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자존심을 내려놓은 오라버니들2020.10.08.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르칸은 고작 아홉 살이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 정도는 컸다.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세드릭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아이답지 않게 매우 어른스러운 기운은 말 그대로 휴고의 미니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생했다, 아르칸.”
휴고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아르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내 아들.”
엘리시아는 사지에서 돌아온 아들을 힘껏 안았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응접실 앞에 일렬로 서서, 그들의 큰 공자님에게 존경과 감사의 예를 갖추었다. 크으……. 우리가 모시는 가문이 바로 이런 가문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별고 없으셨지요?”
무려 여덟 달 만에 돌아온 공작저는 떠나기 전보다 한층 따스함이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보드라운 우유 냄새도 나는 것이 아무래도 새로 태어났다는 여동생 때문인 듯싶었다.
“별고라…… 우리 이브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딱 네 어머니를 빼닮았지. 웃을 때는 얼마나 귀여운지. 별고라면 별고다.”
무뚝뚝한 얼굴로 이 공작저에 하나뿐인 딸을 자랑하는 아버지는 매우 낯설었다. 근엄한 표정과 팔불출 같은 언사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얼마 전엔 아빠- 라고 하더구나. 아직 엄마- 라는 말은 못 하는데 말이지.”
승전 후에도 보이지 않던 저 승리감에 도취된 어조도 어색하다.
“우리 아가 아직 말 못 해요. 당신은 정말 듣고 싶은 대로만 듣네요.”
자신과 세드릭에게는 늘 엄하고 무거우신 아버지가 아니셨던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볼 때 이외에 이렇게 웃으시는 것은 아르칸의 아홉 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엘리시아가 이벨리아를 출산하기 다섯 달 전쯤 북부로 나갔다가, 이벨리아가 태어나고 약 세 달 만에 공작저로 돌아온 아르칸은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퍽 어려웠다.
‘대체 여덟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아르칸! 이브가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손 씻고 가서 인사부터 하렴.”
엘리시아가 아르칸에게 말했으나,
“아버지께 보고를 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누가 휴고의 아들 아니랄까 봐. 무심한 표정과 말투는 딱 가족 이외의 사람들을 대하는 휴고의 그것이었다.
“으응? 그렇지만 여동생을 한 번도 못 봤지 않니.”
“여동생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보고는 지금 해야 합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보다 후순위에 둘 수는 없습니다.”
아르칸이 칼 같이 말했다. 그는 이 공작가문의 후계였다. 어린 여동생 하나 보자고 중요한 보고를 미룰 수는 없음은 물론이다.
“내 아들이지만 참……. 집무실로 올라오거라. 거기서 듣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아들과 똑같았던 아버지가, 올챙이 적은 생각도 못 하고 아들을 나무랐다. 휴고와 아르칸이 휴고의 집무실로 올라가고자 계단으로 향하던 순간,
“형님!!!”
이벨리아를 끙차 끙차 끌고 내려오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된 세드릭이 이제 막 계단 아래에 다다라 있었다.
“세드릭.”
