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호위기사로는 누가 좋을까?2020.10.29.
기사단이 공작저에 도착한지도 약 한 달이 지났다. 아르티나 기사단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아기씨의 호위 기사로 선발되겠다는 일념 아래 주군께 잘 보이고자 연무장에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또 주군보다 더 큰 결정권을 지니고 계실 마님께도 잘 보이고자 예쁘고 바른 말을 사용하며 한껏 도덕적인 척도 해보았다. 그리고 남는 모든 시간은 그들의 아기씨에게 아낌없이 바쳤다. 이벨리아가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이 되어버린 아르티나 기사단은 이벨리아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공작저 안에서 아장아장 돌아다니고 있으면 혹여 우리 아기씨 넘어지시지는 않으실까 조마조마. 정원의 꽃들 사이에서 놀고 있으면 혹여 우리 아기씨 머리 위에 나무 열매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아가 한 명에 대형 멍멍이들 십수 명이 붙어 따라다니니 그렇게 정신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휴고가 경고했다.
“너희들…… 작작 좀 해라. 이브의 호위를 뽑아야 멈추겠나.”
아르티나 기사단은 이벨리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기민하게 휙 잡아채면서 답을 내놓았다.
“누구를 호위로 선발하시든 저희 모두는 아기씨의 호위 기사일겁니다! 어이쿠, 우리 아기씨 나뭇잎에 맞으실 뻔했네.”
가면 갈수록 더한다. 휴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대형견놈들…… 다시 다 북부로 내쫓아 버리든가 해야지, 원. 안 그래도 심심했던 와중에 놀이 친구들이 바글바글하게 나타나 기분이 좋은 이벨리아도 덩달아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전생의 기억은 거의 잊고 어린 몸에 정신이 맞추어진 지 오래. 기사들이 해주는 허무맹랑한 모험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칼을 맞부딪히며 서로 대련을 하던 기사들의 예민한 귀에 사박사박,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아기씨가 오시나 보다!
“대련 중지!”
일제히 병장기가 땅으로 내려진다. 아기씨가 오시면 아무리 치열하던 대련도 자동 중지였다. 혹시라도 아기씨 눈에 모래가 날려 들어갈까, 혹시라도 아기씨께 파편이 튈까, 기사단은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사서 하고 있었다. 이내 대연무장에 그들의 아기씨가 평소처럼 사뿐사뿐, 아니, 오늘만큼은 과하게 힘을 써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나타나셨다.
“기사다안-! 이거……바! 가반!”
기사들로부터 모험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요즘 이벨리아의 꿈은 모험가였다. 이벨리아가 등에 자기 키만 한 가방을 메고 영차 영차 걸으니, 뒤에서 보면 마치 가방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벨리아가 연무장에 오기까지 하녀들이 몇 번이나 가방의 앞면을 살피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아이고, 우리 아기씨, 모험 가시려고 가방도 싸셨구나!”
“옹!”
“안에는 뭐를 넣으셨나요?”
기사들이 눈에 보이는 날붙이는 모두 저 멀리 치워버리고 이벨리아에게 다가왔다.
“보여주께!”
가방을 어깨에서 풀려다가 가방 무게에 못 이겨 휘청대던 이벨리아는, 헤롤드의 도움을 받아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 안에서 자신이 준비한 모험 용품들을 하나씩 꺼내어 자랑하기 시작했다.
“빠앙-, 쪼꼬-, 까까-, 쥬쓰으!”
……어휴 간식만 잔뜩 챙기신 걸 보아하니 우리 아기씨, 모험이 아니라 소풍을 가시나보다!
“우리 아기씨는 역시 훌륭한 모험가십니다! 중요한 물품은 모두 챙기셨군요!”
육포나 침낭이나 검 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저희가 챙기면 되지요! 기사단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이벨리아를 칭찬하기 바빴다.
“우리 아가, 혼자서 모험은 안 돼. 오라버니랑 같이 가자.”
이벨리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연무장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던 아르칸이 검을 내려두고 걸어오며 말했다.
“옹! 가치 가! 오라버니랑, 기사단이랑 다아 가치 가!”
