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정 비서가 차를 가지고 도착하자, 이란은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주위를 살펴보고 차에 올랐다.
“알아봤어?”
“예.”
차에 타자마자 이란이 정 비서에게 물었다.
집으로 오라고 하려다가 혹시 동구에게 들킬까 봐 밖에서 만나기로 한 거였다.
카페든 어디든 갈 것까지 없고, 가장 은밀한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를 택했다.
정 비서가 알아 온 얘기는 이란이 짐작했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고 났던 그 부부가 정말...... 그 아이랑 연관된 게 맞아?”
“네. 알아보니 그날의 뺑소니 사고로.......”
정 비서의 단어 선택에 이란이 그를 노려보자 얼른 말을 정정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한지음의 부모가 맞습니다.”
“그럴 수가.......”
이란이 한숨을 쉬었다.
차엔 아이가 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사고가 났을 때 빨리 신고만 하고 병원에 갔더라면 그 부부는 목숨을 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우리 동기는?’
그때 동기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었다.
면허는커녕 주민등록증도 아직 나오지 않은 나이였다. 거기다 학생 신분으로 파티를 즐기고 다니다가 술을 마신 상태였다.
그렇게 옆에 타고 있었어도 문제인데.
뭐에 홀렸는지 사람도 차도 없는 시골길, 술도 마셨겠다 해보고 싶었겠지, 한때의 치기로.
술에 취하고 어린 동기가 아니더라도 만약 이란이, 아니면 김 비서라도 신고를 했더라면 그 부부는 살았겠지만 제 아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란으로선 그런 일은 절대 제 손으로 할 수 없었다.
이란이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자, 정 비서가 슬쩍 그녀를 보았다.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계속해 봐.”
“그리고 말씀하신 한지음의 가족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한은주와 가족이 맞습니다.”
“뭐라, 뭐라고?”
“한은주와 한지음은 자매입니다.”
“하, 어쩐지 닮았다 했다.”
이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고 이후에 둘이 함께 보육원으로 가게 됐습니다만, 잘 웃고 성격이 싹싹한 한은주가 먼저 입양이 된 모양입니다.”
“으음.”
그랬다. 둘이 닮았다고 하면서도 둘을 엮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스치듯 보았을 때야 너무 닮아 혹시나 가족일까 생각하긴 했지만, 1분 아니 30초만 함께 있어도 그 둘은 확연히 달랐다.
은주는 밝고 잘 웃었고 언제나 화사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반듯하게 잘 자란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지음은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세상에 온갖 힘든 일을 다 지가 혼자 겪는 것처럼.......”
“예?”
“아냐, 아무것도. 아무래도.......”
강진은 지음을 먼저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스스로 떠나게 해줘야겠지. 정 비서, 내 심부름 하나 해야겠다.”
이란이 눈을 번뜩이며 씨익 웃었다.
***
회의 중인 강진은 모처럼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프랑스와는 이 조건으로 계약하기로 합시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희라가 강진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강진이 희라를 밀어냈어도 그녀의 마음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강진을 아직은 밀어낼 수 없었다.
“언제쯤 계약하게 될까요?”
“조만간 날짜 잡아보기로 했으니 기다려봅시다. 잠시 쉬었다 하죠.”
길어질 것 같은 회의 시간에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들이 휴식을 하러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희라가 쭈뼛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강진이 지음에게 전화를 하러 일어나는데 희라가 물었다.
“오늘 회의 늦게 끝날 거 같은데...... 끝나고 간단하게 저녁 어떠세요?”
강진은 휴대전화에 지음의 번호를 누르다가 그녀를 보았다.
“김희라 실장님, 내가 희라 씨 아버님 앞에서까지 제대로 얘기했던 거 같은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습니까?”
“.......”
희라가 입술을 꽉 물었다.
“내가 얼마나 더 정확히 얘길 해야 알아듣겠습니까?”
“강진 씨.......”
“나는 김희라 씨가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대답도 노입니다. 끝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
강진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면서 밖으로 나갔다.
희라가 입술을 깨물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궜다.
그때 정후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내가 말했잖아. 엄한데 힘쓰지 말고 나한테 오라고. 저녁은 나랑 먹어.”
“......뭐 사줄 건데?”
