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5/94)

#84화.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있던 이란이 손을 흔들었다.

“어, 희라 씨. 여기.”

희라는 오전에 이란에게서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시간은 2시가 넘어 있었다.

이란이 미리 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요.”

“괜찮아. 내가 너무 불쑥 찾아왔지 뭐. 요새 일이 바쁘지?”

“네, 프랑스 건도 그렇고. 제휴 맺고 뭔가를 시작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 미림이도 매일 집에 오면 우는 소리야.”

이란이 웃으며 메뉴판을 슬쩍 밀어 놓았다.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나서 희라가 물었다.

“미림이도 같이 부르시죠. 여기 스테이크 미림이도 좋아하는데.”

“다음에. 그간 잘 지냈지, 희라 씨?”

“......고모님은 잘 지내셨어요?”

이란은 희라의 얼굴에 스치는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나야 뭐 늘 같지. 근데 희라 씨 요새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얼굴이 너무 안 좋다.”

“그래요? 그런 거 없는데.......”

희라가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머뭇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요새 강진이 때문에 나도 아주 걱정이야. 세상에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런 애를 데려다 놓고.”

“.......”

“결혼이 어디 뭐 장난이니. 안 그래? 나는 솔직히, 희라 씨가 강진이한테 좀 더 살갑게 다가가면 좋겠어. 인물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그런 애가 희라 씨랑 어디 비교할 거나 돼?”

“휴...... 그러게요.”

희라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는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호텔 행사에도...... 같이 왔더라구요.”

“응? 뭐라고?”

“IO 호텔 VIP 행사에도 데려왔더라고요, 강진 씨가.”

“강진이 얘가 정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희라가 음식을 포크로 쿡쿡 찌르다가 눈을 또르르 굴렸다.

“참, 미림이는 창국 씨랑 같이 왔던데. 잘 지내나 봐요?”

“그래, 그렇다더라고. 거기도 같이 갔나 보네. 요새 잘되고 있는가 봐, 나야 잘 모르지만.”

희라는 이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닐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란이 눈살을 찌푸리자 희라가 재빨리 앞으로 다가앉아 연회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녀와 미림이 지음에게 했던 짓은 실수로 포장해서.

“......그러고 화장실로 가는데 창국 씨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뒤따라가던걸요.”

“뭐? 희라 씨가 잘못 봤겠지. 왜 창국이가 그러겠어.”

“오해일 수도 있지만....... 뭔가 묘하긴 했어요. 한번 알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희라가 이란을 은근하게 자극하자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게 다 그 발칙한 계집애 때문에....... 가만, 잠시만.”

이란은 분한 듯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

“어, 난데. 여기로 좀 나오지? 밥이나 같이 먹게.”

-지금요?

“너는 어른이 말을 하면 고분고분 네, 하는 법이 없니?”

이란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걔가 그렇다니까요.”

희라는 그녀가 전화한 상대가 지음이라는 걸 알아채고 얼른 이란의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

지음은 할 말만 하고 끊긴 전화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뭐야? 누구 전환데?”

그녀를 지나쳐 사무실로 향하려던 미림이 물었다.

“......고모님이세요.”

“울 엄마? 왜?”

“호텔 레스토랑인데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하시네요.”

지음은 그곳에 가 봤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명분도 없었다.

“엄마가? 거기...... 아까 희라 언니가 약속 있다고 갔는데? 뭐야, 나만 빼고 둘이 만난 거야? 나도 가야겠다.”

미림이 묻지도 않고 지음을 따라나섰다.

그것 역시 막고 싶었지만 제 발로 가겠다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고, 어차피 이란과 희라가 있는 마당에 미림이 더해진다 해도 비슷할 거란 생각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나오는 강진과 마주쳤다.

“한지음 씨, 어디 갑니까?”

“아, 저희 밥 먹으러 가요, 대표님. 좀 늦어서 이제 나가네요.”

강진은 미림과 함께 나가는 게 살짝 불안했지만, 미팅 시간에 늦기도 했고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맛있게 먹고 잘 다녀와요.”

당부를 한 강진은 유린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음은 먼저 길을 나서는 강진을 돌아봤다. 이제 그녀는 강진과 잠시 스치는 상황에서도 가슴이 뛸 만큼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뭐 해, 안 가?”

미림의 재촉에 지음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회사 밖으로 나섰다.

***

이란이 말했던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지음의 예상대로 희라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엄마, 왜 나는 안 부르고. 희라 언니만 부르기야?”

