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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 생일파티,안녕 작은 물고기! (6/323)

6화. 첫 생일파티,안녕 작은 물고기!2020.10.19.

휴고가 기운을 거두자, 짓누르는 살기에 숨을 멈추고 있던 귀족들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연회장을 메웠다.

16549719788717.jpg‘저 자식, 성질 안 죽었네.’

묘한 만족감에 빙글 웃은 황제가 오케스트라 쪽으로 한 손을 휘젓자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운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아르티나 가문이 지정된 상석에 앉자, 황제의 등장으로 미처 선물과 인사를 건네지 못하였던 귀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16549719788721.jpg“공작 각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이번에 하르벤타 제국에 방문하였다가 귀중한 팔찌 하나를 구하였는데……!”

16549719788721.jpg“그건 귀한 축에도 끼지 못하지요! 각하, 저는 마력이 담겨 있다는 보석으로 만든 이 티아라를……!”

평소 다른 귀족들로부터 진상품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 아르티나 공작이기에, 보다 상위 귀족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은 귀족들에게 이번 생일파티는 절호의 기회였다. 적어도 공녀의 생일파티에서 공녀의 생일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들이미는 선물을 반려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나 어떤 희귀품을 들이밀더라도 휴고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재물과 관련해서는 부족함 하나 없는 이의 눈에 가장 잘 띌 수 있는 방법은 단연코 재물이 아니었다. 휴고가 시종일관 무심하자 귀족들이 슬슬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한 백작이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16549719788721.jpg“각하, 공녀님께서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공작부인을 꼭 빼닮으셨군요.”

발치에 쌓여가는 선물들을 일언반구 없이 바라보던 휴고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한 자를 눈으로 찾아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16549719788732.jpg“아, 그대…… 체르니 백작이었던가. 고맙군.”

휴고가 테이블에 앉은 후 처음으로 치하의 말을 건네자, 쓸데없이 선물의 귀중함만 어필하던 귀족들이 ‘바로 저거다!’ 깨닫고는 다시 굶주린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16549719788721.jpg“어쩐지! 머리칼만 물색으로 바꾸면 딱 공작부인과 같겠군요!”

16549719788721.jpg“그러고 보니 공자님들의 금안과는 달리 푸른 눈을 가지셨네요! 누가 보더라도 공작부인의 딸인 것을 알겠어요!”

귀족들이 앞다투어 이벨리아와 공작부인을 칭찬하자,

16549719788732.jpg“당연한 것들을 가지고 호들갑은.”

체통을 유지하려는 휴고가 늘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하며 말했다. 발톱을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화려한 연회장을 마치 피가 낭자한 동물의 왕국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사람의 피아(彼我)를 식별했다. 나름대로는 아주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였다.

16549719788804.jpg‘우리 가족들 건드리기만 해 봐! 내가 먼저 잡아먹어버릴 테니까.’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부모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으면 더더욱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

16549719788804.jpg‘크왕!’

그렇게 반짝이는 푸른색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던 이벨리아는, 다가오는 한 귀족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위험인물 리스트 1순위에 올렸다.

16549719817581.jpg“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이렇게 예쁜 공녀님의 탄생을 이제야 알게 되어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미리 알았더라면 탄생 선물이라도 드렸을 것을요.”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으며, 웃고 있는 입은 기괴했다. 찢어질 듯 환하게 웃는 입과는 대조적으로 마치 뱀처럼 번들거리는 회색 눈은 한 자락 웃음기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만이 뚜렷했다.

16549719817581.jpg“……특히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아닌데. 지금 눈이 찢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건데. 사실은 좀 무서울 거다. 뭣도 모르는 아가가 이렇게 예리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섬뜩하겠지.

16549719817596.jpg“우리 아가, 왜 이렇게 귀엽게 눈을 뜨고 있어.”

