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강진은 지음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땐 시간이 늦어 퇴근을 하고도 남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작업실에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강진이 다시 집을 나서며 이번엔 동희에게 전화를 했다.
“어딜 가면 간다, 늦으면 늦는다...... 얘기를 하라니까.”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지음이 계약서를 떠올린다면, 강진은 이미 계약서 따위는 아예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엇, 네. 대표님.
“동희 씨, 지금 지음이랑 같이 있습니까?”
-네, 같이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어 동희를 기사로 두기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동희와 지음의 관계를 질투라도 해서 곁에 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은 그녀를 찾기 위해 또 미쳐 날뛰는 꼴이었을 텐데.
강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딥니까? 집으로 오는 길입니까?”
-아, 그게......, 대표님 여기 바다예요.
“바다?”
그녀를 데리러 나가려던 강진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바다를 보는 걸 좋아하는 낭만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에게도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형과 형수를 잃고 마음이 미친 듯 답답했을 때, 어디론가 떠나거나 숨어버리고 싶을 때....... 그런 때.
강진이 통화를 하며 차에 올랐다.
“어딘지 위치 메시지로 보내고...... 동희 씨는 돌아와요.”
-네. ......네? 그럼 지, 지음이는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강진은 몇 마디를 더 하고 지음이 있다는 바다로 곧장 달렸다.
가는 내내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거기다 마음도 심란했다.
한 번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걱정하느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음만큼은 늘 걱정됐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녀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 마음이 쓰였다.
처음에 정후가 계약 결혼을 제안했을 때 그런 걸 할 사람이 있겠나 회의적이었고.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도 강진은 믿지 않았다.
정후는 상대가 남자에게는 관심도 없고 결혼에는 더더욱 냉담한, 사정상 돈이 반드시 필요해서 적격인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 뒤, 계약을 하겠다고 온 지음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은주를 닮은 여자, 형과 은주를 잃고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무작정 떠났던 휴가지에서 그를 위로해줬던 여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위자료로 돈, 십억 주시는 거 맞죠?」
강진의 마음이 어떤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이나 하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하 참.”
강진은 어쩌면 이제 무용지물이 된 계약서 내용을 읊었다.
그러다 한숨을 내뱉으며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제 마음은 알겠는데, 지음의 마음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은 안개 속에 가려진 듯했다.
불안한 마음을 외면하기 위해 유린에게서 전해 받은 녹음 파일을 들어보기로 했다.
정신을 분산하는 데는 업무를 하는 게 최고였으니까.
동기의 사무실에서 녹음한 거라고 하더니, 잡음과 함께 동기와 유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이란이 왔는지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그리고 진짜는 이란과 실랑이하던 유린이 사무실 밖으로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사고 영상을 찾던 그들이 블박 영상을 틀었는데 흘러나오는 내용이 가관이었다.
-박동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너, 너 술 마셨어? 김 비서! 너 이 새끼! 어린 애를 데리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도련님이 한번 해, 해 보시겠다고 해서.......
-으응. 응? 어, 엄마네. 엄마, 나 사고 났다? 시x, 가는데 길이 좁아지잖아.
-그렇다고 면허도 없는 애한테 운전을 시켜? 너 죽고 싶어?
-아, 뭐 어때- 여기 뭐 차도 없고 사람도 없잖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강진이 코웃음을 쳤다.
“면허도 없는 고등학생이 대신 운전을, 그것도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안 들어도 그간 그들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짐작할 만했다.
술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기와 사고 장소를 수습하는 정 비서, 뺑소니를 계획하고 사건을 덮는 차이란까지.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시며 온갖 지저분한 짓은 다 했던 동기였기에 어릴 때부터 김 비서를 붙여 감시를 하라고 했건만.
그날도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동기가 우겨댔겠지, 운전을 하겠다고.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잘라버리겠다고도 했을 테고. 부모의 병원비를 대야 하는 김 비서의 자릿값을 놓고.
강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듣자 하니 온정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 비가 오는 밤에 일어난 사고였다.
어렴풋하게 기억에 있었다. 겨우 고등학생에게 한국에 몇 대 들여오지도 않는 고가의 차를 사서 안긴 이란이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김 비서가 일을 그만두었고, 고가의 차는 폐차를 시켰고.
그때야 강진 역시 어렸으니까 무슨 변덕이려나 싶었는데.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고?”
