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2/94)

#91화.

지음이 강진의 방에서 자료를 발견하고 그를 떠날 결심을 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지음은 강진이 알지 못하게 동희와 온정리로 가서 미리 살 집을 구해두었다.

이 얘길 들은 누군가는 십억을 떠올리면 아깝지 않냐고, 조금 더 버텨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지음은 이곳에서 더 버티기 어려웠다.

매일같이 강진의 얼굴을 보는 것도 괴로웠고, 할아버지의 따뜻한 눈빛을 떠올리면 더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거기에 이란이나 희라, 미림은 지치지도 않고 매번 지음을 괴롭히고 있었고, 본의 아니게 창국과 얽히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은 강진이 장기 출장을 가는 날이었고, 지음이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를 배웅하면서 지음은 거짓 미소를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저 뒷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겠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와 부모님의 죽음이 연관돼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음은 그에 대한 마음을 접기가 어려웠다.

“하.......”

그녀의 한숨 소리가 새어 나갔는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을 향하던 강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이리 와봐.”

“.......”

강진의 지음에게 손짓을 하자, 그녀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가 지음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살짝 당겨 안았다.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강진의 품 안에 잠시 기대 있는 건 괜찮겠지. 마지막이니까.

‘이제 다시는 이 품에 안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일상적이던 일들이 지워지고 나면 그녀에게 남는 건 뭐가 있을까.

상처, 좌절, 슬픔...... 그런 거?

지음이 천천히 눈을 감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이렇게 아쉬워하니 나도 가기 싫다.”

가지 말아요.

지음의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진이 지음의 몸을 떼어놓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왜 싫대?”

“출장을 왜 같이 가요. 강진 씨 일 바쁜 거 다 아는데.”

“날 위해서다?”

프랑스 출장 날짜가 잡히자 그는 지음에게 여행 삼아 함께 가자고 매일 밤 그녀에게 속삭였고, 지음은 매번 ‘다음에’라고 대답했다.

“조심히 잘...... 다녀와요.”

“당신이 조심히 잘 지내야지. 내 출장의 성공 여부는 당신에게 달린 거, 몰라?”

지음도 그게 걱정이긴 했지만, 한국 내에서의 출장이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약, 잘 마무리하고 와요.”

“그러자. 이번 출장만 잘 마무리되면 큰일 끝내는 거니 당분간 지금처럼 바쁘진 않을 거야. 그럼 시간 내서 가지 못했던 여행이라도 가자.”

“......네.”

그녀의 대답이 듣기에 좋았는지 강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당신, 회사는 인제 그만두는 게 어떨까. 바쁜 일 끝나는 거니 기획팀도 당분간 괜찮을 거고, 사람이야 천천히 구하면 돼.”

“.......”

“당신은 앞으로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수영도 배우고, 하고 싶은 거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살면 돼.”

지음은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수영도 배워보겠다고 등록해 두고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어느새 등록된 것조차 까맣고 잊고 있었다.

지음 자신도 잊고 있는 걸 강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녀올게. 오늘 주말인데 당신 혼자 두고 가서 마음에 쓰이네.”

1층까지 내려와 강진이 차에 오르기 전 지음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제 그와의 스킨십도, 이런 배웅도 자연스러워졌는데.......

“걱정 말아요.”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슬프고 괴로웠다.

그의 차가 지음에게서 멀어지고. 결국 지음은 부모에 대한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듣고 싶은 말도 듣지 못한 채, 그와의 이별을 고했다.

***

짐을 정리한 지음은 집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와의 추억을 되짚어 보려는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의도도 있었다.

올 때부터 가져온 게 별로 없어서였는지, 함께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지 몰라도, 흔적을 지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그녀가 왔을 때 가져왔던 가방과, 지음 자신만 사라지면 이곳은 올 때와 똑같았다.

“......잘 있어요.”

지음은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조심스레 올려 두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인사를 전하고 집에서 나왔다.

동희가 그녀에게서 가방을 받아들고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뭐가?”

“응...... 아냐. 난 그럼 터미널에 먼저 가 있을게. 그런데 병원은 왜? 어디 아픈 거야?”

“가 있어. 금방 갈게.”

떠나는 마당에 강진이 준 차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차는 정후의 집 앞에 잘 세워두고 나온 동희였다.

동희가 버스에 올라 떠나는 걸 보고 지음은 병원으로 향했다.

