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정령의 사랑을 받은 아이2020.10.05.
사후세계든 저승세계든 그녀와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모든 것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근거를 댈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는 자연히 꺼리게 마련이다. 불의의 사고 등으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스라이 다른 세계를 보았다고 하는 인터뷰를 읽을 적에도 가사상태에서 오랜 꿈을 꾼 것을 착각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반추했다. 일주일 전 퇴근길이었다. 그렇게 용하다고 소문이 나 늘 사람들이 북적대던 점집 앞엔 웬일인지 대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점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으니 그저 호기심이었다. 또는 무언가에 홀렸거나. 점집 안에는 서느런 방울 소리와 눈이 따끔거리는 뿌연 향내가 가득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딘가 기묘하게 생긴 점쟁이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자 직업부터 남자친구 여부까지 줄줄이 맞추기 시작했었다.
‘지배자의 사주를 타고났는데 현실은 시궁창이구먼. 이런 경우가 종종 있지. 사주는 기가 막히게 좋은데 운은 기가 막히게 좋지 않은. 직업은 검사…… 변호사? 눈꼬리를 보아하니 주변을 맴도는 남자도 많을 상인데 웬만해선 아가씨 눈에 차지도 않겠어.’
오. 어지간히 맞았다. 순간 혹하던 그녀는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정장 옷깃에는 재판 참석 시 달고 다니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떼는 것을 미처 잊었나 보다. 이걸 달고 있으니 직업을 유추하는 것도, 다 해진 옷과 가방, 구두를 훑으면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으리라는 것도 추론이 어렵진 않은 일이지. 깜빡 속을 뻔했다며, 점쟁이의 이어지는 말까지 웃으며 넘긴 게 실수였을까. 점쟁이가 마치 그녀에게만 천기를 누설한다는 듯이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고 속삭였다.
“내 원래 이런 말은 잘 안 하는데, 처자한테서 짙은 물안개가 보여. 보통 곧 물과 인연이 닿거나,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한테서 보이는 건데 말이야. 조심혀. 전자이면 좋겠으나 처자가 물과 인연이 닿을 일이 뭐 있겠어.”
그 이후 이야기들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추론과 물안개 같은 헛소리의 대가로 지불하는 복비 10만 원이 아까웠던 것만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용한 점쟁이가 맞긴 했나 보네.’
지금 와서 떠올리면 그 점쟁이의 말은 틀린 게 없긴 했다. 그녀는 어린 여자아이가 계곡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구하겠답시고 본능적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끝내 익사하였으니. 어두운 밤, 마치 시리우스가 떨어지는 아치문처럼 일렁이던 계곡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유속이 불어나 잡아끄는 듯한 물에서 벗어나고자 팔다리를 마구 허우적거렸던 것, 그러다가 코로, 입으로 물이 밀려 들어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던 것이 기억하는 전부였다. *** 조실부모하고 친척들의 손에 맡겨져 눈칫밥 먹으며 잡초처럼 들고양이처럼 홀로 아등바등 살았다. 얻어맞는 것은 일상이요,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도 믿을 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꽃길까진 아니더라도 모래밭길이라도 걷나 싶었는데. 그조차 걸을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 삶이었나보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다 죽어서 도착한 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 아니면 저승 변호사를 선임해서 염라의 재판을 거쳐야 하는지 파악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 이게 뭐야.’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물과 불이 함께 휘몰아치고 있고, 절대로 맞닿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창공과 대지가 맞닿아 있는 것이 보인다. 뜨거운 불이 몸을 스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으나, 물이 불을 휘돌며 감싸자 미약한 따스함만이 남는다. 살이 에일 듯 차가운 바람이 불다가도 대지가 창공에 맞닿자 황금색으로 변한 부드러운 바람이 손끝을 스쳤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은 둘째 치고 상식적으로 너무나 부조화스러운 광경이었다. 적어도 이곳이 천국은 아니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지옥이네, 지옥이야. 채무관계 청산 못 하고 죽어서 그런가.”
허탈하게 읊조리던 순간, 바로 뒤에서 진중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 아닌데.”
“!!”
뒤를 돌아보니 물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물빛 머리칼은 단순히 하늘색이 아니라 정말로 바다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언뜻언뜻 투명함이 비쳤다. 깎아놓은 듯한 얼굴은 어느 미술관에서 본 신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남자가 다시금 강조했다. 오해가 영 기분 나쁘다는 것처럼 한 글자씩 힘을 주어.
“여기 지옥 아니다.”
“그러면?”
