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차강진입니다.”
-아, 네. 대표님.
“옆에 그 사람 있습니까?”
목소리도 듣고 싶고, 보고도 싶고...... 만지고도 싶었다.
-아, 아뇨. 저만 있어요.
“......그렇군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겐 말하지 말고 지음이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주세요.”
전화를 끊고 메시지를 확인한 강진이 후,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곁에 있었더라면 바꿔 달라고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냈는지 강진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온정리로 가는 길에 잠시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작은 꽃다발을 골랐다.
같이 지내면서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을 건넨 적이 없다는 게 떠올라 평범하고도 기분 좋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작고 소담스러운 들꽃다발을 보며 강진은 가슴이 뛰었다.
한지음을 만나러 간다는 게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깊어갈 때까지 강진은 지음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느라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른다.
“후.......”
긴장감 때문에 그가 숨을 몰아쉬며 넥타이를 풀었다.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간다고 해도 한지음이 그를 받아줄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받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툭, 투두둑.
온정리로 향하는 길에 비가 내렸다.
“......당신과 비는 어쩐지 잘 어울리는 것 같네.”
강진은 매번 그녀를 만날 때면 비가 내렸던 걸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긴장해서 평소 하지 않던 혼잣말을 자꾸만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일정한 속도로 와이퍼가 움직이는 걸 보며 강진은 조금 더 속력을 올렸다.
***
그가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른 채 지음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가게 아주머니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까지 다녀오느라 시간이 좀 늦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너무 늦어서 비가 오네.”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그 전에 일을 마치려 했는데, 그새 몸이 굳었는지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자전거 페달을 빠르게 밟았다.
빗물이 눈과 입 안으로 들이쳤다.
빨리 달린다고 발을 재게 놀렸는데도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끼이익.
담 옆으로 세워져 있는 차를 보고 지음이 급히 자전거를 세웠다.
“......!”
지난 몇 달간 보지 못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 연락도 없이 숨어버렸지만 잊지 못한 사람이 차 앞에 서 있었다.
차강진.
그 사람이 우산을 쓰고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말도 없이 그곳을 떠나온 건 그를 완전히 잊겠다는 뜻이었지만 강진을 보는 순간 지음은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도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 한 순간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 역시 지음을 발견하고 다가섰지만, 지음은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 그를 스쳐 지나쳐 갔다.
탁.
지나쳐 갔다고 생각했는데 스치기 바로 직전에 강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느새 머리 위론 커다란 우산이 씌워졌다. 강진의 어깨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지음은 손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왜 비를 맞고 다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 그의 목소리.
그 낮고도 눅진한 목소리가 발길을 돌리려던 지음의 발목을 잡았다.
‘다행이다, 비를 맞아서.......’
눈가에 눈물이 고이려고 하자, 지음은 빗물 때문에 얼굴이 젖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보고 싶어서 미칠 뻔했다, 한지음.”
“......여긴 어떻...... 어떻게 왔어요?”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려고 얼른 말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강진이 잡았던 지음의 손목을 놓았다.
“용서를 구하려고.”
“.......”
용서라니.
그럼 자신의 부모를 죽인 게 정말 강진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음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전거를 들고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지음아, 내 말 좀.......”
쾅!
지음은 당황하며 따라 들어서려는 강진의 앞에서 다 녹이 슨 철대문을 소란스럽게 닫았다.
“......돌아가세요.”
두려웠다. 그의 입에서 나올 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강진이 범인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가 아니더라도 그 사고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연관되어 있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지음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문에 기대섰다.
눈에서 흐르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얼굴이 뜨거운 걸 보면 눈물인 듯했다.
“지음아, 한지음. 내 말 좀 들어봐. 당신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하, 하지 말아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세요.”
“지음아.......”
강진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도 그녀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려 했다.
하지만 지음에겐 그런 배려들조차 상처로 남을 것만 같았다. 결국 언젠간 그를 지워버려야 할 텐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흉이 될까 봐.
“돌아......가요.”
지음은 강진을 대문 밖에, 차디찬 겨울비와 함께 남겨 두고 자전거는 마당 어딘가에 던져둔 채로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다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머리와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방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쏟았다.
무릎을 당겨 이마를 대고 흐느껴 울었다.
“흐으윽......!”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손으로 그를 쓰다듬고......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지음아! 문 좀 열어봐! 한지음!
대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강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지음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
“으음.......”
얼마나 지났을까.
비에 젖은 채로 울부짖던 지음은 방 안으로 들어와 몸을 녹이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
그녀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떻게 비가 쏟아지는 밖에 강진을 그대로 두고 혼자 잠이 들 수가 있는 건지.
밖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느새 비도 그쳤는지 빗소리마저 잠잠했다.
시간이 얼마나 된 걸까. 방문을 여니 밖은 깜깜했고, 고요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지음은 부술 듯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신도 신지 않은 채로 달려 나가 대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
열리지 않는 대문, 대답 없는 지음 때문에 가 버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강진은 아까 지음이 들어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대문 밖에 서 있었다.