창국의 얼굴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떠나는 마당이고 강진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 많은데 창국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할아버지나 강진에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런 말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음은 아무도 없는 진료실 책상 위에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적힌 쪽지 한 장만을 올려놓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계약으로 얽힌 사람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그곳을 훌쩍 떠나버렸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온정리로 돌아가며 고작 두어 개의 계절을 지내는 동안 지음의 가슴속 깊이 들어온 차강진이라는 남자를 지워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도착한 곳은 앞으로 지음이 살아갈, 온정리의 허름한 단칸방이었다. 다세대 주택처럼 한 울타리를 이고 여러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시던 시골 어른들은 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가 조용한 곳이었다.

지음은 그곳에서 가장 안쪽의 작고 깨끗한 방에서 살기로 했다.

동희가 마루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넌 어디서 지내게?”

“난 예전에 지냈던 방에서, 주인아줌마가 지내도 된다고 하셨어.”

동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음이 활짝 열린 대문 밖을 보았다. 흙길에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날아다녔다.

***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부터 지음과 연락이 되지 않자, 강진은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돌아오겠다 길길이 날뛰었지만, 정후가 간신히 말렸다.

이번 출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 없는 강진은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지만 어디에도 지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가 강진에게 온 적이 없는 것처럼.

강진은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건 전화로 울리다 못해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져버린 지음의 휴대전화가 있는 곳으로.

테이블 위엔 그녀의 휴대전화와 스마트 워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하....... 한지음, 진짜.......”

“나도 전혀 몰랐어. 동희 자식도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려서.”

강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내가 온정리에 다녀올게. 어차피 동희도 지음이도 다른 갈 곳이라고는 없을 거고. 동희 만나서 물어보면.......”

“놔둬.”

“......어?”

당장이라도 출발을 하려는 정후에게 강진이 재킷을 벗으며 담담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놔두라고.”

“강진아.......”

“오늘 수고했다. 들어가 봐. 내일 회사에서 보자.”

강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정후를 뒤로 한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후의 표정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

강진은 지음이 사라진 이후로 그녀를 찾을 생각도,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생각만 하면 괴롭고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지금 그녀를 찾아가봤자,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바다를 찾았던 걸 떠올렸다.

다음엔 나랑 같이 가자, 했던 강진에게 바닷바람처럼 슬프게 웃기만 했던 여자.

분명 가슴 속에 뭔가 답답한 게 있을 텐데 그게 뭔지 강진이 찾아 밝혀내지 않은 채로 온정리에 간다면, 그녀와의 관계는 어차피 도돌이표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날부터 강진은 짧은 기간 제 곁에 있었던 여자, 지음의 행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낮엔 회사 일에 매달렸지만, 저녁엔 지음에게 있었던 일을 알아보았다.

그녀 부모의 사고, 언니에 대한 것, 지음이 자신과 계약을 한 이후에 그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

“퇴근 안 하십니까?”

정후가 강진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자료들을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 박 비서 먼저 퇴근해.”

강진이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 비서님 되십니까? 저, 차강진입니다. 일전에 박동기 씨 비서 일을 하셨죠? 네네, 맞습니다.”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정후는 그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본 강진의 책상 위에는 명품 지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 지음이 가지고 있었다는 그녀의 부모를 죽인 범인이 놓고 갔다는 지갑이.

“......저걸 가지고 있었구나. 동희 녀석, 저걸 강진이한테 가져다준 걸 지음이가 알면 가만 안 둘 텐데.”

정후가 강진이 사라진 문을 슬쩍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음이 사라지고 강진은 몰라보게 어두워졌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지음이 그를 믿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아 불면증이 심해졌고, 두통에 시달렸지만, 그러면서도 지음을 찾아가지 않았다.

정후가 책상 한쪽에 쌓여있는 자료를 뒤적였다.

“이런 걸 다 모으느라 지음이한텐 연락도 않고.......”

지음의 부모를 죽게 내버려 둔 동기와 이란에 대한 자료들, 동기가 회삿돈을 횡령하고 이중장부를 만든 증거들.

정후는 이 모든 사실을 파헤친 강진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계절은 겨울이 깊어졌다.

강진은 오늘따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짙은 잿빛의 슈트를 입고 아침 일찍부터 회사에 나왔다.

그가 그동안 모았던 자료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한지음에게 백 번도 더 달려가고 싶었던 마음을 그동안 어떻게 눌러 참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후우.......”

그동안의 고뇌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후와 희라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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