멀리서 다가오는 동생을 보며 아르칸의 황금색 눈이 휘어졌다. 저와는 정반대로 항상 쾌활한 동생은 언제나 저의 활력소였다. 그런데 세드릭이 안은 저 털뭉치는 뭐야? 8월, 여름이라서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혹여 이벨리아가 감기라도 걸릴까, 세드릭은 이벨리아를 담요로 돌돌 감싸 들고 내려왔더랬다. 설마 아직 쪼끄만 남동생이 더 쪼끄만 여동생을 여기까지 끌고 내려왔다고는 생각지 못한 아르칸이 털뭉치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눈을 좁히던 순간, - 쏘옥. 털뭉치 속에서 황금색 머리카락이 나타나더니, - 빼꼼. 이어서 맑은 푸른빛 눈과 홍조 어린 볼이 나타났다. 더워! 이 오라버니가 아가 질식시킬 일 있나! 도움을 요청하는 눈동자로 주변을 훑던 이벨리아는 앞에 선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아, 큰오라버니구나. 긴장한 입이 저도 모르게 오물거렸다. 낯선 이를 본 코는 마치 토끼처럼 발름거렸다. 작은 손이 꼬물꼬물 세드릭의 옷자락을 잡았다. 난 공부도 싫고 전장에 나가기는 더더욱 싫은데. 그저 적당히 놀고먹는 모래밭길만 걸으면 만족하는데. 그런데 저 사람이 ‘이 콩벌레. 공작가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해라!’라며 등을 떠밀 것만 같은데. 하지만 잘생기기는 정말 잘생겼다. 아마 한 일곱 해만 더 있으면 이 수도의 모든 여성들이 아르칸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지 않을까. 세드릭과는 또 달리 진중한 분위기를 가진 아르칸은 진정 차세대 에르카디아 제국의 아이돌이라 불릴만했다. 여하튼 일단 진창으로 쫓겨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아가의 특권을 써서 오라버니에게 예쁨을 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 에헤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이벨리아는 자신을 감싼 담요 속에서 꼬물꼬물 움직여 두 손을 빼낸 다음, 아르칸에게 손을 뻗었다. 적어도 다가와 마주 안아줄 줄 알았던 오라버니는, 가만히 서서 이벨리아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무안함에 이벨리아가 손을 내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데, 아르칸의 볼과 귀에 서서히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아르칸, 안 오나?”
아르칸의 보고를 들으러 집무실로 올라가려던 휴고가 못 박힌 듯 서 있는 아르칸을 불렀다. ‘여동생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소탕에 대한 보고는 지금 해야 합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보다 후순위에 둘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아르칸의 표정에 일말의 망설임이 어렸다.
“아, 보고하러 가? 다녀와! 이브랑 놀고 있을게!”
세드릭이 이벨리아를 감싼 담요를 벗기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이벨리아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펼치자, 아르칸의 발이 움찔거렸다.
‘내가 동화책 더 잘 읽어줄 수 있는데……. 세드릭은 아직 나보다 단어도 잘 모르는데.’
짧은 순간 치열하게 고민한 아르칸은 결정을 내렸다. 나는 제국 유일한 공작가의 후계자이다. 후계자로서 책무를 다해야지.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보다 후순위에 둘 수는 없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 생각해보니 그렇게 급한 보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따 저녁 드시면서 들으셔도 충분할 겁니다.”
그렇지만 후순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는 거라면 후계자로서 책무를 유기하는 건 아니니까. 응. 불과 5분 전, 이벨리아보다는 보고가 우선이라고 칼로 자르듯 선언했던 공작가 후계자 아르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큰오라버니는 작은오라버니와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들과 하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차기 공작으로서의 책무’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것 같았으니까. 자연히 큰오라버니가 나를 ‘공녀의 의무를 다하라!’면서 진창으로 밀어 버릴까 봐 전전긍긍했었으나, 그 걱정들이 전혀 무의미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벨리아의 방을 부드러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고, 항상 이벨리아의 곁을 지키는 곰인형이 침대에 놓여 있었으며 이벨리아의 전속 하녀인 비비안이 아기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단 하나만 빼고. 오늘도 어김없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한 아이, 세드릭은 검술 수련을 빼먹고 이벨리아의 방에 눌러 앉았다. 비비안의 의자 옆에 영차 영차 의자 하나를 옮겨 그곳에 앉아서.
‘……그래 뭐. 두 오라버니 중에 한 오라버니라도 이 공작가를 유지할 생각을 하면 다행이지! 큰오라버니가 항상 수업에 열심이니 작은오라버니 정도는 좀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될 거야.’
그런 생각으로 이벨리아 또한 어김없이 세드릭에게 방긋 방긋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 똑똑.
‘응? 큰오라버니는 수업 중일 거고, 아빠인가? 엄마인가?’
그러나 문이 살며시 열리고 빼꼼히 나타난 사람은 휴고와 똑 닮은 미니미, 아르칸이었다.
“비비안, 이브는 뭐하고 있…… 세드릭?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지금 검술 수련 시간 아니던가?”