한 손엔 흠뻑 젖은 우산을 쥐고, 다른 손엔 다 시든 꽃다발을 들고.......
그가 지음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와, 한지음이다.”
“......미련하게...... 안 가고 여기서 뭐 해요?”
그가 천천히 지음을 향해 다가왔다.
아까 비에 맞은 어깨와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어쩌지....... 선물로...... 가져왔는데 못 쓰게 됐네.”
강진이 비를 맞고 시들어 버린 들꽃다발을 툭툭 치다가 던져버리려는데 지음이 얼른 다발을 받아들었다.
“이리, 줘요.”
“......다음에 예쁜 거로 사 줄게. 이건 다 시들어서.”
“이것도 예뻐요, 아니, 이게 좋아요.”
차마 그를 올려다볼 수가 없던 지음이 강진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들어 꺾인 줄기를 정리하는데, 강진이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꽉 안는 바람에 그나마 지음의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이 품 안에서 으스러지고 말았다.
“강진 씨, 꽃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한지음.”
“.......”
지음은 그의 뜨거운 체온에 온몸이 힘이 풀려 팔을 툭 내려뜨렸다.
바보처럼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당신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
“강진 씨.......”
“고모와 박동기가 그런 일을 저질렀으리라곤.......”
“아......!”
“사랑해, 지음아. 한지음을...... 당신을 사랑해. 그 사람들과 혈연으로 얽혀 있는 게 싫었어. 자격이 없지만 당신을 향한 마음을 더는 감출 수가 없어.”
“흐으윽!”
결국 지음은 강진의 단단한 몸을 꽉 끌어안고 그의 품에서 한참이나 눈물을 쏟았다.
***
지음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강진은 그녀가 내민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옷을 대강 말렸다.
방은 작고 아늑하고 따뜻했다, 꼭 그녀 자신처럼.
강진의 얼굴이 미소가 지어졌다.
지음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집이...... 누추해요.”
“그렇지 않아. 꼭 한지음, 당신 같아. 따뜻하고 포근해.”
강진은 지음과 함께 하얀 쌀밥에 김치를 올려 밥을 먹었다.
그 후엔 샤워를 하고 푹신하고 깨끗한 이불에 지음과 함께 누웠다.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불과 몇 달 전 그와 계약관계로 묶여 있었을 땐 이런 시간이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오랜만에 팔베개를 하고 있으니 꿈만 같았다.
‘꿈이 아닐까, 그가 날 찾아온 게...... 사실은 아주 기분 좋은 꿈은 아닐까.’
깨고 나면 악몽 같은 현실이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작은 방 안에 가득 차도록 울렸다.
“돌아가자, 지음아.”
“.......”
“고모나 동기는...... 꼭 죗값을 받도록 할 거야, 내가. 이제 와 그런다고 당신 부모님께 사죄를 드릴 순 없겠지만...... 평생 당신에게 속죄하며 살게.”
지음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는...... 난,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이에요. 작은 집, 시골 냄새가 나는 곳. 강진 씨가 속한 곳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강진이 몸을 돌려 지음을 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리듯 쓰다듬었다.
“당신이 싫다면.......”
“.......”
“나도 다 그만두고 여기서 이러고 살지 뭐.”
“뭐라고요?”
지음의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찡그린 미간을 펴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다 그만두고 여기서 이렇게 살겠다고. 난 한지음 없인 못 살 거 같고, 한지음은 여기서 살길 원하니까. 내가 당신을 따라와야지. 매일 놈팡이처럼 집에서 놀고먹고. 한지음이 태워주는 자전거나 타고, 매일 당신 기다리면서.”
“......말도 안 돼.”
“왜 안 돼? 당신을 위해선 다 버릴 수 있는데.”
그 말이 지음의 마음에 새기듯 박혀서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커다란 지음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이려 하자, 강진이 그녀의 이마와 눈에 키스를 했다.
“......당신이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시골이 좋다면...... 당신이 언제든 와서 쉴 수 있는 정원이 예쁜 집을 지어줄게. 나중에 우리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도록.”
“강진 씨.......”
“계약서 따위는 다 찢어버리고 진짜로 다시 시작하자. 당신 아팠던 마음, 평생 어루만져주고 살고 싶어. 돌아가면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없을 거고, 앞으로도 없게 할 테니까.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것 때문이라면 날 얼마든지 패도 좋아. 그러니까,”
“.......”
“나랑 살자.”
지음은 더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제게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가 자꾸 지음의 마음에, 심장에 와 닿았다.
그 해,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멀끔하게 잘생긴 서울 오빠를 보고 두근거리던 마음을 어쩌질 못하고 언니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꼬마 아이는, 오랜 시간 돌고 돌아 그 사람 품에 안겨 있었다.
사랑이란 그런 거겠지.
아무리 감추고 숨기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각인과도 같은 것.
눈물을 흘리는 지음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