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1/94)

#90화.

이란이 차에서 나와 지음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짧은 시간이 지음에겐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피해야 하는 건 아닌가, 보지 못한 척 집으로 들어가서 문이라도 잠그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란이 이미 지음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어디 갔다 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란이 동구의 차가 사라진 곳을 슬쩍 보다가 팔짱을 꼈다.

“아버지가 뭘 모르셔서 저러시지. 쯧쯧.”

“......무슨 말씀 하시려고 오셨어요?”

“아버지 총애를 등에 업고 이게 아주 뻔뻔해졌네?”

지음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차피 이란은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기만 들을 거고, 하고픈 말은 다 할 테니까.

‘그냥 얌전히 있자, 그게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야.’

그녀의 짐작대로 이란은 화가 나서 길길이 뛰고 소리를 높였다.

지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소란 때문에 신고가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음은 이란을 자극하지 않고 손을 모은 채로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분풀이하던 이란이 거칠게 숨을 골랐다.

이제 거의 끝이 나는 모양이었다.

식식거리던 이란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가시려고요?”

“......아 참, 그것도 알려나 모르겠네?”

“네?”

지음을 보는 이란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너랑 아주 닮은 강진이 형수 이름이 한은주라는 거.”

“한......은주요?”

지음은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던 자신의 언니 이름에 저도 모르게 이란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뭐야. 얘가 왜 이래?”

“하, 한은......주요? 우리 언, 언니요?”

지음은 이란이 제 언니를 알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이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음을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그래. 네가 보육원에서 헤어진 네 언니, 한은주 말이다.”

“우리 언니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 말은?”

“그래. 사고로 죽었어.”

지음이 비틀거리자 이란은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이란은 지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보며 쾌재를 불렀다. 신경에 거슬렸던 계집애, 충격받고 힘들어하는 게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알까 모르겠네? 강진이가 널 고른 이유.”

“......?”

지음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란을 올려다봤다.

“형수에 대한 불순한 마음으로 한은주랑 닮은 애를 찾다 보니 널 데려다 앉힌 거라고. 그러지 않았다면 감히 너 같은 애가 우리 강진이를 넘볼 수나 있었겠어?”

“.......”

이란은 지음이 충격을 받든 말든 표독스럽게 제가 쏟아내고자 했던 말을 몽땅 해버렸다.

그러는 사이 자리를 비웠던 정 비서가 돌아오자, 이란도 할 일이 다 끝났다는 듯 차에 올랐다.

지음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가면서 속 시원하다는 듯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정 비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놨지?”

“네, 사모님.”

이란은 정 비서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특별 상여금이야.”

“아, 감사합니다.”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지음을 보며 정 비서는 봉투를 받았다.

이란이 돌아간 이후에도 지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육원에서 따로 입양이 되어 가면서 언니는 지음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서로 어디에 있든 잘 살자 했던 언니 말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언젠간 찾을 생각이었다.

어디엔가는 살아있겠지 라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음은 한꺼번에 밀려든 충격 때문에 제대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두어 발자국 걷고 한 번 쉬며 집으로 올라가는데, 향하는 내내 이란이 쏟아내고 만 악마의 혓바닥 같은 말들이 그녀의 머리를 자극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게 집에 도착한 지음은 차가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내가 말이야, 네 부모 사고에 대해 좀 알아봤다.」

“헉......!”

지음은 손잡이를 붙든 채로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끔 걔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차를 가지고 달리는 경우가 있었어, 스트레스를 푼다나 어쩐다나.」

이란이 없는데도 그녀의 목소리가 지음을 괴롭혔다.

“흡!”

지음이 두 손으로 제 양 귀를 막고 웅크렸다.

「고급 차였지. 사고 내고 덜컥 겁이 났던 모양이지? 폐차시킨다 뭐 한다, 그 비싼 차를. 우리야 몰랐지. 근데 좀 알아보니까 켕기는 구석이 있었지 뭐야.」

「말도 안......돼,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널 데리고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럼...... 가, 강진 씨가 우리 부모님을.......」

「그렇대도? ......미안해서 널 선택한 거야, 돈을 필요로 하니까. 그런 것도 모르고. 너도 참 어린 거니 순진한 거니?」

“아아......!”

지음이 찬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꼭 감았다.

말이 안 됐다, 어떻게 강진이 우리 부모님을 그렇게 만들고 자신한테 접근할 수가 있다는 말인지.

다 거짓말일 거다.

