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주먹을 쥐고 간신히 버텼다.
지음은 이란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무슨 말씀이세요?”
“얘가 왜 이래?”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고모님이 어떻게 아시냐고요.”
지음의 벌게진 눈을 보고 이란이 멈칫 뒤로 물러났다.
“그, 그야 뻔한 거 아니니!”
“그러니까 그 뻔한 이야기가 뭔데요? 어떻게 아시는데요, 고모님이?”
“어떻게 알긴? 뭐 돈 없이 살다가 딸을 보육원에 맡길 정도면 뻔한 거 아냐? 그냥 그 정도 얘기 가지고 얘가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난리야?”
이란이 당황하자, 미림이 얼른 의자 위에 있는 이란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엄마, 가자. 언니, 우리도 가자, 얼른.”
“잠깐만요!”
이란이 희라, 미림을 양쪽 옆에 끼고 레스토랑에서 사라지자, 지음은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때 강진에게서 메시지가 왔지만, 지음은 충격에 빠져 메시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
강진은 지음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차에 올랐다.
유린이 기다리겠다고 한 카페는 도심지를 벗어나 서울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다녀오면 늦어질 것 같아 카페로 향하는 동안 지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널찍한 카페 주차장엔 차가 띄엄띄엄 두어 대 정도만 세워져 있었다.
카페는 외관이 통나무 건물처럼 보이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큰 소원 나무 따위가 세워져 있었고, 유린이 카페 깊숙한 곳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손님들도 2층에 있는지, 1층엔 유린 말곤 아무도 없었다.
강진이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서자, 유린이 고개를 들고 방긋 웃었다.
“찾기에 어렵진 않았어요? 이런 곳으로 오시라 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차가 몇 대 없던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택시 타고 왔어요. 괜히 눈에 띄면 안 될까 봐.”
커피를 시키고 강진이 유린을 보았다.
처음 그녀를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업무 겸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가게 앞에서 맞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도 혐오하는 강진이었지만, 상대는 여자였다.
지금이야 볼에 살도 좀 오르고 발그레 생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다 죽어가던 화초 같았다.
맞는 남자에게서 그녀를 구해주고, 강진은 화가 치밀어 몇천만 원이나 되는 빚을 제 돈으로 다 갚아버렸다.
“......좋아 보이는군요.”
“대표님 덕분이죠. 덕분에 사람 구실 하며 살고 있잖아요.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강진은 때마침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으로 쓴 커피가 꿀꺽 넘어갔다.
빚을 갚고 나서 강진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지만, 유린은 당시 빚쟁이에게 강진이 던졌던 명함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유린은 강진을 찾아갔다, 은혜를 갚겠다며.
그녀는 보기보다 고집이 셌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를 위해 뭐든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당연히도 강진은 그녀를 몇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녀 또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과거를 다 잊고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강진은 그녀의 말을 한 번 들어주기로 했다.
더욱이 그녀는 강진에게 찾아오기 전에 미리 그와 주변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때 강진은 동기에게 붙일 제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고, 유린은 그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오히려 자신이 여자라는 게 무기가 될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강진이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유린 씨와 부모님께서 편히 사는 데 내가 도움을 준 거라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던 말이었다, 진심이기도 했고.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USB 메모리였다.
“전 안 됐어요. 대표님은 제가 마음 불편한 채로, 한쪽에 무거운 짐 덩어리를 짊어지고 평생을 살기 바라세요?”
“유린 씨.”
“대표님이 갚아주신 그 돈이 아니었다면, 그 후로 도와주신 저희 어머니 병원비가 아니었다면....... 전 아직까지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굴렸을 거고. 저희 엄만 아빠와 햇살 좋은 오후에 산책을 다니는 일은 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버티지 못하시고 끝내 돌아가셨을 테니까요.”
“.......”
“그리고 제가 대표님께 해 드리는 일은 전혀 위험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재미있는걸요? 딴소리 말고 이거나 받으세요.”
“이게 뭡니까?”
강진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일전에 지음을 찾으러 갔던 미술관에서 동기의 곁에 있던 여자가 유린이라는 걸 떠올렸다.
워낙 지음에게 정신이 팔려 그녀와 마주했었던 것도 잊고 지낸 모양이었다.
그가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박동기를 만나고 있는 겁니까?”