세드릭이 눈치 없이 이벨리아의 눈 주변을 쓰다듬으며 볼을 콕콕 눌렀다. 이 오라버니는 눈치가 영 없다.

16549719817581.jpg“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러 공작저로 방문하였어야 했는데…… 이거 참 죄송스럽습니다.”

16549719788732.jpg“헛걸음 하지 않아 다행이군, 데퐁트 후작. 요즘 손님을 받고 있지 않아서.”

휴고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보드카를 털어 넘기며 말했다.

16549719817581.jpg“아, 제가 큰 결례를 범할 뻔했습니다. 카시스 후작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 수도의 소문은 영 믿을 것이 못 되지요.”

16549719788732.jpg“정정하지. 달갑지 않은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네.”

휴고가 ‘아니 너만 빼고 다 받아’, 라는 말을 돌려서 건네었다. 노여울 법도 하건만 데퐁트 후작의 차가운 눈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았다. 이내 데퐁트 후작의 회색 눈동자와 휴고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치며 시선이 얽혔다. 말을 나누지는 않았으나, 마주친 시선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적의.

16549719817622.jpg“이브, 우리는 저기 가 있자.”

아르칸이 휴고의 품에서 이벨리아를 빼내어 조금 떨어진 자리로 가 앉았다. 아버지가 왜 저러시는지 묻는 세드릭에게 아르칸이 조용한 목소리로 간단히 설명했다. 차기 에르카디아 제국 황좌의 유력한 주인은 현 황태자다. 황후였던 로아나가 1년 전 병환으로 사망한 후 황비 베나카가 궁 내부 세력을 장악함에 따라, 현 황태자가 아닌 황자 에드윈을 황제로 올리자는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현 황태자가 압도적인 왕재(王才)를 가져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제대로 된 외척이 없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데퐁트 후작은 이를 이용하여 황태자에게 지속적으로 접근 중이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황제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 공을 인정받아 공작위에 봉해지는 것도 영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알만한 귀족들은 모두 아는 데퐁트 후작의 야심이었다. 그러나 휴고의 날카로운 감은 굳이 적의를 감추지 않고 내보이는 데퐁트 후작에게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을 감지해내었다. 이에 아르티나의 정보담당 부서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데퐁트 후작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치는 중이었다. 오라버니의 설명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데, 이벨리아의 눈앞을 무언가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벌써 비문증인가……?

16549719788804.jpg‘이게 다 뭐야! 정신없어!’

마치 물고기같이 생긴 날파리를 쫓아내고자 짧똥한 팔을 파닥파닥 흔들던 찰나였다.

16549719817632.jpg[왕의 흔적을 가진 인간.]

16549719817632.jpg[그분의 축복을 받은 유일한 존재.]

이벨리아의 머릿속에 잔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린 소녀 같기도, 혹은 소년 같기도 한 중성적인 목소리는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16549719788804.jpg‘내가……?’

입을 뻐끔대며 생각했을 뿐인데, 날아다니는 그것들에게 전달되기엔 무리가 없었나 보다. 자세히 보니 날파리보다는 물고기에 가까운 그것들은, 꼬리 대신에 기다란 잔상을 남기며 이벨리아의 주변을 유영했다. 

16549719817632.jpg[그래, 네가. 계약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들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16549719817632.jpg[그분을 닮은 청명한 기운, 청량한 느낌, 그분 곁에 있는 것 같아서 아주 기분 좋아.]

물고기들이 정말로 유쾌한 듯, 이벨리아의 주변을 한 바퀴 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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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19788804.jpg‘너희들은 정령이야?’

아무래도 전에 봤던 그 남자의 가족들인가 보다. 그 남자의 얼굴이나 나누었던 대화는 거의 잊혔지만 누군가를 만났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16549719817632.jpg[응, 우리는 정령이야. 물의 하급 정령.]

16549719788804.jpg‘전에 봤던 그 남자의 가족……?’