남자가 신 혹은 그에 버금가는 드높은 존재라는 것은 눈칫밥으로 먹고 산 세월의 힘을 빌려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인식해도 이 상황 자체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런가, 편히 말을 놓는 남자에게 나 또한 친구에게 답하듯 툭 하니 반말을 내뱉었다. 남자가 순간적으로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빙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특이한 인간이네. 기운에 눌리지도 않고. 멍청한 건가.”
“난 한평생 수재란 소리만 듣고 살았는데.”
“그런 것 치곤 멍청한 걸. 물의 정령을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르는 인간은 본 적이 없는데.”
“뭘…… 구해?”
갸웃하자 사내가 흐음- 고심하며 긴 검지로 제 입술을 두어 번 톡톡 건드렸다. 말을 정리하듯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내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령들은 우리를 믿는 존재가 없는 곳에서는 살지 못해. 그대가 원래 살던 그곳에 떨어진 정령들은 소멸할 수밖에 없지. 그대의 세계에는 정령을 믿는 존재가 없으니까.”
단조로운 어조로 착실한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차원을 이동하려고 연 통로에 물의 정령 하나가 빠져 그대의 세계로 흘러갔다. 그대는 하필 내가 연 통로 근처에 서 있었던 바람에 내 기운의 영향을 받아 그 아이를 볼 수 있었고. 그 아이를 구하고자 무식하게도 뛰어들었지. 간단히 말하자면, 물고기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든 셈이랄까.”
물고기……?
“내가 본 게 뭐라고?”
“정령. 물의 정령.”
“정령이라면…… 요정 같은 거?”
“아니, 아주 달라. 그렇지만 그대가 있었던 세계의 지식으로 치자면 그래, 요정과 비슷한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어느새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는 의자에 앉아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들이켰다. …… 그러니까 내가 물에 사는 물고기 같은 요정을 구하려다가 죽었단 말이지. 탄생부터 죽음까지 팔자 참 일관성 있게 기구하다. 아등바등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죽으면 굉장히 억울하고 허무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사랑할 것 없는 세상엔 미련조차 남지 않나 보다. 이왕 죽은 목숨인데 그 요정이나 멀쩡히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그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어?”
차를 마시던 남자의 손짓이 뚝 멈췄다. 그는 굉장히 의외라는 듯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덕분에.”
“다행이네. 그러면 됐어.”
나는 웃고 있었다. 스스로도 남자의 보석 같은 눈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웃고 있다는 것을. 요정이든 사람이든 대수롭지 않았다. 존재 하나 구했다면 그걸로 충분히 숭고한 삶이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인간들의 책에 보면 정령들의 왕이 휘하 정령을 단지 소모품처럼 여긴다는 식의 글이 많던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작고 푸른 물고기 하나가 정겹다는 듯 남자의 주위를 휘돌았다.
“수천 년, 수만 년 내 곁을 지킨 자식 같은 아이들이야. 그대는 내 아이를 구하고자 망설임 없이 뛰어듦으로써 그 아이의 존재를 인식해 ‘믿음’을 가졌고, 덕분에 내 아이는 소멸하지 않을 수 있었어.”
모든 감정이 무뎌진 것처럼 차가웠던 남자의 눈이, 일순 따뜻한 빛을 품은 것도 같았다. 누구 앞에서도 굽힌 적 없었을 당당한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 과정에서 그대의 생을 잃게 된 건 정말 유감이야.”
“음, 딱히 아쉬울 것 없는 생이었어.”
“버려도 되는 생은 없다. 우리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존재야. 그대가 내 아이를 구하려다가 생을 잃었으니, 대가도 마땅히 생이어야 하지. 우리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그대에게 다시 삶을 부여하고자 한다.”
사랑. 요원한 단어였다. 겪어본 적 없었고 감히 바라본 적도 없던. 나는 침잠한 표정으로 멍하니 되풀이했다.
“생……?”
“그래, 생. 대신 지난 생의 기억은 곧 모두 잃게 될 거야.”
이제 겨우 진흙탕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진창에서부터 시작하라니. 생이 곧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던 내게, 새로운 삶 따위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높으신 분 같으니까. 단 한 번도 기도해본 적 없는 내가 단 하나만, 딱 한 가지만 기도드릴 수 있다면.
“있잖아, 너희들의 사랑도 정말 고마운데…… 그…… 혹시 가족들의 사랑을 받게 해줄 수도 있어……?”
그럴 수 없다면 그냥 다시 태어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할 거야. 씁쓸한 뒷말은 삼키고 머뭇거리며 묻자,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서늘한 손에서 따뜻함이 함께 느껴진다는 것은 제법 묘한 기분이었다.
“곧 또 보자, 내 사랑을 받은 아이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 아래 정신을 잃으면서도,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랑을 받은 아이'라는 말에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남았던 것도 같다. ***
“으우…… 우……!”
