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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국의 별, 태어나다 (1/323)

1화. 제국의 별, 태어나다2020.10.01.

광활한 대륙, 유구한 인간사. 가장 드높은 사랑과 경배를 받는 이를 꼽으라면 답은 쉽다. 아르티나의 막내딸. 제국의 사랑을 받은 공녀. 전례 없는 정령사. 불세출의 전략가. 이벨리아 아르티나. 제국의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고위 악마와 정령들까지 발아래 두었으니, 삶에서 걸은 모든 길이 꽃길이요, 걸으며 남긴 모든 발자취가 업적이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이벨리아의 자서전에는 ‘나는 그저 작고 소중한 연애를 하길 원했다.’라는 한 마디가 기재되어 있다. 공작가 일원들, 기사단, 정령들 등 그녀를 아꼈던 존재들의 애착이 과히 지나쳐 연애 한 번 하려면 여러 사람 목숨줄이 간당간당했다는 불평과 함께. 그런 그녀가 오랜 세월 곁을 지킨 존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지니, 어찌 보면 가장 원하던 목표는 달성한 것이 아닐까. [르노아 대륙 위인전, 헬리오 출판사, 877 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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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49718797123.jpg“허억……!”

흐린 달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어둑한 방. 얇은 슬립을 걸친 푸른색 머리칼의 여인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일어났다.

16549718797129.jpg“엘……? 쉬이…… 괜찮아. 괜찮아.”

여인의 기척에 곧장 눈을 뜬 사내는 여인을 안고 토닥토닥 달래더니, 이내 탁자 위 물을 따라 아내의 입에 손수 가져다 대주었다. 태양을 그대로 칠한 것 같은 황금빛 머리칼에는 감히 어둠조차 내려앉지 못했다.

16549718797123.jpg“…… 휴고, 꿈을…… 꿨어요.”

16549718797129.jpg“누가 감히 꿈에서 그대를 괴롭힌 거지. 잡아다 죽-.”

가만히 듣던 엘리시아가 제 남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16549718797123.jpg“금지 단어 말하지 말아요! 우리 아기가 전부 듣는다고요!”

엘리시아에게 아이가 찾아온 뒤 휴고에게는 세상 모든 거친 단어 금지령이 내려졌다. ‘죽인다’ 역시 마찬가지. 이 에르카디아 제국 단 한 명뿐인 공작이자, 대륙 전역을 뒤져도 손에 꼽는다는 소드마스터로서 전장에서도 감히 그 누구도 손끝 하나 댈 수 없다고 칭송받는 자.

16549718797129.jpg“실수였어. 미안하오.”

아무리 그라도 부인 앞에선 그저 충실히 말 잘 듣는 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품을 즐기던 엘리시아가 꿈을 다시금 곱씹다가 조용히 말했다.

16549718797123.jpg“아무래도 태몽을 꾼 것 같아요.”

엘리시아가 휴고에게 기대며 속삭이자, 침대 헤드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휴고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16549718797129.jpg“어떤 꿈이었소?”

배 속 아이의 성별은 엘리시아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었으나, 매사에 초연하던 휴고는 정말 이례적으로, 아주 강렬하게 딸아이를 원했다. 얼마 전 친분이 두터운 후작가에 일 처리 차 방문하였다가 이제 막 세 살이 되었다는 영애를 보았는데, 영애가 후작부인을 그대로 축소해두었다고 할 만큼 똑 닮은 것이 그리도 부러웠더랬다. 공작부인을 사랑해마지않는 휴고로서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모두 엘리시아보다는 휴고를 닮은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던 와중에 제 어머니와 똑 닮은 어린 영애를 보고 나니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의 흔적을 이은 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 이후였다. 휴고가 딸을 낳기 전에 자주 꾼다는 태몽까지 주르르 읊을 정도로 딸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심지어 추후 태어날 딸을 위해 몇 날 몇 밤을 고심하여 이름을 지어두기도 했다. 고대어로 샛별을 뜻하는 ‘이벨리아.’ 왜 태양이 아니라 별을 뜻하는 이름인지 묻는 부인에게, 휴고는 답했었다.

16549718797129.jpg'태양은 의무가 너무 크니까. 우리 딸은 지위는 누리되 자유로웠으면 싶어서.'

답이 만족스러웠기에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이름은 예전부터 이벨리아로 정해진 상태였다. 얼마나 딸을 원하기에 이러나 싶어 엘리시아가 낮게 웃으니 휴고가 다시금 엘리시아를 품에 넣고 조르듯 물었다.

16549718797129.jpg“응? 부인, 복숭아? 연꽃? 백합?”

16549718797123.jpg“미안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아니에요. 어떤 장소였는데, 물과 불이 한데 어우러지고, 바람과 땅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어요. 누군가 잘 부탁한다며 제게 커다란 빛 한 덩이를 안겨주었고요.”

