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힘을 숨김? 어림도 없지2020.10.22.
「정령과 계약하면 정령사의 이마에는 정령들만이 볼 수 있는 인장이 새겨진다. 특히 첫 계약 시에는 계약자의 영(靈)에 정령과의 맹약이 각인되기 때문에, 이마의 인장은 약 10분간 화려한 빛을 내며 타오른다. 이때가 인간들이 인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것만 알면 당신도 정령사는 아니지만 정령 지식인!, 헤르온 출판사, 605 페이지 발췌] ***
“서…… 설마!”
한 귀족 여성이 외친 뒤에도, 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이제 첫 생일을 맞이한 어린아이의 이마에 빛나는 저 문양은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왜들 저러는 거야. 엄마가 분명 정령과의 계약은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했었는데……’
그 이유는 훗날 [이것만 알면 당신도 정령사는 아니지만 정령 지식인!]이라는 바보 같은 이름의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되었으나, 지금의 이벨리아는 정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벨리아의 입이 삐쭉삐쭉 나오고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세드릭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휙 내려와 이벨리아를 안고 휴고 쪽으로 걸어왔다. 음악 소리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그 모든 것이 멈춘 연회장. 홀로 움직이는 세드릭은 쉬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눈 돌려. 우리 아가 닳아.”
울망울망거리는 이벨리아의 눈을 바라본 세드릭이, 평소의 천진함은 어디에 가져다 버린 건지 잘 벼려진 칼과도 같은 눈으로 귀족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감히, 어디 내 동생을 그런 불경한 눈으로 쳐다봐.”
그에 귀족들의 시선이 이벨리아로부터 슬쩍 비껴갔다.
“쉬이- 우리 아가, 뚜욱.”
그러자 아르칸이 동생을 위해 공작저에서부터 챙겨온 담요로 이벨리아를 돌돌 감아 둥기둥기 얼렀다. 이마에서 환히 빛나는 인장이 가려지자, 그제야 연회장의 침묵이 쨍하니 깨어졌다.
“설마…… 저게…… 정령의 인장입니까……?”
평소 같았으면 지금처럼 고위 귀족들이 가득한 연회장에서 함부로 말도 꺼내지 못하였을 존재감 없는 귀족이 말하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공녀님은 이제 겨우 첫 생일을 맞으셨소! 과거 대정령사라고 불린 드루이드님이 무려 여덟 살에 정령과 계약을 맺었단 말이오!”
여태 데퐁트 후작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미로네 백작이 소리쳤다. 미로네 백작은 데퐁트 후작가문이 공작가문에 봉해지면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며 아르티나와 척을 지고 후작의 충견이 된 자였다. 데퐁트 후작가문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입장에서야, 아르티나의 공녀가 온 제국이 바라마지않는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이지 안 될 일이었다.
“눈이 있으면 제대로 보시오! 공녀님의 이마에 빛나는 저 인장은 물의 인장이 분명하오!”
에르카디아 공립 아카데미에서 정령술 교수로 재직하는 에프리 백작이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받아쳤다. 귀족들이 가열한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세드릭은 혹시라도 작은 여동생이 상처라도 받을까 조막만한 두 손으로 이벨리아의 귀를 막았다. 휴고와 엘리시아는 예리한 눈으로 연회장을 훑었다. 아군과 적군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보다 수월하게 식별 가능하다. 그때였다. 짝, 짝, 짝. 혼란스러운 공기를 뚫고 커다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심각한 상황에 누가 감히 손뼉을 쳐? 분위기 파악을 영 못한 박수소리에 있는 힘껏 눈을 찌푸린 귀족들은, 소리의 주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 온순한 양처럼 미간을 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조용-!”
그도 그럴 것이, 황제 폐하가 아니시던가.
“공녀의 이마에 빛나는 저 문양은 정령의 인장이 분명하지 않은가!”
과연 명불허전. 황제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경악에 찬 귀족들의 표정을 한 번 둘러본 황제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이제 겨우 첫 생일을 맞이한 터인데 정령과의 계약이라니! 그것도 아르티나 가문에서! 이런 경사가 또 있겠는가!”
