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황제궁 연회장을 강탈하다2020.10.12.
아르티나 공작저의 식당은 제국 유일의 공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매우 웅장했다. 또 그만큼 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휴고는 정사가 워낙 바빠 보통 황궁에서 저녁을 때우기 일쑤였고, 공작저에 있더라도 집무실에서 간단히 요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엘리시아는 황후를 제외한 모든 귀족 여성들을 이끄는 공작부인으로서 자선행사나 티파티 등에 참석하느라 공작저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리하여 아르칸과 세드릭 단둘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아르칸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세드릭은 조용한 저녁식사가 내심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태어난 이후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생 사전에 정시퇴근이라고는 등재되지 않았던 휴고가 여섯 시 정각이면 급한 공무도 뒤로 하고 칼퇴근을 하여 보좌관들을 기함하게 하였으며, 엘리시아는 저녁에 개최되는 행사는 모두 취소해버렸다. 모두 이벨리아의 눈에 들어보겠다고 한 마디씩 건네는 바람에 저녁 식사 자리는 자연히 떠들썩해졌다. 세드릭은 이 단란한 분위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우리 아가, 어제랑은 뭔가 달라진 것 같구나.”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휴고가 이벨리아와 눈을 맞추며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어제보다 훨씬 귀여워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말랑통통한 볼에 쪽- 입을 맞추며 말했다. 두 부자가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들을 하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 우리 이브 이리 주시오.”
휴고가 이벨리아를 향해 두 팔을 뻗자,
“아버지는 정무로 바빠 힘드십니다. 제가 안고 있겠습니다!”
세드릭이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어필했다. 제가 안을 수 있어요!
“아니, 세드릭 너는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돼서 이브를 안기에는 무리야. 어머니, 제가 안겠습니다.”
겨우 아홉 살인 아르칸이, 일곱 살은 아이를 안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타박했다. 엘리시아가 이벨리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두 강아지와 한 멍멍이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고개를 저으며, 이벨리아의 손에 작은 과일 조각을 쥐여주었다.
‘으웅…… 이건 먹기 싫은데. 누구 줘버리자!’
“바아-!”
아빠, 이거 드세요! 저는 먹기 싫으니까! 아빠를 부르며 과일을 쥔 손을 뻗었으나, 짧똥한 팔은 누구를 향해 뻗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테이블 위에 삐쭉 올라올 뿐이었다.
“오구, 우리 아가, 아빠한테 과일도 주고 아주 기특하구나!”
네, 아빠! 아빠한테 드리는 거예요!
“잠시만요, 아버지. 이브는 저한테 주려고 하는 거예요! 팔의 방향이 제 쪽이잖아요!”
아닌데, 작은오라버니. 그거 착각인데……!
“아니, 저를 부르는 걸 들으셨잖습니까. 아버지도 아니고 세드릭도 아닙니다.”
아르칸도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참전했다. 우리 아가가 아기 인생 처음으로 주는 과일이다! 저 과일은 놓칠 수 없어!
“눈동자의 방향을 보거라, 아들들아. 나를 보고 있잖느냐.”
“아니요, 아무리 아버지라고 하셔도 이건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 대환장 파티네. 이깟 과일 조각! 아무나 먹어랏! 이벨리아는 식탁 위로 과일 조각을 내동댕이쳐버렸다. 잠시간 흐르는 침묵. 내가 너무 버릇이 없었나 머쓱하던 찰나였다. 세 부자는 이벨리아가 과연 과일을 누구 쪽으로 던졌는지에 대해 다시 가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답도 없는 세 부자를 바라보며 엘리시아의 품에서 아기답지 않은 초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진정 부전자전이었다. *** 저녁 식사가 끝나고 휴고의 품에 안겨 정원 산책을 하고 돌아온 이벨리아는 구석구석 아르티나 가문 가족들의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방, 아기침대에 눕혀졌다.
‘오늘은 절대로 일찍 잠들지 않고 말하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어!’
굳게 다짐했었지만, 어린아이의 육체는 정신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곧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긴 하품을 하더니 깊은 잠에 빠졌다. 이불은 이미 걷어차여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앙증맞은 팔을 슈퍼맨처럼 뻗어내며 이불을 밀어낸 것 같았다.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보들보들한 잠옷은 배 위에까지 올라가 하얗고 동그란 배가 볼록하니 존재감을 과시했다. 꿈속에서 오라버니들과 어떤 재미있는 모험을 떠났는지, 혹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는지, 이벨리아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행복해보이네.”
