 가문답게 모든 것이 다 차분한데, 유독 후작가 영식이자 아르티나 공자들과 함께 검술 수련을 하고 있는 이크리안 카시스만 성격이 좀 이상하다며 말도 섞지 말라는 것이 그 설명의 전부였지만.
“아기씨, 아기씨가 후작저에 가시면 저는 누구랑 놀지요?”
온종일 아기씨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이미 적적해지자, 헤롤드는 살살 이벨리아를 꼬드겼다. 휴고는 다른 집안의 경사에 참석하면서 기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르티나 기사단 중 에딘과 카론의 동행만 허락하자, 헤롤드는 영리하게 이벨리아를 공략하고 있던 참이었다.
“휴…… 헤론드는 몬집만 어른이야. 대체 언제 천…… 처……얼 들래?”
헤롤드의 무릎밖에 오지 않는 이벨리아가, 검지 하나를 야무지게 펴고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며 한심한 눈으로 헤롤드를 쳐다보았다. 이제 제법 말이 트인 이벨리아는 어눌하게나마 저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밥그릇만한 세 살짜리 아기씨한테 언제 철드냐는 소리를 듣다니……! 충격에 빠진 헤롤드를 뒤로하고 이벨리아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혀 반짝반짝 빛이 나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등에는 작은 곰돌이 가방을 달랑거리며 신나게 공작저를 누볐다.
“이브! 이브 어디 있니?”
엘리시아가 후작저로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1층에서 이벨리아를 찾았다. 2층 회랑 갑옷들 사이에 숨어서 지나가는 기사들을 크왕! 크왕! 놀래주고 있던 이벨리아는 쏜살같이 계단 쪽으로 뛰어왔다가, 넘어질까 걱정해 뛰어 올라온 아르칸에 품에 안겨 털레털레 실려 내려왔다.
“오라버니이- 에헤헤.”
혼자 내려올 수 있어도 여전히 오라버니의 품이 좋았다. 이벨리아가 아르칸의 품에 얼굴을 비비자, 역시 여동생을 안아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마차 준비해두었습니다.”
집사 하델이 알리자, 빨리 출발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벨리아가 공작저 사용인들과 기사단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가따……오께!!”
“아! 잠시만요, 아기씨!!”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병아리 아기씨를 기사단이 멈춰 세웠다. 이벨리아가 뒤를 돌아 왜 불렀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기사단이 와글와글 몰려들어서 얼마 전 이벨리아에게 가르친 내용을 복습시키기 시작했다. 이날을 대비하여 꾸준히 우리 아기씨에게 호신술을 알려드렸지! 집 밖은 위험하니까!
“아기씨, 얼마 전에 가르쳐드렸던 거 복습입니다!”
“옹!!”
이벨리아가 뭐든지 물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고 눈을 반짝였다. 나 다 기억해! 다 기억해!
“자, 아기씨, 만일 공작저 바깥에서 마족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드렸죠?”
“아-주 무섭게 이협해! 아르르르르릉.”
“…….”
“…….”
아-주 무섭게 위협하라고 가르쳤더니 똥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는 이벨리아를 기사단 모두가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그래, 설마 마족이 나타나겠어? 마족보다는 찝쩍대는 사내놈들에 대한 호신술이 중요하지! 다음으로 넘어가자!
“아주 하찮…… 아니 아주 무서워 보이는 위협이었습니다! 잘하셨어요!”
하마터면 ‘아주 하찮은 위협’이라는 본심을 내뱉을 뻔한 헤롤드가 급히 수습했다.
“그러면 아기씨, 누가 아기씨한테 함께 밥을 먹자고 하면 뭐라고 하셔야 하죠?”
“시러요! 앙대요! 왜 이러세요!”
이벨리아가 금방이라도 원투펀치를 날릴 것처럼 두 주먹을 가드 올리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푸른 눈은 나름대로 사납게 만들어 노려보았다. 그러나 기사단의 눈에는 여전히 하찮기 그지없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기사들의 볼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걸 어쩌지……? 일단 다음 걸로 넘어가자!
“여……역시 똑똑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아기씨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
“발로……챠!”
“어디를요?”
“가웅데!”
‘이러캐- 이러캐-.’ 이벨리아가 ‘잇차 잇차’ 짧똥한 다리를 차올리며 시범을 보였다. 그제야 기사단은 깨달았다. 아기씨의 다리가 너무 짧아서 중요 부위까지 안 닿겠어!
“우……우리 아기씨, 아주 장하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누가 아기씨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면요?”
“소리 질러! 기사다안-! 기사다안-!”
이벨리아가 이번에는 자그마한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서 입에 가져다 대고 기사다안-! 하고 짜랑짜랑 외쳤다. 그래, 그나마 이 방법이 제일 낫군. 단장님과 카론이 따라가니까!