16549719817632.jpg[우리가 어찌 감히! 우리는 그분에 의해 탄생한 존재, 그분의 곁을 지키는 존재. 그분은 이 세상 모든 물을 관장하시는 왕이시지.]

그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하는 경배와 존경이 깃들어 있었다.

16549719817632.jpg[우리와 계약하자! 우린 네 어린 육체가 계약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어.]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물고기가 뜬금없이 계약을 외쳤다.

16549719788804.jpg‘계약?’

16549719817632.jpg[계약! 우리가 너를 지켜줄게.]

주변을 휘돌던 물고기도 거들었다. 너희 같은 물고기가? 누가 너희를 낚싯대로 낚아가지 못하도록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은데.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물고기 무시 발언을 가까스로 삼켰다.

16549719788804.jpg‘아니,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너희는 내 친구가 되어줘.’

16549719817632.jpg[정령에게 친구라…… 듣던 대로 특이한 인간이네.]

물고기가 키득키득 웃었다.

16549719817632.jpg[좋아, 따라 읊어봐.]

16549719788804.jpg‘나는 말을 못 하는데. 아직은.’

16549719817632.jpg[…… 지금처럼 생각만 해도 괜찮아.]

16549719788804.jpg‘창공과 대지, 물과 불. 모든 근원이 자리한 천칭 저편에 나 홀로 방랑하니. 영을 증거로 제시하여 감히 그대에게 동행을 청한다. 그대, 가장 근본인 물이여.’

얼떨결에 물고기의 말을 따라서 마음속으로 읊자,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물고기들이 어울리지 않게 장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16549719875167.jpg[그대, 저편 외로이 방랑하는 자여. 가장 근본인 물은 그대의 영을 받아 여행을 위한 검과 방패가 될 것을 맹세한다.]

이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물고기, 아니, 그들의 소개에 따르자면 ‘운디네’가 눈앞으로 살랑살랑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기다란 물줄기로 변해 이마로 내리꽂혔다.

16549719817632.jpg[됐다! 잘 부탁해, 계약자!]

온몸의 핏줄에 마치 냉수를 곧바로 때려 넣은 것처럼 시원한 기운이 가득했다. 낯선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량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16549719788804.jpg‘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해!’

물고기 친구가 생겼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으나, 예전에 침대 머리맡에서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상기하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가장 어린 나이에 정령과 계약한 사례가 여덟 살 전후라고 하였으니, 벌써부터 정령과 계약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섣불리 말했다가 괴물 취급을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뛰어난 능력은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 계약을 당분간 물고기와 저만의 비밀로 간직하자고 마음먹었다. 홀로 계약하고 홀로 생각하고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까지 한 이벨리아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케스트라 연주와 뱀 후작과 아버지의 설전으로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마치 이벨리아가 입장하였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욱 조용해진 것이 아닌가.

16549719788804.jpg“……우웅?”

분위기가 왜 이러지?

16549719788721.jpg“…….”

16549719788721.jpg“…….”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니,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 있었다. 심지어 ‘아이고, 귀여워.’가 아니라 ‘저게 뭐야?’하는 경악 어린 표정. 심지어 상석에서 느긋하게 구경을 하던 황제마저도 벌떡 일어서 의자 팔걸이를 잡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16549719788804.jpg“빠아……?”

모두가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두려워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잡고 아빠를 시선으로 찾자,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아빠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큰 오라버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아르칸 또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이벨리아의 이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16549719788804.jpg“으우…… 흐으앙…….”

뭔가 잘못된 걸까. 혹시 물고기와 계약을 하면 안 되는 거였던 걸까. 귀찮다고 투덜거렸지만 사실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한없이 달콤했는데 다 깨져버리는 걸까. 짧은 순간 치열한 고민을 하다가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오려던 찰나였다. 근처에 서 있던 한 귀족 여성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더듬거리며 외쳤다.

16549719788721.jpg“서……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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