“너도 왔어? 너야 다음에 오면 되지. 뭘 또 따라왔어.”

이란의 말에 미림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지음을 가리켰다.

“얘, 운전도 못 해. 면허도 없어. 여기 혼자 오려면 버스니 뭐니 삼십 분도 더 걸릴걸.”

“앉아라.”

이란이 지음을 향해 말하자, 지음은 비어있는 희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 온 김에 밥이라도 한 끼 먹이려고 불렀다.”

“......네.”

그럴 리가.

물론 지음은 그 말은 꿀꺽 삼키고 레스토랑 매니저가 따라주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밥 한 끼 먹이려고 불렀다고 했지만 이란은 음식 시킬 생각은 않고 앉자마자 신문하듯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이해가 안 돼서. 우리 강진이랑은 대체 어떻게 만나게 된 거니?”

“.......”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너랑 우리 강진이랑 접점이 잡히질 않아. 사는 곳도 다르고 수준도 다른데.”

떠보는 듯한 질문에 지음이 물잔을 꽉 잡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란의 말처럼 강진과 접점 따위는 없는데.......

“얘가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그러게. 나도 좀 궁금하더라. 오빠가 데려오긴 했는데 어떻게 만났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이란과 미림이 대답을 종용하듯 그녀를 빤히 보았지만, 지음은 뭐라고 해야 할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입술에 꿀이라도 발랐니? 그게 아니면 너무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러서 할 말이 없는 건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이란의 말에 희라와 미림이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이란은 지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몰아붙였다.

“할 말이 없니? 혹시 우리 강진이랑 계약 결혼이라도 한 거야? 돈 몇 푼 받기로 하고?”

“헐, 엄......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고모님? 그게 대체......?”

이란의 말에 미림과 희라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지만, 지음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안 걸까.

계약 결혼, 그것도 돈이 얽힌 더럽고 지저분한 계약을 했다는 걸.

계약서상 지음은 계약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걸 어기면.......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진의 입장은 얼마나 난처할 것이며.

‘할아버지.......’

지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준 유일한 분이고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신 할아버지가 실망하실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게다가 계약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면 더는 강진을 보지도 못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의 조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떠다니며 상처를 입혔다.

지음의 미묘한 떨림을 알아챈 걸까.

이란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 말이 틀려? 그런 거지?”

“.......”

희라와 미림은 반박하지 못하는 지음과 그런 그녀를 몰아치는 이란을 숨도 쉬지 못한 채로 보고 있었다.

둘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조용히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저게 무슨 말이야? 너 알고 있었어?]

[언니,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이 자리에 엄마는 나 부르지도 않았는데. 근데 정말일까?]

[아주 의심스럽긴 하지. 안 그럼 강진 씨가 어디 저런 앨.......]

[하긴. 진짜 웃긴다, 쟤.]

옆에서 그런 얘길 나누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란은 더더욱 지음을 몰아갔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우리 강진이가 너 같은 거랑 갑작스럽게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

“이제 어떻게 할래? 네 발로 나갈래, 아니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쫓겨날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외면하기로 한 지음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계약서를 들이밀고 묻는 게 아니면 지금으로서 지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모른 척 잡아떼는 일이었다.

“뭐......? 앉아! 어디서 함부로 어른보다 먼저 일어서? 앉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기 더 있는 건 서로 불편할 거 같아서요.”

“뭐라고?”

“그리고 강진 씨와 저와의 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꾸 의심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강진 씨와의 문제는 앞으로 저희 둘이.......”

“뭐? 내가 강진이 고모야! 내가 못 물을 거 물었니?”

“아무리 고모님이셔도 이건 저희 둘 문제입.......”

지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란이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자칫했다간 또 저 두툼한 손, 반지까지 낀 손에 얼굴을 맞아 상처가 났을 테지만.

이번엔 지음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어? 이거...... 너, 이거 안 놔?”

이란이 악을 쓰자 지음이 이란의 손을 놓았다.

“......앞으론 이런 손찌검도 하지 말아주세요.”

“하, 이런 건방진 계집애를 봤나! 너도 네 엄마 아빠처럼 죽고 싶어?”

눈이 뒤집힌 이란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쥐어뜯을 듯 덤볐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미림과 희라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를 말렸다.

“엄마, 쪽팔리게 왜 이래.”

“고모님, 참으세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음의 가슴엔 이란의 말이 쿡 박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요? 고모님, 지금...... 우리 엄마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신다는 거예요?”

지음이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이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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