영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남편의 표정에 엘리시아가 살포시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16549718797123.jpg“확실하지는 않지만 고서(古書)에 전해 내려오는 정령계의 모습과 흡사한 것 같았어요. 아마 태어날 우리 아가는 정령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닐까 싶네요.”

16549718797129.jpg“혹시 빛이 여아의 형상처럼 보인다거나…… 복숭아처럼 보인다거나…….”

16549718797123.jpg“어허-.”

16549718797129.jpg“하지만 우린 이미 아들이 둘이나-.”

16549718797123.jpg“쓰읍-.”

16549718797129.jpg“…… 그래, 성별은 중요치 않지.”

에르카디아 제국은 르노아 대륙의 명실상부한 패자다. 마족들과의 충돌이 끊이질 않는 대륙. 제국이 지닌 정령사라는 존재는 효율적으로 마족들에게 대항하게 함으로써 오래전 에르카디아 왕국을 제국의 지위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그 존재가 급속도로 줄어들어 현재 중급 정령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와 계약한 정령사는 황궁 전속 정령사 대여섯 명과 아카데미 재직 중인 두어 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상급 정령과 계약한 존재는 나타나지 않은 지 수십여 년이 흘렀다. 그러니 간간이 나타나는 타 왕국의 잔당과 주기적으로 대륙을 위협하는 마족들을 소탕해야 하는 제국으로서는 정령사의 존재가 간절했다. 그런 정세를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엘리시아 본인이 물의 중급 정령과 계약한 황궁 전속 정령사인 만큼, 자신의 아이가 정령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다면 그녀에게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날 새벽, 휴고는 다시 깊은 잠에 든 엘리시아의 배에다가 대고 당차고 강한 공주님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속닥속닥, 엄마에겐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밤새. 오로지 건강한 딸이기만 하면 정령의 축복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는 공작 휴고. 정령의 사랑 하에 태어나 준다면 성별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는 공작부인 엘리시아. 서로 다른 희망을 품은 밤이 지나고, 고요한 샛별이 뜨고 있었다. *** 저벅 저벅 저벅. 휙-. 저벅 저벅 저벅. 휙-. 아르티나 가문의 둘째 공자, 세드릭 폰 아르티나는 눈앞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공작이자 제 아버지를 평소답지 않게 매우 불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6549718828022.jpg“아버지, 좀 앉아 계시지요. 어머니도 동생도 무사할 것입니다.”

16549718797129.jpg“되었다.”

세드릭이 휴고에게 좀 앉을 것을 권하였으나 휴고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아버지…… 제가 정신이 사나워서 그럽니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면서 굳게 닫힌 분만실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넓디넓은 공작저 2층, 엘리시아가 산통을 느끼고 분만실로 들어간 지 어언 일곱 시간이 경과했다. 해가 지는 저녁시간이었는데 벌써 만월이 떴다. 그럼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릴 기미도 보이지 않고 엘리시아의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만이 간간이 회랑을 울리고 있었다. 이에 휴고는 혹여 부인이 잘못될까, 아이가 잘못될까. 온갖 값비싼 그림 및 동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회랑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가, 다시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터벅터벅 걸어 돌아오는 쓸데없는 짓을 무려 일곱 시간째 반복 중이었다.

16549718828022.jpg‘형님도 태어나는 동생도 모두 무사해야 할 텐데. 아버지는 형님 걱정은 하고 계시는 건가 모르겠네.’

세드릭은 치미는 불안감에 애써 정신을 분산시켰다. 안타깝게도 동생이 태어나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북부로 떠난 형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세드릭의 형인 아르칸은 아르티나 가문의 장자이자 후계자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이 되었음에도 견학 겸 참관을 위해 마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북부로 떠나는 원정대를 따라갔다. 엘리시아와 세드릭은 굳이 벌써부터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말렸으나 아르칸은 ‘아르티나 공작가의 적통한 후계자로서 마땅한 책무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말릴 줄 알았던 휴고는 아홉 살이면 출진은 이르다고 하면서도, 아르티나 가문의 믿음직한 기사들이 주도하는 소소한 토벌을 견학하기에는 부족함 없다며 흔쾌히 아르칸을 북부로 딸려 보냈다. 세드릭은 형님의 정신세계도, 아버지의 정신세계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홉 살이면 신나게 먹고 자고 놀 나이 아니야? 형님이 딱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아 아홉 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골격이 비교적 장대하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늘 함께 있던 형제가 사지로 떠나는 마당에야 세드릭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동생을 출산하는 오늘까지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으니, 세드릭은 자나 깨나 아르칸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드릭의 생각이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걱정에서 형님에 대한 걱정으로 넘어간 그 순간,

16549718855505.jpg- 으아아아앙!!!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두꺼운 분만실의 문을 뚫고 회랑을 울렸다. 세드릭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16549718828022.jpg“울음소리가 천하대장군 감인데!!”

