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94)

#87화.

“아버지, 혈압은 괜찮으신 거예요? 내가 괜히 말을 꺼냈나 봐요.”

당장에라도 지음의 엄청난 비밀을 말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이란이 동구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동구의 주름 많은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이란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도 동구의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한발 물러나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동구가 민준이 죽고 홀로 남은 강진이 애틋해서 그에 관한 일이라면 앞뒤 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이란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꾹 다물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혈압이야 늘 그런 거고. 괜한 말을 꺼냈다고? 어디 말 해봐라.”

“네? 아니 뭐, 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신데 신경 쓰실까 봐 말을 하기가.......”

“그래, 그럼 못 들은 거로 할 테니 그만두자. 나는 좀 쉬어야겠다.”

동구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방을 나서려고 하자, 이란이 그의 팔을 도로 붙들었다.

“아버지! 그냥,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 혈압 걱정에 괜한 말을 꺼냈다고 하지 않았냐? 그리 걱정되면 그만두자는 얘기다.”

“아버지, 아버지! 중요한 얘기예요.”

이란이 동구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동구가 팔을 내려다보다가 못 이기는 척 도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얘기기에 그래? 할 거면 뜸 들이지 말고 얼른 하고, 아닐 거면 그만둬.”

“놀라지 마세요. 강진이랑 한지음이라는 애, 결혼 그거...... 다 쇼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앞뒤 자르지 말고 똑바로 말해.”

동구의 말에 이란이 한숨을 쉬고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계약 결혼이래요, 글쎄. 그게 다 쇼였다구요.”

“계약...... 결혼?”

동구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을 하자, 이란이 신이 나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요즘 애들 하는 거 있어요. 겉으로는 결혼한 척하고 서로 그러기로 거짓 계약을 맺는 거죠.”

“.......”

“보나 마나 돈 없고 부모·형제 없고.......”

이란은 부모라는 말을 하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진 것도, 희망도 없는 애 하나 데려다가 허수아비로 앉혀 놓는 거죠, 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안 그러고서야 어디 강진이한테 그런 애가 가당키나 해요?”

“으음. 확실한 거야?”

동구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란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제가 듣고픈 대로 듣고,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그녀의 성격이라면 사소한 일로도 오해할 수 있었다.

“제가 없는 말 하겠어요? 돈이 필요했대요.”

“.......”

“알아보니까 보육원에서 살다가 입양이 된 모양인데,”

“입양? 양부모가 있다는 말이야?”

동구가 이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둘 다 있대요. 멀쩡히...... 물론 멀쩡히는 아니지만 암튼 살아있는 부모를 없다고 하더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멀쩡히’가 아니라니?”

“양아버지라는 작자가 요양병원에 있대요. 어머니라는 자는.......”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고.

이란은 마지막 말은 삼켰다.

“암튼, 아버지가 병원에 있고 어머니는 병구완을 해야 하니 돈이 오죽 들어가겠어요? 지음이 걔야 고등학교도 못 나온 어린앤데 어디 변변한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러니 강진이 돈이 필요했겠죠. 찾아보면 계약서 같은 것도 어디 있을 거예요, 아마. 돈 받고 1년이든 2년이든 잠깐 결혼하는 거로 가짜 계약이라도 했을 거라고요.”

“후우.......”

이란의 말을 들으며 동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란이 잠시 멈칫하며 동구의 반응을 살폈다. 신나서 말은 꺼냈지만, 안 그래도 혈압도 있고 몸이 안 좋은데 너무 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아버지.......”

“기다려라.”

이란이 그를 부축하려는데 동구가 손짓을 했다. 잠시 시간을 달라고.

동구가 눈을 꼭 감고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게 해서 강진이가 얻는 게 뭔데? 그 아이는...... 돈이라고 치자, 우리 강진이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데려와 돈을 주고까지 그런 일을 벌여서 얻는 게 뭔데?”

“그거야, 아버지가 강진이 결혼에 너무 신경을 쓰시니까 그게 싫었겠죠.”

이란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버지가 강진이만 신경 쓰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우리 동기가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강진이보다 훨씬 위인데.”

동구가 눈을 떠 이란을 보았다.

이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아버지. 강진이랑 지음이라는 애, 부를까요? 지금도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인데. 그냥 이대로 두고만 보실 거예요? 세상에 어른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이런 짓을 했는데?”

“네 눈으로 계약서를 직접 봤어?”

“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걸 꼭 봐야 아나요. 돌아가는 걸 보면 척인데.”