“그래도 친척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척이겠죠. 그는 유린 씨가 만나기에 그리 썩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USB 메모리엔 관심을 두지 않자, 유린이 긴 손가락으로 메모리를 그의 앞으로 좀 더 밀었다.
그리고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런 걸 내가 모를 거 같아요? 남자에 대해선 대표님보다 더 잘 알 거예요, 내가.”
“.......”
“이건 복사본, 녹음한 거예요. 들어보시면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박동기는 멍청하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드네요. 아니면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하거나?”
“둘 다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요. 그러니 들어보세요. 어쩜 대표님이 또 억울한 사람을 도울지도 모르잖아요? 저처럼 그 사람도 은혜를 갚겠다고 하면 곤란하시겠지만.”
말을 마친 유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강진이 그녀가 내민 메모리를 손에 쥐었다.
“아직 원본은 저한테 없어요.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찾아올 수 있어요.”
“무슨 말입니까?”
“동기 씨 사무실에 있거든요.”
“더는 위험한 일 하지 마십시오, 유린 씨. 박동기 사무실에 있다면 내가 가서 가져와도 되니까.”
“대표님은 내가 죽으려고 할 때 살려줬어요. 생면부지 사람이 짊어진 빚도 갚아주고. 저희 엄마 목숨까지 빚진 거예요, 난.”
유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정도 위험부담은 지고 싶어요, 해야겠어요. 빚지고 사는 건 못하겠으니까요. 그리고.......”
“......?”
“박동기, 재밌어요, 그 사람.”
유린이 눈을 찡긋하고 선글라스를 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날게요. 원본 찾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녀가 문을 나서서 사라질 때까지 강진은 자리에 앉아 메모리만 들여다보았다.
박동기의 약점이라.......
사촌 하나 정도는 강진의 힘으로 얼마든지 눌러버릴 수 있었지만, 유린이 즐거워 보였고 그거면 됐지 싶었다.
강진이 메모리를 들고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카페엔 사람이 없었다.
***
레스토랑 안 바닥에 앉아 있던 지음은 몸을 일으켜 미라가 주문해 둔 음식을 보았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
시간을 보니 4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는데도 희라나 미림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멍하니 있던 지음이 의자에 앉아 음식을 보다가 포크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 안에 넣는데 동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응.”
-지음아, 오늘도 대표님 차 타고 와?
“......동희야, 밥 먹었어?”
-밥? 아까 라면...... 왜?
잠시 후 지음은 희라와 이란이 먹던 음식은 치워달라고 요청하고, 동희의 음식을 하나 더 시켰다.
그리고 그 앞에 동희가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너도 먹어, 지음아.”
“먹었어, 난.”
“근데 지금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니야?”
“그냥...... 땡땡이.”
“땡땡이?”
동희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지음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일을 하는데 땡땡이를 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음의 얼굴이 예전과 달리 어두워 보였다.
“지음아.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너무 어두운데.”
“......그럴 게 뭐가 있어.”
“근데 왜 그래? 걱정 있는 사람처럼. 이제 조금만 지나면 십억도 받을 텐데.”
제 안색을 살피는 동희를 보며 지음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십억을 어쩌면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그냥 피곤한가 봐. 동희야,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바......다? 회사로 안 가고?”
“응.”
“나 아는 데 없는데.......”
지음은 대답 없이 일어나서 호텔을 나섰다.
동희가 그녀를 따라나서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 온정리! 거기 가는 길에 바다 있잖아, 기억나? 거기라도 갈까?”
“......그래.”
차에 오르자 동희가 지음에게 반복해서 물었다.
“진짜 바다로 가? 나 진짜 간다?”
“응, 가.”
지음이 시트에 기대 창을 열고 대답했다.
차가 스르르 출발하자 시원한 바람이 지음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런데 대표님한텐 말했어? 바다 간다고.”
“.......”
지음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레스토랑에서 강진에게 연락이 왔다는 걸 기억하고 휴대전화를 보았다.
[오늘은 먼저 퇴근해. 이따 집에 가서 보자.]
“말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실 텐데.”
“......괜찮아. 오늘 늦는댔어.”
그 말을 끝으로 지음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서울 외곽으로 나갈수록 스쳐 가는 건물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고, 붙어있는 간격이 벌어졌다.
서울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지음은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