“아주 기특하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알려드린 대로 해야 하십니다?”
“옹! 걱뎡마!!”
이벨리아가 마치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쭈욱- 내밀며 입을 앙다물었다. 기사단은 이벨리아가 개중에 그나마 쓸모 있는 호신술을 곧잘 따라 함에도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을 보였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데……. 우리 아기씨 누가 괴롭히면 어쩌지……. 기사단이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아기씨를 따라가고 싶어 발을 움찔움찔, 현관문을 힐끗힐끗하는데, 휴고가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브에게 아주 좋은 걸 가르쳤군.”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약에 쓸래도 쓸데없는 호신술을 가르친 기사단을 휴고가 비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리하여 애한테 정말 좋-은거 가르친 정신없는 기사단에게 제 남편이 한 마디 따끔히 건넬 것이라 기대했다.
“간만에 기특한 일을 했으니, 오늘 훈련은 모두 면제다.”
……? 아주 좋은 걸 가르쳤다는 게,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좋은 걸 가르쳤다는 거였어요, 여보? 딸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한계 없이 바보가 되는 남편. 원래부터 정신 빼놓은 줄 알았지만 기대보다 더욱 정신없는 기사단.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 딸이 자라서 뭐가 되려나,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한 어머니였다. *** 이벨리아를 위해서 휴고가 특별히 흔들림 방지 마법까지 걸어서 특수 제작한 마차에서 이벨리아는 편안하게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차만 타면 항상 창문에 볼을 찰싹 붙이고 정신없이 밖을 구경하는 이벨리아 때문에, 하녀들은 늘 유리창 청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와아- 압빠아- 저거 바……!”
이벨리아가 무언가를 보라고 외치자, 휴고가 마차 벽을 두 번 두드려 마부에게 잠시 마차를 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내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휴고가 몸을 기울여 이벨리아의 손끝을 따라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딸이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보기만 해도 집먼지진드기가 가득할 것 같은 거대한 토끼 인형이 앉아 있었다. 전혀 휴고의 취향이 아닌 부담스러운 핑크빛에 휴고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마부 옆에 앉아 있던 하인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토깽이 인형.”
그냥 엄청 커다래서 한번 보라고 한 건데……! 이벨리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놀고먹는 강아지들한테 가서 사 오라고 해라.”
하인은 잠시 생각했다. 놀고먹는 강아지라 함은…… 아! 기사단!
“예, 주인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한 하인은 공작저로 달려갔다. ‘아기씨가 토끼 인형이 가지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기사단이 공수하라는 주인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라고 전하자, 놀고먹는 멍멍이들은 반색했다. 그들은 ‘세상에 우리 아기씨가 가지지 못하는 토깽이 인형은 없다!’라고 외치며 우르르 시내로 몰려나가, 토깽이 인형뿐만 아니라 아기씨를 닮은 병아리 인형, 강아지 인형, 곰 인형, 요즘 유행한다는 아기 상어 등 온갖 인형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검은 무복에 황금색 용 문양을 번쩍이며 양 옆구리에 인형 하나씩을 끼우고 돌아다니는 기사단의 모습은 유괴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그리하여 제국민들이 한두 번씩 뒤돌아 처량하게 잡혀가는 것이 인형인지 사람인지 확인하게 만들었다. 이벨리아는 그저 기사단이 이벨리아의 유일한 룸메이트, 밥 메이트, 잠 메이트, 놀이 메이트 등 수많은 직업을 가진 다재다능 만능 곰돌이 인형인 '곰치'의 친구 몇 명을 데려오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예상과 달리 후작저에 방문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이벨리아의 방에 이벨리아의 자리는 없고 온갖 동물 친구들이 와글와글 모여 동물의 숲을 이루고 있을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벨리아는 분명히 휴고를 말렸을 터였다.
“오라버니, 거기에 가면은, 칭구…… 많이 이써?”
이벨리아가 곰치를 꼭 끌어안고 다리를 달랑거리며 물었다. 또래 친구들이라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벨리아는, 최근 들어서는 곰치와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친구에 목말라 있었다.
“음…… 다른 가문의 아이들도 오니까. 아마 많이 있을 거야.”
“헤헤-.”
이벨리아가 기쁘다는 듯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웃었다. 반면 휴고와 엘리시아, 아르칸과 세드릭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 영광이 큰 만큼 무게는 무거웠다.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는 하늘의 별 따기. 대다수의 사람들은 떨어질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고자 호의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오거나, 때로는 약점을 찾기 위해 명백한 적의를 띄고 다가오기도 했다. 부디, 그들의 소중한 별이 상처받지 않기를. 세상을 깨닫고도 너무 아파하지 않기를. 가족들은 이벨리아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