똥 쌌어요!
“으아…… 아우웅…….”
누가 여기 좀 봐줘요! 갓 태어난 병아리 소리와도 같은 옹알이는 다름 아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남자가 ‘곧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거야’라고 말한 것처럼 또렷하던 전생의 기억들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져 갔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라는 격언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기억을 잃고 완전한 아기가 되겠지. 혼자서는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짧똥한 몸뚱어리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한 보석으로 세공된 모빌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심심해. 노래라도 불러보자.’
아웅, 아우웅, 흥얼흥얼 거려보았다.
“어머, 어머, 어머, 아기씨께서 왜 이리 이상한 소리를 내시지? 어디 아프신가?”
‘…….’
그나마 가장 흥미로운 시간은 하녀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었다. 이벨리아를 돌보는 하녀들은 아르티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읊어주고는 했는데,
“아르칸 공자님께서는 후계자로서 책무를 다하신다며 북부로 떠나셨지요. 아기씨는 그렇게 든든한 오라버니가 있으셔서 정말 좋으시겠어요!”
“두 공자님들께선 벌써 수도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랍니다. 태양처럼 빛나는 머리칼과 눈이 주인님을 꼭 빼닮으셨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이처럼 대부분이 아르티나 가문에 대한 찬양이었다. 마치 세뇌라도 시키는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요. 너도 봤지 마가렛? 주인님과 두 공자님들께서 실 팔찌를 감고 다니시는 거?”
이곳에는 부인의 태교 기간 동안 아주 얇은 실 팔찌를 감고 끊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어여쁜 딸을 낳는다는 평민들 사이의 미신이 있었다.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든든하게 안아 올려주던 아버지의 팔 두께를 생각했을 때, 실수로 합- 하고 힘을 준다면 실 팔찌는 힘없이 끊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봤지요, 주인님께서 아홉 달 동안 실 팔찌 끊어진다고 기사들과 대련도 하지 않으셨다잖아요.”
그렇게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여동생의 탄생을 일생일대의 소원처럼 오매불망 기다렸다던데,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와 작은오라버니 세드릭이 내 방을 정말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똑똑-.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비비안, 아가는 자?”
조그마한 노크 소리 끝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황금빛 작은 머리통이 문틈으로 빼꼼- 존재를 알렸다.
“오셨습니까, 작은 공자님. 아기씨께서는 이제 막 간식을 드시고 주무시려던 차였습니다.”
“다행이다. 아, 비비안! 내가 여기 온 건 아버지 어머니께는 비밀이야. 검술 수련 빼먹고 온 거거든.”
세드릭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이벨리아가 누워 있는 아기침대 근처로 걸어왔다. 오라버니가 놀아주려고 검술 수련까지 빼먹고 오셨다는데, 애교 한 번 보여 드려야지!
- 헤헤.
까치발을 들고 아기침대에 두 팔을 걸친 채로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세드릭에게 아기 특유의 무해한 웃음을 흘려주자,
“억-.”
세드릭이 심장 부근을 부여잡으며 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비비안, 우리 이브 웃는 거 봤어? 지금 봤어? 세상에- 이 세상에 우리 이브만큼 귀여운 아가는 없어. 분명해. 확실해. 나는 단언할 수 있어.”
비비안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마치 속사포처럼 찬탄의 감정을 뱉어낸 세드릭이 이벨리아에게 ‘우리 이브, 한 번만 더 웃어줘!’라며 곰돌이 인형을 흔들어 대던 순간이었다. - 부우우우 고요하던 아르티나 공작저에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이벨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르르 떨었다. 순간 내가 뀐 방귀 소리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세드릭이 창문으로 다급히 뛰어가 까치발을 하고 밖을 바라보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이다! 이브, 형님이 돌아왔어!!”
큰오라버니? 의무와 규율의 대명사라던 그 큰오라버니? 내가 하녀들로부터 들은 큰오라버니라면 공작가 일원의 책무를 다하라면서 뒷덜미를 잡고 전장에 내보낸다던가, 마족을 잡아 오라고 한다던가, 최소한 무지막지한 공부를 시킬 것이 뻔했다. 모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가정환경에서 다시 태어났는데! 내 팔자 꽃길은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과한 의무가 지워지는 인생은 거부하고 싶단 말이야!
“가자, 이브! 형님 보러!”
세드릭이 이벨리아를 번쩍 안아 들고 뒤뚱뒤뚱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우웅…… 으아아……!”
싫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자고로 ‘빡센’상사 눈에는 최대한 띄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도리도리-.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으나 목이 워낙 두껍고 짧아 이벨리아의 도리질은 의미 전달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