이벨리아의 숨소리만 도롱도롱 울려 퍼지는 어두운 방에, 물빛 머리칼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읊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릴 듯 차가웠던 그의 눈은, 이벨리아에게 닿는 순간 놀랍도록 따뜻한 빛을 띄웠다.
“후- 무슨 잠을 이렇게…….”
이벨리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남자가 이벨리아의 말려 올라간 잠옷을 내리고 침대에 바로 눕혀주었다. 바닥에 무참히 팽개쳐져 있는 이불을 주워 덮어주려다가, 잠을 자는 자세를 보아하니 어차피 곧 떨어져 내릴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카사.”
불붙은 참새처럼 생긴 불의 하급 정령, 카사가 허공을 한 바퀴 휘젓고 남자의 앞으로 뽈뽈 날아와 날개를 살포시 접었다.
[무……물의 왕을…….]
“인사는 됐다. 이 아이의 이불 대용 좀 해줘야겠다.”
카사가 이벨리아의 머리맡에 올라앉아 주변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자, 그제야 만족한 물의 왕, 엘라임은 이벨리아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날 불러줘, 이벨리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마치 그 누구도 다녀간 적 없는 것처럼 희미한 달무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이벨리아는 아르티나 공작가 가족들과 사용인들의 과도한 사랑을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도 이젠 거의 가물가물했다. 아기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더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게 아르칸이 돌아오고 약 여덟 달이 지나 봄의 초입. 그러니까, 이벨리아의 첫 생일이 정확히 한 달 남았을 무렵이었다. 휴고 아르티나 공작은 일생일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르카디아 제국의 황제 칼라일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황제 칼라일과 휴고는 수많은 전쟁에서 피와 땀을 함께 흘린 전우였으며, 서로의 등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친우였고,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검술을 수련한 벗이었다. 그런데 칼라일이 황제의 관을 쓴 이후, 군주와 신하가 너무 격식 없이 지내는 것은 황제의 권위에 누가 될 수 있다며 얼마나 벽을 세우던지, 칼라일은 늘 그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약 일 년 전부터는 휴고가 칼라일의 집무실을 꼬박꼬박 드나들고 있었다. 대화의 대부분이 ‘우리 아가가 기다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또는 ‘이브가 어제 드디어 저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등등 순전히 딸 자랑을 위한 방문이었으나 칼라일은 그마저도 만족스러웠다.
“폐하, 아르티나 공작 들었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자랑을 하려고 그러나.
“어서 들라 하라!”
유일한 벗과의 만남이 늘 기꺼운 칼라일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알현 요청을 받아들였다. 무거운 집무실 문이 열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 빛은 홀로 다 받고 다니는 듯한 아르티나 공작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 외모는 늙지도 않는군. 재수 없는 자식.
“에르카디아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거 참 고지식하기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무슨 예의인가. 어서 앉아, 공작.”
칼라일이 한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은색 식기를 휴고 쪽으로 밀었다.
“들게. 이번에 지오스 왕국에서 시트리(* 오렌지와 라임을 섞어 놓은 맛이 나는 과일. 새콤하지만 생각보다 당도가 높다)를 진상하였길래, 공작 생각이 나서 쟁여뒀지.”
황제의 지위에 적합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워낙 위엄과 가벼움 사이 중도를 지키는 것에 능한 자다. 휴고는 그러려니 하며 만족스럽게 시트리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폐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대가 내게 청을 할 것이 뭐가 있는가. 뭐든 말해보게. 공무에서 손을 뗀다는 청만 아니면 다 들어줄 터이니.”
“황제궁 연회장을 빌려주십시오. 두 번.”
음? 벌써 황태자에게 선위할 때가 되었나. 헛소리가 다 들리는군.
“뭐라 했나 공작?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황제궁 연회장을 빌려달라고 들으셨다면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연회자앙?!”
황제가 이토록 놀라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제궁 연회장은 황제의 허가만 있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는 있었으나, 수백 년간 건국제나 황제의 탄신일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관례가 굳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휴고가 관례를 깨고 연회장을 빌려달라고 하다니…… 정령과 마족이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 놀라운 청이었다.
“아니, 흐음…… 내 궁의 연회장을 빌려주는 것은 문제가 안 돼. 제정신 박힌 귀족들이라면 이 제국이 어느 가문의 피로 유지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그대에게 내리는 후한 특혜에 반기를 들 자는 없지.”