“이 사실...... 또 누가 알아?”

동구가 이란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맹렬해서 이란이 멈칫했다.

“네?”

“혹시 또 여기저기 벌써 떠들고 다닌 거냐?”

“아, 아니에요!”

“누가 알아!”

“희, 희라랑 우리 미림이 정도....... 근데 희라야 강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까 알아야죠.”

“만약에 이 소리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서 말이라도 나돌기만 해 봐, 어디. 그땐 진짜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아버지!”

이란이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버진 왜 나한테 그러세요!”

“내 얘기, 허투루 듣지 마라. 경고다.”

동구는 이란이 행여나 떠들어대서 문제가 커질까 봐 입단속을 시켰다.

“어쩌실 생각이세요?”

“그만 나가 봐라.”

이란이 물었지만 동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그러지 말고 희라랑.......”

“희라 얘기도 그만두고!”

“네?”

“나가봐! 좀 쉬어야겠다.”

이란은 울상이 되었다.

동구에게 말만 하면 그런 일을 벌인 강진과 지음을 당장이라도 불러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발을 동동 굴러봤지만, 그녀의 앞에서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강진은 녹음 파일을 빼서 보조석으로 집어 던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후.......”

좀 더 증거를 모아야 확실해지겠지만 오늘 녹음기에 담긴 목소리만으로도 지음의 부모가 잘못된 건 이란과 동기의 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기회를 앗아간 거다.

지음의 부모가 죽지 않았더라면 보육원으로 보내질 일도 없었을 거고, 언니를 잃지 않았을 거고.......

“은주.......”

강진은 이제껏 자신이 첫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여자가 지음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한은주라는 이름을 말했다고 해서 어떻게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미묘하게 다른 듯한 분위기, 말투와 목소리.......

강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지음이 기다리고 있을 바다로 내달렸다.

차를 도로가 한적한 곳에 세워두고 강진이 파도치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돌밭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그리 곱진 않지만 제법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나왔다.

둘러보자 저 멀리 지음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재킷도 없이 얇은 옷차림으로 혼자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여자가 위태로워 보였다.

밤에 바닷바람이 얼마나 찬데.

강진은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성큼성큼 걸어 지음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그녀를 힘껏 당겨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앗......!”

소스라치게 놀라 뿌리치려던 그녀가 강진이라는 걸 알아채고 몸에 힘을 풀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당신은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추운데.”

지음이 제 목을 두르고 있는 강진의 팔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따뜻했다.

차강진은 따뜻했고, 한지음은 차가웠다. 언제나.

그가 팔을 풀고 지음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었다.

“괜찮은데, 난.”

“하고 있어. 또 감기 걸리지 말고. 바다가 보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하면 되지, 왜 이런 델 혼자 와?”

“동희하고...... 동희랑 같이 왔어요.”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자, 그녀도 강진의 곁에서 따라 걸었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떠났다.

강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편하게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던지듯.

“......그때 왜, 한지음이라고 안 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 알아들은 지음이 발걸음을 멈추고 멈칫했다.

강진도 그녀를 따라 멈추고 몸을 돌렸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앞에 보이고 말했다.

“손수건, 당신 거 맞지? 당신 이름, 한지음의 J.”

“......네.”

“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어?”

지음이 강진을 올려다봤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지음은 어렸고, 두려운 것투성이였다. 그래서 뭐가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 그녀 자신, 굳은 심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까.

강진이 지음을 가볍게 품에 안았다.

“쭉 당신을...... 기다렸어.”

“.......”

“당신이 한지음이라고 했다면 한지음을 첫사랑으로 품고 살았을 거야. 당신이 그 누구라고 했더라도, 그 누구를 품고.......”

지음이 눈을 꼭 감았다. 강진의 옷을 붙든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음아, 지음아.......”

강진이 고개를 숙여 지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이름을 한없이 불렀다.

‘내 죄를 네게 어떻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까. 나는 이토록 너를 사랑하는데.’

“빨리 알아보지 못해서.......”

‘험하고 아픈 당신의 과거에 당신을.......’

“혼자 두어서 미안해.”

지음이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몸이 떨리자, 강진이 지음을 떼어놓고 그녀의 눈물에, 눈에, 그리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흐읍......!”

지음의 입술을 삼키는 강진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 작은 몸으로 숱한 일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강진은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아픔을 제가 다 가져오고 싶었다.

이 뜨거운 숨결에 섞어서 그녀의 슬픔을 다 삼킬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영혼으로 이 여자를 구원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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