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94)

#92화.

사무실 안으로 정후가 먼저 들어왔다.

그가 희라에게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모르지 않기에 정후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김희라 실장은 자를 생각입니다.”

“......네.”

정후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몇 달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곧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올해가 지나기 전에 결심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얼마 안 있어 희라도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후가 서 있는 걸 보며 역시 예상대로 개인적인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강진이 자신을 불렀다는 게 마냥 기쁘기만 한 희라였다. 사무실 분위기는 평소보다도 차분했음에도.

“대표님, 부르셨어요.”

희라가 강진의 앞에 서자 강진이 의자에 몸을 살짝 기대고 그녀를 보았다.

“김희라 실장님은 이번 달까지만 업무를 하는 거로 하죠.”

“......네? 잘못 들...... 뭐라고요?”

그녀가 강진과 정후를 번갈아 보았다. 정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 내, 내가 왜요? 뭘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잘못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잘한 것도 없습니다. 계약서를 제때 보내지 않아 계약이 무산될 뻔한 적도 있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해고 사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요.”

“그건.......”

희라가 말문이 막힌다는 듯 당황했다.

“그건 어쩌면 한지음 씨를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말로 날 속인 걸 수도 있고. 안 그렇습니까? 어느 쪽이든 책임을 져야지 않겠어요?”

“그건......!”

“박미림 씨와 둘이 손을 잡고 한지음 씨를 얼마나 많이 핍박했습니까? 필요 없는 업무를 시키는 바람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창고에 갇히고. 아직 전시 시작하지도 않은 곳을 혼자 청소하라 시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인쇄소 심부름을 보내고. 더 할까요?”

“......!”

“연회장에서 네가 끊어버린 그 목걸이, 그건 내가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선물이었어.”

강진의 반말이 이어지자 희라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회사 내에 CCTV가 숱하게 깔려 있는데 작정하고 확인하려 들면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한지음은 나와 결혼할 사람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그, 그게 언젠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언젠데 이제 와 말하게 돼서 나 역시 안타깝군요. 벌써 몇 달 전에 해야 했을 일인데. 안 그렇습니까, 김희라 씨?”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희라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했다.

“난 이제 김희라, 너와 친구도 그만둘 거야.”

“뭐라고? 대표...... 아니, 강진 씨?”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는 친구는 필요 없을 것 같네.”

강진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서류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거 없습니다. 김 실장님은 잘 마무리 하시고 떠나면 됩니다.”

말을 마친 강진이 자료를 들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남겨진 희라는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붙들었다.

정후 역시 마음은 아팠지만 희라와 미림이 잘못한 걸 알았기에 강진을 말릴 수 없었다.

***

자료를 좀 더 보완한 강진이 저녁 시간에 맞춰 본가로 향했다.

지음이 이곳을 떠난 이후로 할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차이란을 비롯해 미림과 동기까지 전부 불러 모은 강진은 오랜만에 본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어머, 강진아, 오랜만이다. 통 얼굴 보기가 어렵네.”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란이 반색을 하며 강진의 팔을 붙들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슬쩍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기 위해 거실에 빙 둘러앉았을 때 강진이 테이블 앞에 정리된 자료를 보기 좋게 펼쳐 놓았다.

“이게 다...... 뭐냐?”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증거 찾고 정리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무얼?”

“지금부터 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강진은 우선 미림이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오빠?”

“박미림은 오늘부로 회사에선 퇴사 처리했습니다.”

“뭐라......고?”

“그동안 회사 계약직 사원이었던 한지음 씨에 대한 부당한 대우, 폭행을 행사한 점 등이 사유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화를 내는 이란을 보며 강진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즈, 증거 있어?”

“회사 CCTV 자료입니다.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강진이 이란에게 자료를 넘기고 미림에겐 건넸던 서류를 손으로 툭툭 가리켰다.

“경고했지, 분명. 한 번만 더 그런 짓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유학 가, 지낼 곳은 이미 알아봤다.”

“오, 오빠, 갑작스럽게......! 싫어! 나 안 갈 거야. 엄마!”

미림이 이란의 뒤로 숨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정신 차릴 때까지 나가서 공부하고 있어.”

