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누가 우리 집안 좀 말려줘2020.10.15.
‘……비비안이 금손인가 내가 금 얼굴인가!’
작은 고개가 거만하게 치켜 올라갔다. 실상 목이 워낙 짧아 별 티는 나지 않았지만. 오라버니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외형이었다.
“꺄우우웅!!”
“‘꺄’의 톤이 높으신 것을 보아하니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자, 공자님, 우리 아기씨 준비되셨습니다.”
아기침대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아르칸은 비비안의 손을 거쳐 한 층 더 반짝거리는 여동생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검술 수련에 더욱 매진해야겠어. 추후 사내놈들과 결투를 벌일 일이 잦아질 것 같으니.’
아르칸이 결심을 굳히고 이벨리아를 안아 든 채로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공작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벨리아의 생일파티가 아르티나 가문의 축제를 넘어 이 수도 전역의 축제로 번질 줄은.
*** 아르칸이 이벨리아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자, 세드릭이 폴딱폴딱 뛰어와 이벨리아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우와……! 우리 이브 너무 반짝반짝해!”
“우리 아가, 오늘 정말 예쁘구나. 수고 많았네, 비비안.”
엘리시아도 이벨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비비안을 치하했다. 정작 휴고는 딸의 모습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를 건네었다.
“우리 아가, 우리 딸, 생일 축하한다. 아빠가 첫 번째지?”
분명히 자신이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해주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찬 휴고가 물었으나,
“으으응-.”
이벨리아가 고개를 젓고서 비비안을 가리켰다. 데자뷰인가……? 아르칸이 생각했다.
“그…… 그러면 두 번째지?”
“으으응-.”
이벨리아가 다시 고개를 젓고서 아르칸을 가리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첫 생일 첫 축하와 두 번째 축하를 모두 강탈당한 휴고는, 아무런 죄도 없는 비비안과 아르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우웅……가……?”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개떡 같은 '어디 가?'를 옹알거리자, 이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위대한 어머니, 엘리시아가 이벨리아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우리 아가, 오늘이 첫 생일이잖니. 황궁에 갈 거란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데 황궁을 왜 가요? 아빠? 엄마? 이벨리아가 ‘황궁’이라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며 제발 말려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 엄마 아빠 오라버니들은 가망이 없어! 말려줘 하델!’
아르티나 공작 가문을 오래도록 보필해 온 집사 하델의 말이라면, 우리 엄마 아빠도 다시금 생각해 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괜히 아르티나 가문의 집사이겠는가. 하델은 이벨리아에게 따뜻한 목도리를 돌돌 감아주며 한술 더 떴다.
“주인님, 연회장을 아기씨의 탄생화인 플루너스로 꾸며두었습니다. 아기씨께서 앉으실 자리는 탄생석인 <에스텔>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역시 유능하군.”
‘이런, 이 집안 자체가 가망이 없어.’
황궁, 즉 황제의 집이라는 위명에 압도당한 이벨리아는 차라리 빠르게 기억을 모두 잃어 이런 것들을 당연히 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시아의 품에 달랑달랑 안겨 마차로 옮겨졌다.
“음, 이게 당신이 새로 주문했다던 마차군요.”
“그렇소. 온갖 마법을 때려 박았지.”
아르티나 가문의 상징인 황금색 용이 그려진 마차는 휴고의 역작이었다. 이벨리아가 태어난 이후 소중한 딸을 아무 마차에나 태우고 다닐 수 없다는 일념으로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흔들림 방지, 벌레 퇴치 등 온갖 쓸데없는 마법을 걸어 달라 요청한 결과물이었다. 심지어 벌레 퇴치 같은 마법은 없다. 이 제국 어디를 가더라도 극진한 대우를 받는 마탑의 마법사들은 차마 공작의 명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벌레 퇴치 따위의 마법을 개발해야만 했다. 그 대가로 수도 저택 수채는 살 수 있는 법한 금화를 쾌척한 아르티나 공작의 추진력, 재력, 팔불출력은 마탑의 마법사들 모두에게 길이길이 남을 에피소드가 되었다.
‘호엥…… 편안해…….’
그렇게 흔들림 없는 편안함, 아르티나의 마차에 앉은 이벨리아는 포기가 정신 건강에 좋다는 생각으로 이내 유리창에 볼이 눌리도록 찰싹 붙어서 바깥을 구경했다. 유구한 인간사 드물게 나타나는 영웅을 경배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 황금색 용이 그려진 아르티나 공작가의 마차가 시내를 가로지르자,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던 제국민들은 영웅 가문의 마차를 향해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다하였다. ***
“도착했습니다, 주군.”
아르티나 기사단 단장, 에딘이 마차 문을 열며 도착을 알렸다. 아르칸이 곧바로 이벨리아에게 두 팔을 뻗었다.
“자, 우리 아가, 오라버니한테 안겨서 내려오자.”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첫 에스코트를 자처하자.
“형님, 치사하다!”
이벨리아의 첫 에스코트를 호시탐탐 노리던 세드릭이 항의했고. 그래, 치사하다, 내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아들. 너무도 유치해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 휴고의 표정도 찌푸려졌다.