“네가 먹고 싶은 거라면 다.”
정후가 희라를 달래는 동안 강진은 지음에게 전화를 했다.
***
희라가 회의에 들어있는 동안 지음은 미림과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잠시 휴대전화를 확인한 미림이 지음을 향해 손짓을 했다.
“실장님 회의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먼저 퇴근하래. 먼저 가.”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강진에게 연락이 왔다.
지음은 미림을 슬쩍 돌아보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네, 강진 씨.”
그에게 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저절로 밝아졌다.
-어, 오늘 회의가 좀 늦어질 거 같은데 어쩌지?
“방금 얘기 들었어요. 괜찮아요. 잘하고 와요.”
-동희 씨 불렀어?
“아, 그냥...... 네, 불렀어요. 기다리고 있어요.”
지음은 동희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강진이 걱정할까 봐 하얀 거짓말을 했다.
그와 기분 좋은 통화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갔는데, 처음 본 검은색 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그녀가 멈칫하는데 차에서 할아버지가 나왔다.
“......이제 끝난 모양이구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강진이 빼고 나랑 둘이 데이트 좀 하면 어떨까 해서. 잠깐 이 할애비랑 어울려 주겠니?”
“네.”
지음은 저도 모르게 가방을 꽉 잡았다.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뭔가 알고 오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차에 오르자 할아버지 특유의 미소가 얼굴에 만연했다.
“회사 다니기는 힘들지 않고?”
“네, 괜찮아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동구의 차가 도착한 곳은 아늑하고 따뜻해 보이는 한정식집이었다.
“내가 가끔 오던 곳으로 마음대로 정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네, 좋아요. 괜찮아요, 할아버지.”
차에서 내려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정원길 같았다.
지음은 할아버지의 걸음걸이 속도에 맞춰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이미 예약을 해 둔 건지 안내에 따라 조용하고 아담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담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지음과 동구 앞에 나오기 시작하자, 동구가 손짓을 했다.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네.”
지음은 정갈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맛있어요.”
“다행이구나.”
동구도 마음이 놓인다는 듯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오늘은 강진이가 회의를 해서 늦게 끝난다고 하던데...... 자주 이러는가?”
“아, 아니에요. 보통은 출퇴근 같이해요.”
“그래, 괜한 소릴 꺼냈구나. 어서 먹어라.”
“네, 할아버지도 드세요.”
지음은 동구가 자신을 보는 눈빛을 보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란이 미림과 희라의 앞에서 계약이니 뭐니 떠들어 댔던 게 떠올랐다.
그 얘길, 이란이 동구에게 얘기한 게 틀림없었다.
‘그랬으니 연락도 없이, 강진 씨가 없을 때 찾아오셨겠지. 계약에 대해 말씀을 꺼내시면 난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강진 씨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난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가 손을 살며시 떨었다.
그 떨림을 본 걸까. 동구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지내기는 괜찮고?”
“네?”
“고향이 온정리라고 들었는데, 그리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살다가 시끌시끌한 도시에 와서 사니 힘들지 않고?”
“아, 네.......”
“회사도 낯설 거고....... 우리 강진이랑 사는 건 괜찮은가 걱정이 되기도 해서 보자고 했다.”
“힘들지...... 않습니다.”
동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지음아, 얘야.”
“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쥐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살아보니 그렇더구나. 물론......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도 훌륭한 가족이지만 굳이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더라도...... 가족이 될 수 있단다.”
“.......”
지음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지만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고, 그런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동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구나, 아가. 내가 이렇게 따뜻하게 네 손을 잡아주고...... 그러면 그게 또 가족이 되는 거다.”
“......네.”
동구는 그 후로도 지음에게 계약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사는 건 힘들지 않은지. 강진이 그녀를 외롭거나 쓸쓸하게 혼자 두진 않는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온 걸...... 지음은 알고 있는지.
지음은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에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점점 대답을 하는 지음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할아버지가 너무 좋으셔서...... 그래서.......’
더는 이렇게 속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집 앞에서 동구의 차가 떠나는 걸 보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결국 그 좋은 할아버지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어떻게 속죄를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한데 주차장 한쪽에 세워놓은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그녀는 차를 잠그고 지음에게로 다가왔다.
“......?”
이란이었다.
지음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이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