이란의 악질적인 거짓말.

「그렇게 못 믿겠으면 한 번 확인이라도 해 봐.」

지음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란을 올려다봤다.

「뭘 확인하라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을 당신이 죽였냐고 따지기라도 하라는 건가요......!」

「그런다고 그래, 내가 그랬어, 하겠니? 그것 때문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너한테 돈을 주겠다 했다, 하겠냐고.」

지음이 울먹이며 소리쳤지만, 이란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강진이는 보통 서재에 중요한 서류를 보관해. 분명 어딘가에 자료가 있을 거라고.」

처참한 얼굴을 하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지음이 몸을 일으켰다.

집 안으로 들어간 지음은 강진의 서재 앞에서 숨을 골랐다. 들어선 서재는 생각보다 넓었다.

물론 이란이 말한 걸 다 믿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뿐.

그러면서도 서재를 뒤지는 지음의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책상 밑에 놓아둔 박스를 열었는데.

“흐읍!”

지음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주저앉았다.

눈물이 치솟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자료를 확인했다.

부모님을 치고 달렸을 흉측스러운 차의 모습, 사고 직전 찍은 사진들. 폐차시킨 날짜, 폐차 증서 따위가 널려 있었다.

무서웠다. 이런 걸...... 보관하고 있다는 것도. 이란의 말대로 이게 강진의 방에서 나왔다는 것도.

지음은 당시엔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던 부모님의 사고 현장을 사진으로 보면서 심장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눈이 흐릿해지고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판단이라는 걸 할 수 없었고, 세상에 대한 원망만 남았다.

“하아.......”

지음은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집에서 도저히 혼자 있을 자신이 없어서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잠시 후 그녀는 이제는 나뭇잎에 초록 물이 거의 다 빠진 커다란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엔 언제나 그렇듯 동희가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동희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지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감정이 그녀의 작은 몸을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참고 있는 거였다.

지음은 대답 대신 주먹만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이란이 그동안 지음에게 했던 걸 떠올리면, 그녀라는 사람의 인성을 생각했을 때 좋은 뜻으로 그녀에게 이 모든 일을 얘기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무언갈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녀의 말을 다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란의 입장에선 지음이 강진의 곁에서 사라져주길 바랄 테니까....... 그 일이 사실이라면 진작 폭로했어야 했다.

“하아.......”

“......?”

동희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았지만, 지음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란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컸다.

‘더구나 강진이.......’

지음이 지켜본 강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에 품었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지음을 사랑한다고 매번 조심스럽게 안아주던 사람.

그가 지음의 부모를 죽이고, 그 사실을 알면서 지음에게 숨기고 보상이라도 할 작정으로 과하다 싶을 정도의 돈을 주며 계약을 제안하고.......

그랬을 리가.......

“아냐, 아냐.......”

지음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지음아?”

지음은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이란의 말을 다 믿는 것도 아니고, 강진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 싫어졌다.

이곳, 서울, 강진의 집, 그 회사와 작업실도. 이란과 미림이나 희라 등 사람들도. 벤치 위를 비추는 전등마저도 고급스러운 이런 집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옷과 신발에 들고 다니기 어색할 정도로 버거운 카드까지.

그 무엇도.

맞지 않는 옷을 끼워 맞춰 입느라 지음은 지치고 피곤했다.

그리고 언니.......

“동희야.......”

어딘가에는 살아 있을 거라고 믿으며 돈을 벌어서 꼭 언니를 찾아야지, 자신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언니였지만...... 자신만은 언니를 찾아야지 했었는데.

그런 언니가 죽었다는 게,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지음을 무너지게 했다.

“응, 지음아. 왜? 무슨 일 있어?”

“......그만하고 싶어.”

“응?”

강진도 좋고 돈도 좋고 다 좋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짊어지기엔 자신이 너무 약할지도 모른다.

“다 내려놓고...... 싶어.”

“뭘? 무슨 말이야, 그게?”

“여기, 그만 정리하려고.”

“......어?”

동희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지음을 보았다, 꼭 이곳으로 지음이 처음 오겠다고 했을 때처럼.

그러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뒤늦게 이해한 동희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후 형한텐 뭐라고 하지? 어쩌려구.”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마.”

“지음아.......”

“알았지?”

“응, 알았어.”

몇 번이나 동희를 단속한 지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으윽......!”

“지, 지음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왔다.

동희는 가늘게 떨리는 어깨에 차마 손도 얹지 못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