자료를 살피던 동구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렇게 해라!”

말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까지 그렇게 나오자 미림은 울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진이 내어놓는 자료는 미림의 문제뿐만 아니라 박동기가 회사 주식으로 장난친 내용, 이중 장부를 만들어 공금을 빼돌린 내용 따위였다.

“이, 이걸 네가 어떻게......?”

동기의 사무실 금고 안에 있던 비밀 장부까지도 원본으로 내어놓자, 동기와 이란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금횡령과 배임만으로도 충분히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죗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이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료를 흔들었다.

“무, 물론 이렇게 자, 장부를 만든 건 동기가 잘못한 게 맞지만...... 이 회사가 네 거야? 네 건 아니잖아!”

이란이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자, 동구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강진이 코웃음을 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거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금을 이런 식으로 관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벌 받기엔 충분합니다만.”

강진이 동구를 슬쩍 보았다.

혹시라도 충격을 받으신 건 아닐지, 안색이 어떠한지 살펴볼 생각이기도 했다.

다행히 동구는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오른 것 말곤 괜찮아 보였기에 강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박동기가 잘못한 건 그게 다가 아닙니다.”

“......뭐?”

이란이 표독스럽게 강진을 노려보았다.

강진은 동기가 한지음의 부모를 어떻게 죽였는지 증명하는 자료를 그들 앞으로 던졌다.

“이, 이게 다 뭐......!”

이란이 정 비서를 시켜 강진의 서재에 가져다 놓으라 했던 자료보다 더 상세하고 자세한 자료들이었다.

강진이 놀라서 손을 떨고 있는 이란을 보며 블랙박스 영상을 할아버지 동구도 들을 수 있도록 틀었다.

그날, 비가 오던 과거의 밤.

박동기가 열일곱의 나이에 술을 마시고 운전까지 한 것도 모자라, 사고를 내고 목숨이 위태위태한 그 사람들을 내팽개친 채 도망왔던 행적.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이란과 옆에 있었던 김 비서의 대화 내용까지도.

결국 음주 사고에 뺑소니까지 쳐 버린 그들 때문에 지음이 졸지에 부모를 잃고 남겨졌다는 것까지도 모두가 알게 되었다.

희끗한 동구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칠게 솟았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이, 이게...... 어떻게 네 손에......!”

강진은 김 비서를 찾아가 그간의 일을 털어놓도록 만들었고, 녹음기에 고스란히 대화 내용에 나와 있었다. 이란과 동기의 잘못된 판단이.

-죄송합니다. 신고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 병원비를...... 사모님이 대 주신다고 하셔서.......

-그래서 김 비서님의 부모님을 살리고자 다른 사람의 부모를 죽이는 데 동참하셨습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김 비서가 자수를 하겠다며 흐느끼는 내용까지 듣자, 부들부들 떨던 동구가 손을 들어 동기의 뺨을 후려쳤다.

“이런 고얀 놈을 봤는가!”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를 것도 없어!”

이란이 동기를 감싸 안자 동구가 고함을 질렀다.

강진은 소란에 자료가 분실되지 않도록 도로 잘 모아두었다. 나중에 주요한 증거로 쓰일 테니까.

“고모님. 자수하시죠, 박동기와 함께. 김 비서님도 증언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그가 꺼내든 건 동기의 열일곱 생일에 사 주었던,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지갑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찾은 걸 한지음 씨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란이 지갑을 채 빼앗아 가려고 손을 뻗었지만 강진이 한발 빨랐다.

“이걸 없앤다고 죄가 덮어집니까? 자수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 죗값은 치르게 할 테니까 도망갈 생각 마시고.”

“으음. 다 내가......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워서 엄한 목숨을 잃게 했구나.”

동구가 가슴을 쳤다.

이란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다리가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강진이 동구의 주먹 쥔 손을 잡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료를 들고 일어서는데 동구가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휴가 갑니다. 그 사람 데리러.”

동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진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자료를 들고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가장 어려운 일만 남았다.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지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보고 싶다, 한지음.’

강진은 차에 올라 동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걸 돌려놔야 한다. 그중에 가장 큰 일은.

한지음을 제 곁에 두는 일.

강진이 떨리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차강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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