으억…… 그럼요, 아기씨! 마왕을 때려잡으러 가자고 하셔도 갑니다! 가! 눈을 반짝이며 빵 한 조각을 크게 앙 베어 무는 작은 아기씨의 곁. 커다란 기사들은 제각기 너무 소중해 어찌할 바 모르는 눈으로 아기씨의 관심을 끌 법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건넸다. 모르는 단어는 갸웃대며 물어보고 흥미로운 이야기엔 먹던 빵을 내려두고 집중하는 눈빛.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이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 분명히 아직 훈련 시간이 다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단은 가방을 메고 공작저 안으로 돌아오는 아기씨의 뒤를 쫄랑쫄랑 쫓아 들어왔다. 불가항력이었다. 커다란 배낭이 혼자 달랑달랑 걸어가는데 우리 아기씨 가방 무게를 못 이기고 뒤로 넘어지면 어쩌란 말인가.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십니까, 주군!”
이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아르칸의 무릎 위로 올라가서 앉았다. 그때였다. 응접실 의자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마들렌을 먹고 있던 세드릭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런데 우리 아가, 호위 기사로는 어느 기사가 제일 좋아?”
기사단을 노려보던 휴고의 눈도, 휴고의 눈을 피해 천장을 바라보던 기사단의 눈도, 모두 순식간에 이벨리아에게 쏠렸다. 시끌벅적하던 응접실이 금세 침묵으로 가득 찼다. 호위 기사! 내가 딱 정해놓았지! 아르칸의 품에 안겨서 아르칸이 먹여주는 초콜릿을 받아먹고 있던 이벨리아가, 초콜릿이 가득 묻은 입을 혀로 냠냠 닦으며 폴짝 뛰어내렸다. - 꿀꺽. 이벨리아가 자신이 점찍은 호위 기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모든 기사들이 침을 삼켰다. 아르티나 기사단의 뛰어난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였고, 개차반인 성격도 고만고만한 것은 기정 사실. 그러니 최종 선택은 주군께서 하시더라도 아기씨의 선택이 큰 작용을 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벨리아의 작은 발걸음이 가장 앞에 서 있던 헤롤드와 드웬을 지나치고,
“아……안 돼, 아기씨!!!”
중간 즈음 서 있던 알렉을 지나쳐,
“으아…… 아기씨, 다시 한 번 여기 좀…….”
가장 뒷부분. 가장 구석에 서 있던 기사의 옷자락을 잡고.
“카안-!”
카론. 이벨리아가 선택한 기사의 이름을 외치자, 마족들에게 몸이 꿰뚫려도 지르지 않던 아르티나 기사단의 비명이 공작저에 울려 퍼졌다.
“안 돼애애애애애-!!”
*** 카론 하벤스. 몰락한 자작 가문의 자제인 그는, 가문의 몰락 이후 생존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한다는 암살단에 들어갔다. 100년에 하나 나올 법한 실력이라며 암살 길드 내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무렵이었다. 카론의 뛰어난 실력을 위협으로 여기던 당시의 길드 장이 카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과부적.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십수 명의 암살자들을 고작 열네 살인 카론이 떨쳐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까진가. 이제 겨우 쉴 수는 있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카론이 유난히 붉은 달을 눈에 담던 순간. 어두운 골목길을 태양이 굽어보았다. 더러운 골목길과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 황금빛 머리칼은 지상에 내려온 태양, 그 외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황금빛 눈은 마치 먹잇감도 안 되는 하찮은 생물을 바라보는 용의 눈처럼 무심했다. 가볍게 검을 몇 번 휘둘러 길드에서 내로라한다는 암살자들을 해치운 그는, 어린 카론에게는 마치 신과 다를 바 없었다.
“소질 있군. 원한다면 따라와라. 기회를 주지.”
살기 위해 암살단에 들어갔으나, 본디 귀족이었던 카론이다. 가문의 긍지를 모두 버리고 암살자의 일을 하고 싶었을 리 없었다. 기회를 준다는 말에, 카론은 사지가 부러지고 온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음에도 사흘 밤낮을 구원자의 뒷모습만 보고 기어가듯 쫓아갔다.
“쓸 만하면 기사단에 넣어라.”
악착같이 따라간 곳. 아르티나 공작저였다. 이 제국의 영웅. 카론의 아버지가 그렇게나 동경해 마지않았던 공작. 그분이 이분이시구나. 이렇게나 빛나는 분이셨구나.
“받아……주십시오. 검술에는, 자신 있습니다.”
카론이 갈라진 목소리로 사흘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당하기보다는, 비굴할 정도로 어딘가 애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 대륙 제일의 기사단이라던 아르티나 기사단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 있었던 검술은 기사단장이라는 에딘의 옷자락 한 번도 스치지 못하였다. 암살단 내에서는 최고라고 칭송받던 은신도 헤롤드의 귀신같은 오감 앞에서는 맨몸을 그대로 내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론의 정신이 흐려지고 기어이 몸이 앞으로 쓰러질 때. 헤롤드가 카론의 몸을 턱 받쳐 들었다.