황제가 머리 위에 얹혀 있던 황관을 벗어 휙 하니 테이블 위로 대강 던져두고, 드높은 단상에서 마치 날아 내려오듯이 달려왔다. 휴고와 엘리시아가 일어서 예를 갖추려 하였으나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저어 말렸다.
“되었네, 되었어!! 무려 10년 만에 새로이 나타난 정령사네! 10년! 게다가 겨우 첫 생일에 계약을 맺다니! 이 제국에 정령의 축복이 건재하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체통을 갖추던 황제는 그 흥분의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마치 황태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휴고와 함께 전장을 내달리던 그 시절처럼, 팔푼이 기색을 뽐냈다.
“세드릭. 내가 공녀를 좀 안아 봐도 되겠나?”
이상하다! 황제 폐하 이상하다! 황제의 신바람을 감지한 세드릭은 이벨리아를 안고 황제를 등지도록 몸을 돌리며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폐하, 조금 진정한 후에 안아보시지요.”
휴고가 말렸다.
“진정했네! 아니, 내가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는가! 지금 사방에서 우리 제국이 정령의 가호를 잃었다는 소문이 자자해! 과거의 영광이 죄 옛말이라는 헛소리들이 돌고 있다고! 그 와중에 탄생한 천금 같은 정령사네. 그것도 장차 대정령사까지 바라볼 수 있을!”
그러나 황제의 표정엔 홍조마저 떠올랐다. 높아질 제국의 위상과 제국민들의 찬양을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다. 반면 오락가락하는 듯한 황제를 매우 불신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던 세드릭은 작고 소중한 여동생을 조금 더 꽁꽁 싸매 감싸 안았다.
‘내가 지켜줄게 우리 이브!’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저씨, 황제 폐하라며. 황제 폐하면 우리 아빠 고용주 아니야. 그런 고로 우리 가문의 밥줄이나 다름없지! 밥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지, 소중해! 이벨리아는 자기가 몸담은 공작가의 재력이 영지에서 충분히 자생한다는 것은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단순히 공무원이니 월급을 받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이벨리아는 가문의 소중한 밥줄을 향해 짧은 팔을 쭈욱- 뻗었다.
‘기다려봐, 아빠, 엄마, 오라버니들! 밥줄한테 잘 보여서 우리 가족 계속 꽃길 걷게 해주려니까!’
황제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났다.
“어이구, 우리 공녀도 아빠의 친구를 알아보는구나!”
‘헤헤, 우리 밥주울-!’
황자들만 슬하에 둔 황제였다. 더더욱 친우의 딸이 예뻐 보였다. 황제는 저를 향해 배시시 웃는 이벨리아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이벨리아에게만 겨우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고맙구나, 아가. 훗날 우리 황태자도 잘 부탁한다.”
이벨리아는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황태자를 왜 저한테 부탁하세요, 저는 결혼 생각이 없어요, 밥줄!
“아우웅……! (싫어요!)”
“그래, 그래, 고맙다.”
이벨리아의 거부 의사 가득한 옹알이를 저 좋을 대로 해석한 황제는, 곧이어 시립해 있던 보좌관들에게 외쳤다.
“듣거라! 긴 기다림 끝에 탄생한 정령사다. 마땅히 제국민들에게 알리고 축하함이 옳을 것이다. 오늘부터 사흘간 이 수도 전역에서 새로운 정령사의 탄생을 환영하는 축제를 열도록 하라!”
반 황제파의 귀족들이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막을 명분이 없다. 어린 공녀가 정령의 맹약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됨과 동시에, 아르티나의 평판은 끝을 모르고 치솟을 것이 명백했다. 공녀가 아르티나의 약점이 되려나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막강한 방패가 되게 생겼다. 데퐁트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게 혀를 찼다.
“공녀의 생일파티가 수도 전역의 축제로 번질 줄이야. 이것 참 경사로군. 다들 남은 시간 즐거이 보내다 가시게.”