그들이 그런 짓을 해서 큰 사고가 났고, 사람이 죽었다.
“온정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빗길의 교통사고....... 얼마 안 있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한 부부.”
강진은 동기와 이란이 한 짓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사고가 가슴이 콱 얹히는 느낌이었다.
지음의 부모님이 당했다는 사고와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 만약 그런 거라면.......”
그 죄를 다 어떻게 씻나.
이제 겨우 지음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된 강진인데, 그 죄를 다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강진이 이를 악물었다.
***
지음은 밤바람이 부는 새카만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의 바다는 시커먼 파도를 연신 뱉어내고 있었다.
‘왜 온정리에서 살 땐 여길 와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바다가 이렇게 시원한데.’
하긴 그녀가 온정리에 있을 땐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러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으니까.
동희가 지음에게서 멀리 떨어져 전화를 받더니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지음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다를 보고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발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모래가 파고들자, 그녀가 모래사장 위에 앉았다.
“안 추워?”
“응.......”
고민을 하던 동희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동희야.”
“응, 지음아.”
“여기가 이렇게 예쁜 곳인 줄 너는 알고 있었어?”
“아니? 나 바다 처음 와 봐.”
“나도.”
동희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도 처음 왔어. 이렇게 예쁜 곳인데. 왜 그동안 한 번도 와 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래? 시커멓고...... 무서운데. 낮에 봐야 예쁠걸?”
동희가 바다와 지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희야.”
“응?”
“어쩌면 나.......”
지음이 바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기쁘게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처음 보는 그 미소가 슬퍼 보여서 동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곧 계약...... 파기될지도 모른다?”
“어? 왜? 대표님이...... 안 주신대? 너무 많은 돈이라서 안 된대?”
놀란 동희가 다급히 물었지만 지음은 그냥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들키면 안 되는 일인데 들켰고, 하면 안 되는 사랑을...... 하게 됐어. 사랑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는데.’
동희는 기다려도 지음이 대답할 것 같지 않자, 작게 한숨을 쉬고 머뭇거리며 일어났다.
“저기 지음아, 나는...... 가볼게.”
“......?”
지음이 동희를 올려다봤다.
이제 가자, 도 아니고 갈까, 도 아니고 가볼게, 라니.
“대표님...... 차강진 씨가 오신댔어, 여기로.”
“아.......”
지음이 그제야 휴대전화를 보았는데 그에게서 여러 번 전화가 와 있었다.
“또...... 전화를 못 받았네.”
그가 먼저 찾아도 매번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하는 지음. 그가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그게 꼭 지금의 그와 지음과의 관계 같아서 입이 썼다.
***
이란은 집으로 가자마자 동구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아버지? 여기 계세요?”
문밖에서 소란이 일자, 동구가 서재에서 나왔다.
이란은 동구가 문을 열기 무섭게 그의 팔을 붙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야?”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주머니가 차를 가져다 놓자, 이란이 물잔을 손으로 잡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줌마는 이만 퇴근해요.”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회장님.”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나서 이란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뭔데 이렇게 호들갑일까, 쯧쯧.”
“아버지, 강진이 결혼 문제 말이에요.”
“?”
“솔직히 집안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뭐로 보나 희라가 적격이에요. 아버지가 희라랑 강진이가 만날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세요. 제 말은 안 들어도 강진이가 아버지 말은 듣잖아요.”
이란의 말에 동구가 얼굴을 확 구겼다.
“또 그 소리야? 이미 좋은 사람 만나서 인사도 하고 다 된 일인데 대체 너는 왜 그렇게 포기를 몰라?”
“그게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민준이 그렇게 보내고 결혼 같은 거 안 한다고 했던 놈이 제 맘에 드는 여자 데려와서 잘 진행되고 있는데, 넌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동구가 버럭 역정을 내자 이란이 움찔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아버지, 역정만 내지 마시고 일단 들어보세요. 강진이랑 고 깜찍한 게 우릴 다 속인 거라니까요?”
“......뭐라고? 그 무슨 말이냐? 속이다니, 뭘?”
“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 아버지, 내가 콧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는 거예요.”
이란은 뜸을 들이며 냉수를 또 한 번 벌컥벌컥 마셨다.
동구의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냉큼 말 못 해? 무슨 말이냐니까!”
“한지음이 어떤 앤지, 아세요? 저도 깜빡 속았어요!”
이란은 숨을 고르고 동구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