평소 호쾌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답게, 칼라일은 흔쾌히 휴고의 청을 승낙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하고 휴고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연회장인가? 아르칸이 벌써 약혼식이라도 올린다던가?”
황제는 생각했다. 내 궁의 연회장을 빌릴 정도이니, 적어도 차기 공작의 결혼식, 또는 약혼식 정도는 되겠지!
“아르칸의 약혼식이면 연회장을 왜 빌린답니까. 그냥 공작저에서 하지.”
휴고가 고개를 기울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냐는 듯 답하더니,
“한 달 뒤가 우리 이브 첫 생일입니다.”
이번에는 마치 황제궁의 연회장을 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내 연회장을 차기 공작의 결혼식도 아니고, 하다못해 약혼식도 아니고, 공녀의 첫 생일파티에 쓴다고?
“공작,”
‘미쳤나?’라고 말을 이으려던 황제는, 휴고의 한 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을 보고 내뱉으려던 말을 급선회했다.
“그런데 왜 두 번인가?”
“추후 우리 이브 사교계 데뷔. 미리 예약해두는 겁니다.”
“…….”
칼라일은 심히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앉은 이 공작이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에서 야차같이 검을 휘두르던 그 공작이 맞는가. 황제의 혼란스러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무실 밖으로 나서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시트리가 잔뜩 놓인 접시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이건 전부 가져갑니다. 이브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니 내 건……?”
알게 뭔가. 휴고는 존엄하신 친우의 말을 간단히 무시했다. ***
“우리 아가, 일어났어?”
아스라이 햇살이 비추는 아침,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우웅…….”
이벨리아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오늘도 바닥에 떨어져 침대 위에 끝자락만 간신히 걸려 있는 이불을 영차 영차 침대 위로 끌어당기더니, 머리 위까지 폭 덮어쓰고 콩벌레인 양 몸을 웅크렸다. 아르칸은 보기 드물게 짙은 웃음을 지으며 이불 속에서 콩벌레를 발굴하고자 가까이 다가섰다.
“……흐아아”
아르칸이 이불 채로 콩벌레를 들어 올리자, 이벨리아가 내려놓으라고 꼼지락 꼼지락 항의했다. 항상 이벨리아의 뜻을 들어주던 아르칸은 오늘만큼은 이벨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욕실에서 대기하던 비비안에게 넘겨주었다. 더 자고 싶어 하는 여동생에겐 미안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 꺄르륵.
이벨리아가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이벨리아의 침대에 앉아 있던 아르칸은, 잠이 거의 깼는지 욕실 안에서 들리는 여동생의 맑은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예로부터 너무도 뛰어난 아버지를 두면 그 아들에게는 보통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감에 방탕한 삶을 살게 되거나, 아버지의 등을 쫓고자 철저히 발버둥치는 삶을 살게 되거나. 아르칸은 후자였다. 제국의 영웅인 아버지를 따라 하루빨리 소드마스터가 되어야 했고, 더불어 국정 운영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도 익혀야 했다. 막중한 의무에 제대로 웃음 짓는 일조차 없었던 아르칸은, 이벨리아가 태어나고 나서 저도 모르게 짓는 웃음이 많아졌다. 어린 여동생은 무거운 현실을 견뎌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이자 길을 잡아주는 나침반이었다.
“바아-!”
목욕이 끝나고 온몸이 흰색 수건으로 돌돌 감겨 얼굴만 빼꼼히 나온 이벨리아가 쪼작쪼작 걸어와 아르칸에게 폭 안겼다.
“에헤헤-.”
“우리 아가,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내가 첫 번째로 축하해줬지?”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첫 생일을 처음으로 축하해주었다는 기쁨에 가득 차서 물었다. 오로지 여동생의 첫 생일 첫 축하를 위해 세드릭과 아버지보다 일찍 일어나 이벨리아의 방문 앞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으으응-.”
그러나 이벨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비비안을 가리켰다. 항상 냉정하던 아르칸이 답지 않게 충격에 빠진 것을 뒤로하고, 비비안은 이벨리아를 꾸미기에 바빴다. 오늘을 위해 엘리시아가 특별히 주문한 물색의 원피스는 이벨리아의 황금색 머리카락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파이어로 만든 히아신스 머리핀은 이벨리아의 바다색 눈을 그대로 본 따 놓은 것 같았다. 비비안이 이벨리아를 안아 거울 앞으로 데려가 물었다.
“우리 아기씨,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아니, 이게 뭐야. 이벨리아는 조막만한 입을 떡하니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