“세드릭은 너무 작고 아버지는 너무 크시니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이벨리아의 첫 생일 축하도, 첫 에스코트도 비비안과 아르칸에게 빼앗긴 휴고는 먼 훗날 이벨리아의 사교계 데뷔탕트 첫 춤만은 자신이 차지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분노를 삼켰다. 사교계 데뷔의 첫 춤마저 휴고의 표현을 빌리자면 되도 않는 놈팡이에게 도둑맞을 것을, 지금의 휴고는 전혀 몰랐다. *** 무려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공녀의 첫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자들이다. 참석자들은 제각기 한 가락 한다는 자부심에 보기만 해도 무거운 보석들,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연회장은 높은 천장을 갖추도록 건축된 덕분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결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한편 회장 한구석에는 흰 테이블에 끼니를 대체할 만한 음식부터 간단한 핑거푸드까지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연회장 가운데에는 춤을 출 수 있도록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대, 음식, 음악. 세 가지가 연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이 자리 참석자 그 누구도 그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사는 단 하나. 이벨리아 아르티나.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공녀는 어떤 형식으로든 귀족들을 이끄는 자리에 군림할 것이었다. 안위의 보전이 가장 중요한 귀족들이었다. 자연히 관심사는 아르티나 공녀가 현재 가문 내에서 어떤 지위를 점하고 있는지, 추후 사교계에선 얼마만큼의 힘을 가질 지로 향했다.
“공녀님께서 공작부인을 닮아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시던데, 들으셨나요?”
“머리칼은 공작 각하를 꼭 빼닮아 태양 같은 황금색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공녀님께서 조금만 더 자라시면 공작부인께서 ‘제국 제일의 꽃’이라는 호칭을 공녀님께 넘겨주어야 하실 거라던데요?”
황제와 그를 굳건히 보필하는 아르티나 가문에게 우호적인 황제파 귀족들은 벌써부터 이벨리아에게 호감을 보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공녀라지만 황제궁의 연회장이라니…….”
“공녀님이 앉을 저 자리를 좀 보세요. 황제폐하의 자리만큼이나 화려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데퐁트 후작부인. 아르티나 가문이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과하지요.”
황제와 아르티나 공작의 권력이 현 귀족들에게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위 반(反)황제파 귀족들은 아르티나와 황가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는 이번 생일연회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각기 파벌 가까이에 서서 본인에게 유리한 의견을 피력하던 귀족들은 시종이 목을 가다듬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르티나 공작부부, 공자님들, 그리고 공녀님 드십니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회장의 문으로 가닿았다.
“…….”
“…….”
바로 직전까지 오케스트라의 소리도 묻힐 만큼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은, 이제는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이내 이 제국 그 어떤 귀족보다도 화려한 자태를 지닌 공작 부부가 들어왔다. 보통의 연회 같았으면 공작의 깎아놓은 듯한 외모에, 공작부인의 고아한 걸음에 넋을 빼놓았을 귀족들이 오늘만큼은 목을 길게 빼고 공작 부부의 뒤를 살폈다. 그러자 차기 공작으로서 자리를 공고히 한 아르칸의 품에 안긴 작은 여아가 보였다. 그 자체로 마치 작은 별인 듯한 황금색 머리카락, 한 점 어두움 없이 빛나는 푸른 눈. 많은 사람이 저를 보고 있어 긴장하였는지 두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화려한 연회장이 이리저리 시선을 빼앗는지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이벨리아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내던 귀족들마저 이벨리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숨을 멈출 만큼, 그 모습이 천진했다.
“세상에…… 정말 사랑스럽군요.”
어느 귀족이 저도 모르게 잇새로 감탄사를 내뱉자, 그제야 얼음 같았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깨졌다.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아르티나 공작 가문에 연줄을 댈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휴고에게 몰려들려던 찰나였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화……황제 폐하 드십니다-!!”
무려 황제가. 어느 특정한 귀족 여식의 생일파티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에 귀족들의 발이 일제히 굳었다. 머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맹렬히 돌아갔다. 친우가 그리도 자랑하던 딸을 보겠다며 눈치 없이 연회장에 참석한 칼라일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 사이를 가볍게 걸으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이 넋을 빼놓은 표정은 언제 보아도 즐겁다.
“예는 됐네. 나는 내 둘도 없는 친우의 딸 생일을 축하하러 잠시 들른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편안히들 놀게.”
귀족들을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 황제가 상석으로 올라가 앉았다. 휴고와 눈이 마주친 칼라일은, 마치 ‘나 잘했지?’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가벼워 보여도 단 하나의 허튼짓도 하지 않는 황제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은 다시금 인지했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황가는 여전히 아르티나 가문을 든든한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자리에서 황제궁의 연회장을 빌린 아르티나 가문, 혹은 이벨리아를 함부로 입에 담았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칼라일이 이 자리에 굳이 참석한 이유는 이벨리아를 보겠다는 목적 이외에도, 바로 이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공작, 주최자로서 한마디 하지 그러나? 우리 공녀가 해도 좋고.”
연회 참석은 공녀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황제의 선물이었다. 친우의 마음을 헤아린 휴고가 황제의 바람대로 움직였다.
“먼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이 제국의 영원한 태양에게 감사를.”
휴고가 황제의 곁에 서서 목례를 올렸다. 이어 참석한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잘 알고 있다. 그의 딸은 어쩔 수 없이 더러운 세계 한복판에 서게 될 것임을.
“그리고 내 딸, 이벨리아의 첫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그래서 굳이 많은 이들을 초대해 마련한 자리였다. 적어도 내 딸이 황실과 아르티나의 비호를 받고 있음을 알리고자.
“내 딸은 아르티나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아이요. 그러니 부디,”
일순, 휴고의 기운이 급변하더니 예기가 흘렀다.
“아르티나의.”
수만의 잔당군을 소탕하고, 수천의 마족을 베어 넘긴 살기는, 감히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이 되지 않기를.”
휴고가 숨을 멈추고 굳어버린 귀족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며 짓씹듯이 말했다.
“진심으로 바라오.”
연회에 자리한 귀족들 중 황제의 참석과 공작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모두가 직감했다. 작은 공녀가 이 제국에서 지닐 위상은 단지 공녀라는 지위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공녀의 작은 손짓이 곧 아르티나 가문의 방향이 될 것이며, 공녀의 적은 곧 일가의 표적이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