“통과! 앞으로 고생 좀 해라, 막내.”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애초부터 입단 시험의 목적은 기사단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라고 불리는 에딘이나 헤롤드를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 적 앞에서 얼마나 근성 있게 덤비는지, 전투 내에서 얼마나 성장하는지, 앞으로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시험이었다. 입단 후 카론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어둠에서 빛으로, 지옥에서 지상으로, 시궁창에서 존경받는 기사로. 탐욕을 위하여 남을 암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마족을 토벌했다. 죄인의 증거를 없애고 뒷돈을 받는 대신, 제국을 위협하는 왕국 잔당군을 소탕하고 떳떳한 녹을 받았다. 카론에게 아르티나 가문은 빛이자, 신이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이고 영예였다. 가문 기사단의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렇게 아르티나 가문의 인장을 등에 업고 북부를 누비며 신나게 마족을 소탕하다가 주군의 부름을 받았다. 얼마 전 태어나신 아기씨의 호위 기사를 선발한다 들었다. 아르티나 가문의 아기씨라니. 얼마나 고귀하실까. 또 얼마나 빛이 나실까. 아기씨를 뵈러 간다는 생각에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하였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감히 아기씨의 호위 기사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더러운 암살자 출신이었다. 어떻게 언감생심 이 제국에서 가장 귀한 아기씨의 호위를 맡는단 말인가. 카론은 그저 아르티나 가문의 새 핏줄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공작저에 다다라 하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다, 저녁 메뉴가 망아지라는 것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데,
“- 하데에, 이거 바……바!”
어디선가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병아리 소리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구분조차 힘들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카론은 저도 모르게 급히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세상에 저런 존재가 있단 말인가. 마치 그 자체가 작은 별인 것만 같았다. 마주치는 푸른빛 눈동자는 너무도 맑아 시선이 얽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자그마해서 약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실 것 같았고, 나무 열매에 맞으면 크게 다치실 것만 같았다. 적어도 카론을 비롯한 아르티나 기사단의 눈에는 그러했다. 아기씨를 처음 목도하는 순간부터 다른 기사단원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나, 카론은 그럴 수 없었다. 카론에게는 암살단원으로 활약하던 시절, 수많은 사람을 베어 넘긴 살기가 여태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제 고작 열일곱. 어리다면 어린 카론은 다른 기사단원들과는 달리 살기를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였다. 혹여 가까이 다가갔다가 아기씨가 살기에 놀라기라도 하실까, 카론은 그저 눈으로 아기씨를 좇는 것에 만족했다.
“카안, 이거 머……거!”
그런데, 아기씨께서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셨다. 어느 날은 아기씨의 말로는 아기씨의 목숨보다 귀하다는 초콜릿 한 알을 손에 쥐여주고 가시기도 하고,
“카안-! 노……라줘!”
자신의 앞에서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놀아달라며 요구하시기도 하였으며,
“모험, 가치가, 카안-!”
같이 모험을 가자며 조르기도 하셨다. 그저 감사했다. 호위 기사는 되지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언제든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지리라,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공자님께서 호위 기사로는 누가 가장 좋은지 여쭤보실 때, 미약한 기대조차 갖지 않으려 응접실 가장 구석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씨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던가. 설마, 아닐 거다. 헛된 기대다. 애써 부정하며 시선을 돌렸으나, 심장은 의사를 반하고 갈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저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던 그 순간조차 이토록 심장이 뛰지는 않았을 터다. 이내 저의 옷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그토록 급히 뛰던 심장이, 일순 움직임을 멈춘 듯 했다.
“카안-!”
쿵. 심장이 떨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 어딘가. 평생의 주인이 새겨졌음을. *** 어둑한 밤, 이벨리아가 이미 꿈나라로 떠나고 공작저 밖에는 휴고의 집무실에서만 아스라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댄 아직 어려.”
……안 되는 것인가. 카론이 입술을 짓씹었다. 주군의 마음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는 어리니까. 그는 암살자 출신이니까.
“그러나 어리다는 것은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지.”
설마. 카론이 눈을 들어 휴고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 이브, 잘 부탁하네.”
“……맹세합니다.”
제 검도, 제 목숨도, 제 영혼까지. 모두 아기씨의 것입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미처 내뱉지 못한 뒷말이었다. 달빛에 비친 카론의 눈은 제 작은 주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협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형형한 늑대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