마침 서성이던 발걸음이 회랑의 반대편 끝에 닿아 있었던 휴고는 훌륭한 신체능력을 이용하여 단숨에 분만실 앞으로 달려왔다. - 끼이익 분만실의 문이 열리고 엘리시아의 전속 하녀와 분만을 돕던 몇 명의 하녀들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왔다. 휴고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16549718797129.jpg“부인은 무사한가? 아이는? 손발은 다 달려 있는가? 중요한 부위는 달려 있는가 달려 있지 않은가?”

네? 중요한 부위요……? 잘 못 들었습니다만……? ‘중요한 부위’ 물음에 잠시 당황하던 하녀는 이내 공작 각하께서 얼마나 따님을, 공녀님을 원하셨는지 상기해내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답했다.

1654971885552.jpg“마님과 아기씨는 모두 무사하십니다. 아주 건강한 공녀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경하 드립니다, 주인님.”

1654971885552.jpg“마님을 똑 닮아 아주 어여쁘신 아기씨입니다. 감축드립니다, 주인님.”

16549718797129.jpg“뭐라……?”

일생동안 늘 기민함을 유지했던 휴고의 사고가 ‘공녀’라는 말을 듣고는 일순 정지하자,

16549718828022.jpg“공녀? 여동생이란 말이야?!”

분만실 문 앞으로 호다닥 뛰어온 세드릭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폴짝 뛰었다. 혹시 남동생일까 봐, 남동생이 배 속에서 듣고 속상해할까 봐 말은 하지 않았었지만, 사실 세드릭과 아르칸 두 형제 모두 아버지만큼이나 여동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아르티나 가문의 두 형제는 카시스 후작가 영식과 함께 주기적인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영식은 수련 도중 시시때때로 여동생 자랑을 해대었더랬다. 아르티나의 형제들에게는 없으면서 이크리안에게 있는 유일한 것이 여동생이었다. 이 주제를 꺼내면 아르티나 형제들의 눈빛에는 늘 호기심이 어렸다. 그것이 재밌었던 이크리안은 형제들을 놀리려는 목적으로 더더욱 가열한 동생 자랑을 흘려왔다.

16549718828022.jpg‘여동생은 남동생하고 뭐가 달라?’

1654971885552.jpg‘되게 작지. 그리고 세드릭 너보단 훨씬 귀엽고.’

아르티나의 두 형제들은 ‘여동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궁금했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왠지 이크리안에게 지는 기분이라 여동생 따위 부럽지 않다고 외쳐대던 그들은 실상 마음속으로 ‘나도 여동생……’을 수백 번 되뇌었더랬다.

16549718828022.jpg‘됐다, 이안 카시스 이 자식! 나도 드디어 여동생이 생겼다! 울음소리는 장군감인!’

분만실로 들어가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폴딱 폴딱 뛰어 안을 엿보던 세드릭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휴고가 다급히 분만실로 들어갔다. 긴 시간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누워있는 부인이 형용할 수 없이 안쓰럽고 감사하여 휴고는 곧장 침대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부인과 눈을 맞추었다.

16549718797129.jpg“부인, 수고했소. 정말 고생 많았어.”

휴고가 땀에 젖은 엘리시아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토닥였다.

16549718797123.jpg“…… 휴고, 우리 딸……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공녀님이래요.”

공작저 밖에서는 무(武)의 대명사로 불리는 휴고의 눈에 옅은 물기가 어렸다. 그 눈을 행복하게 바라보던 엘리시아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휴고는 엘리시아의 이마에, 볼에, 입술에 경애를 담아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렇게도 바라마지않던 딸을 눈으로 찾았다. 아기를 안고 있던 하녀가 휴고의 품으로 아기를 넘겨주었다. 아르칸과 세드릭이 태어났을 때는 덥석덥석 잘만 안던 휴고가, 마치 손을 대면 부서질 꽃잎을 만지듯 딸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속삭이며 첫인사를 건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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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18797129.jpg“…… 아가.”

배 속에서 자주 듣던 목소리라는 것을 잘 아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이가 입을 오물거렸다. 휴고의 손이 발발 떨렸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는 이만큼 여린 것을 안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의 눈이 살포시 뜨였다.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 휴고는 경탄했다. 그토록 바라던 부인의 눈동자 색과 꼭 같았다. 휴고가 아이의 이마를 한 손가락으로 쓸며 속삭였다.

16549718797129.jpg“이벨리아. 내 딸. 네 하늘에 비가 내린다면 이 아비는 언제든 달려갈 우산이 되어줄 것이다. 네 앞에 편치 않은 길이 있다면 세상 모든 꽃을 꺾어서라도 발밑에 뿌려줄 것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아이는 그 어떤 맹세를 건네어도 부족할 만큼 소중했다.

16549718797129.jpg“…… 우리 아가, 우리 딸. 우리에게 와주어 정말 고맙다.”

르노아 대륙력 1030년. 샛별이 지켜보는 그 시간. 이 제국의 별, 정령의 사랑을 받는 아기씨, 위대한 존재들의 맹약자. 장차 수많은 수식어로 불리게 될 이벨리아 아르티나가 공작저 모든 식솔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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