검술 수련을 빼먹은 것을 아르칸에게 들켜 당황할 줄 알았던 세드릭이 어이없다는 듯이 곧바로 반격했다.
“그러는 형님은? 내가 알기로는 분명 지금이 경제학 강의 시간일 텐데?”
“경제학 강의는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 난 돈이 많다.”
“뭔 개똥 논리야, 형님. 그렇게 치면 나도 검술 훈련 할 필요 없다. 난 기사단이 있다.”
둘 다 잘한 것 하나 없으면서 서로 쯧쯧거리며 손가락질한다. 평소엔 나이보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이럴 때는 딱 어린아이들이 따로 없다. 두 오라버니들을 바라본 이벨리아는 결심했다. 한 명은 그렇다 치고 두 명 다는 안 된다. 이벨리아가 놀고먹는 길을 걸으려면 둘 중 한 명이라도 열심히 일해서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여행도 좀 보내주고! 그래야 할 것 아니겠는가.
‘안 되겠어, 소환한다! 우리 저택 대마왕!’
“-으아아아앙!!”
“안 돼, 이브!!”
“형님, 치……침대 밑에 숨어!!”
아르칸과 세드릭이 동시에 외치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보다가 침대 밑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그러나 아뿔싸, 엉덩이까지 모두 들어가긴 무리였다. 두 형제의 통통한 엉덩이는 침대 틀에 걸려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곧이어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 벌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공작부인, 엘리시아가 뛰어 들어왔다.
“비비안- 이브가 왜…… 너희들!”
망했다-! 엘리시아가 오라버니들의 양아치 짓에 으아앙- 울고 있는 이벨리아를 품에 안아 어르면서 침대 밑으로 삐쭉 나온 두 엉덩이를 찰싹 찰싹 두드렸다.
“너희들, 우리 이브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얘기했지? 특히 세드릭, 너는 한 번만 더 그러면 일주일간 이브 보기 금지령을 내릴 거라고 했을 텐데?”
이벨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이브 보기 금지령은 이브만 내릴 수 있는 건데! 그냥 수업만 안 빼먹게 해주면 되는데! 심심한데 놀아주는 오라버니들도 없으면 안 되는데!’
일주일간 이벨리아를 보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한 아르칸과 세드릭은 엘리시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어머니! 이브는 지금 부쩍부쩍 크는 시기에요. 일주일이면 이브인지 아닌지도 못 알아보게 커 있을걸요?”
그건 좀 아닌데. 그래도 잘한다, 작은오라버니!
“어머니를 꼭 닮은 어여쁜 여동생이 태어나니 자꾸 보고 싶어서 참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역시 뭘 좀 안다, 큰오라버니!
“벌써 이게 몇 번째니, 세드릭. 그리고 아르칸 너는 안 그랬던 애가……!”
그러나 엘리시아는 직무 유기의 현장을 낱낱이 보여주는 아들들에게 화가 많이 났는지 아르칸과 세드릭의 협공에도 전혀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가뜩이나 심심한데 오라버니들마저 이브 보기 금지령에 당해버리면 퍽 곤란하다. 이벨리아가 엘리시아의 품에서 오라버니들 쪽으로 양손을 쭈욱 뻗고 잼잼 하듯이 손을 조물조물하자, 두 오라버니들이 홀린 듯이 다가와 이벨리아의 한 손씩을 나누어 잡았다. 이쯤에서 필살기!
- 꺄항.
어벙한 웃음을 흘려주자, 아르칸도, 세드릭도, 그리고 화가 가라앉질 않았던 엘리시아도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너희들 두 번은 없어. 다음에는 진짜 이브 보기 금지령을 내릴 거야.”
엘리시아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 어머니. 근데 우리 아가 진짜 너무 귀엽다.”
“그래, 내 딸이지만 정말 귀여워.”
“우리 이브 다 크면 수도의 귀족 놈팡이들이 찝쩍거릴 텐데 어쩌죠?”
“뭘 어째. 허리를 접어버리면 되지. 그죠, 어머니?”
“그럼. 역으로 접어버리면 된단다.”
이전 생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좋은데. 이런, 연애사업은 여전히 순탄치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