황제는 이벨리아의 머리를 한 번 더 토닥인 뒤 황급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새로운 인재의 탄생이다. 할 일이 많았다. 황제의 뒤로 연회장 문이 닫히자마자, 귀족들은 앞으로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공작과 친분의 끝자락이라도 쌓아보고자 한층 격렬하게 몰려들었다.
‘에잇, 시끄러워…….’
이벨리아는 휴고의 아늑한 품에서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옹알옹알 대다가, 이내 스펙터클한 생일파티에 지쳐 곤히 잠들었다. 화려한 황궁 밖. 1차 인마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다. 마족의 상극은 정령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이었다. 정령사의 존재는 곧 제국의 수호와 직결된 문제. 일신을 보호할 마땅한 힘이 없는 제국민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더없는 경사였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옛 왕국 잔당과 마족들의 습격에 지친 제국민들은 새로운 정령사의 탄생을 듣고 오랜만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하늘 위로 치켜드는 술잔. 건배사에 가득 담긴 아르티나에 대한 경배. 특히 작은 공녀에 대한 찬탄은 사흘 낮과 밤, 거리를 가득 채웠다. *** 이벨리아의 첫 생일파티가 끝나고 열 달가량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벨리아가 육체와의 동화에 따라 전생의 기억은 모두 잊었을 무렵. 꽤나 앙증맞게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아주 간단한 단어는 어눌하게 옹알거릴 수 있게 되었을 즈음. 휴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아졌다. 새벽까지 일에 치이다가 침실로 들어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덩달아 깊은 잠에서 깬 엘리시아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휘저어 마법 등을 켰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깼소?”
“침대를 그리 흔들어대는데 안 깨고 버티겠나요. 데퐁트 후작이 벌써 움직인 건가요?”
“그랬다면 이리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요. 이미 후작의 목은 땅에 뒹굴고 있을 터이니.”
데퐁트 후작을 비롯한 반 황제파 귀족들이 나름대로 칼을 갈고 있다지만, 아직 휴고의 눈엔 그저 하룻강아지가 깡깡대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요?”
“……사실, 우리 이브에게 호위를 붙여주어야 할지 고민이오.”
우아한 검지로 베개를 톡톡 건드리던 엘리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딸이 정령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것은 진심으로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온 귀족들 다 모인 연회장에서 훤히 드러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말씀드릴까 고민했어요. 우리 이브의 능력이 밝혀졌으니 접근하려는 자들도 많아지겠죠.”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다. 옛 왕국의 잔당군들에게도, 마족들에게도, 심지어 제국 내 아르티나 가문을 견제하는 반대 세력에게도 큰 위협이 될 것이 자명했다.
“지당하오. 이리 귀여운 데다가 능력까지 출중하니. 수도의 사내새끼들, 모두 눈을 파내 버려야-.”
“……? 지금 무슨 말씀이죠?”
“속 시커먼 놈팡이들이 내 딸에게 치대기 전에 호위 기사를 붙여야겠다고 말하는 중이오.”
“능력 출중한 우리 아가에게 누가 위협을 가할까 봐 붙이는 게 아니고요?”
가만 보아하니 영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호위 기사를 붙이자는 거였다. 이이가 정말! 찰싹, 늘 그렇듯 엘리시아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근육질의 팔뚝이 한 번 더 맴매를 맞았다.
“감히 누가 우리 아가의 안전을 위협한단 말이오. 그런 쪽의 위험보다야 쭉정이 같은 사내자식들 쪽의 위험이 더 중하오.”
엘리시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위험과 휴고가 생각하는 위험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추후 딸의 호위 기사로 선발되는 자에게 진정으로 주의해야 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각별히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좋아요. 어떤 목적이든 간에 호위를 붙이는 건 찬성이에요.”
“그렇다면 그 녀석들을 불러야겠군…….”
“호위를 임명하려면…… 그렇겠지요…….”
그 녀석들이라 함은 아르티나 기사단. 자타공인 미친개. 휴고와 엘리시아가 딸의 호위기사 임명을 그토록 고민했던 이유가 바로 그 미친개들을 수도로 불러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휴고가 피곤한 눈을 쓸며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