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진은 괴롭다는 듯 말했다.
“거기서 왜...... 그런 꼴을 당하고 있어?”
억지였다, 피해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하지만 알면서도 강진은 지음에게 쏟아부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데리고 간 파티에서, 거기 그러고 서서 고스란히 피해자가 되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말 못 해? 당신, 입 없어?”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화가 치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그를 바라보는 지음의 표정은 평온하기까지 했다.
강진이 지음의 양팔을 꼭 잡았다.
“칵테일을 쏟아부으면 당신도 똑같이 부어주라고.”
다시 생각하니 또 화가 치미는지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강진을 보며 지음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보고...... 똑같은 사람이 되라고요?”
“그건....... 아니면 따귀라도 치든가.”
“......더한 사람이 되든가?”
“하.......”
그녀의 말에 지음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 강진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분하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지음은 서럽지도 않았고 아까처럼 분하거나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자기 대신 화도 내주고 갚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든든하고 좋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강진이라니.
지음은 지금 순간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더한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거야. 내가 당신 뒤에 있잖아.”
지음은 화가 나서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가 지음을 보자 지음이 빙그레 웃었다.
“강진 씨가...... 나 대신 다 해줬잖아요. 나한테 못되게 군 사람한테 뭐라고도 해 주고 칵테일도 쏟아주고.”
“.......”
강진은 말없이 지음을 당겨 안았다.
그가 지음을 꼭 안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옷...... 버려요.”
“상관없어.”
그의 가슴을 밀어내보려 했지만 강진의 말을 듣고 팔에 힘을 풀었다.
“내가 같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지음도 팔을 뻗어 강진의 몸을 안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등이 손에 느껴지는 찰나, 그와 나누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겠다?」
「......네.」
지음이 입술을 악물고 팔을 툭 떨어뜨렸다.
잠시 진정하고 난 강진이 그녀를 떼어놓고 옷을 살폈다.
엉망이었지만 벗어버리면 그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어낸 듯했지만 아직 그녀의 목이나 턱, 얼굴에 묻은 흔적이 있어서 강진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려던 강진이 멈칫했다.
그 바람에 무심코 있던 지음 역시 그가 보고 있는 손수건에 시선을 두었다.
어딘가 익숙한, 끝부분에 J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흰색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보는 강진의 눈빛이 아련해지는데, 지음이 손수건을 알아보고 손을 뻗었다.
“어, 이건......!”
둘은 같은 손수건을 보며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첫사랑.......”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
그러다 강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지음을 내려다봤다.
지음 역시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강진을 올려다봤다.
***
지음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하아, 하.......”
더러워진 옷을 입은 채로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솨아아!
그녀의 머리 위로 맑은 물이 쏟아졌다.
분명 그건 자신의 손수건이었다.
엄마가 주신, 한지음의 ‘지’를 뜻하는 J 이니셜이 새겨진 흰색의 손수건.
지음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보자마자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걸 아직도.......」
「내 첫사랑.......」
「뭐?」
채 끝맺지 못한 그녀의 말에 강진의 시선이 손수건에서 떠나 지음을 향했다.
놀란 건 지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진의 말이 너무 당황스러워 그를 보았다.
하지만 강진의 기세에 눌려 묻지 못했다.
그가 뭐에 얻어맞은 듯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지음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정작 충격을 받은 사람이 누군데.
「이걸...... 당신이 알아?」
「.......」
아차 싶었던 지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지음의 어깨를 흔들었다.
「말해....... 말해 봐!」
「.......」
「이걸......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 손수건을 어떻게 아냐고!」
그가 지음의 눈앞에 이니셜이 잘 보이도록 손수건을 들고 물었다.
「말해, 한지음. 당신이 이 손수건을 어떻게 아냐고!」
그녀의 한쪽 어깨를 붙든 강진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 아팠지만, 지음은 되도록 표정을 담담하게 유지한 채로 입술을 열었다.
「......아, 착각......했나 봐요.」
심상치 않은 반응에 잘못 봤다고 간신히 그 순간을 모면했지만, 지음의 머릿속은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엉망이었다.
강진이 어떤 마음이든 간에 지음의 마음만큼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솨아아!
그녀의 머리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숨이 차올라, 지음이 입을 벌리고 하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첫사랑이라니. 무슨 말일까.......”
머리가 아파왔다.
‘아냐. 기대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이 순간조차도 산산조각이 나 버릴 거야.’
지음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
지음과 마찬가지로 강진 역시 욕실에 들어가서 옷도 벗지 못한 채로 온몸으로 물을 맞고 있었다.
그녀가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걸 막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똑바로 말하라고 묻지도 못했다.
손수건을 사용하지도 못할 거면서 가슴에 품고 다녔던 이유는 단 하나.
이젠 잃어버린 그녀를 차마 잊을 수 없어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녈 떠올리며 말을 뱉었다.
「내 첫사랑.......」
아련하게 말을 꺼내는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분명 지음은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했어, 지금?」
격분한 듯한 강진 때문에 지음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가녀린 양어깨를 꽉 붙들고 흔들면서도,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뭐라고 했냐고.」
강진의 다그침 때문인지 지음이 고개를 돌렸다.
「아녜요. 잘못...... 내가 잘못 봤나 봐요.」
하지만 강진은 이대로 덮어둘 수 없었다.
「이걸...... 당신이 알아?」
「아니......요.」
「좀 전에 뭐라고 했어? 이걸......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 손수건을 어떻게 아냐고!」
강진은 손수건을 펼쳐 J라는 이니셜이 지음의 눈에 잘 보이도록 흔들었다.
손이 떨리고 숨이 찼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말...... 하라고!」
「으음.......」
결국 지음이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을 뱉었다.
강진이 고개를 툭 떨궜다.
「말해줘, 제발....... 당신이 이걸 어떻게 아는 건지.......」
그녀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숙인 채로 무너지듯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이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건데.......」
결국 강진은 지음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아....... 한지음, 한지음. 대체 뭔데.......”
강진이 쏟아지는 물을 잠그고 뿌예진 거울을 손으로 슥 문질렀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만약 손수건의 주인이 한은주가...... 아니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서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동안 그가 혼자 해 온 가슴앓이는 대체 뭐였단 말인가. 누굴 위한 마음이었단 건지.
그러다 문득 동희가 했던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지음이랑 누나랑 보육원에 맡겨졌어요.」
「누......나?」
「......몇 번 못 봐서 잘은 몰라요. 지음이랑 따로 입양됐다고 들었어요.」
강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하지만 분명 형 민준이도 형수 은주도, 은주에겐 가족은 없다고 했다.
「이름이 뭐였습니까?」
「뭐였더라....... 은진? 주연......? 뭐 그런 거였는데.」
“하.......”
순진하게도 그냥 민준과 은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데다, 한은주와 이상하리만치 닮은 한지음을,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강진이 주먹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손가락이 욱신거렸지만, 그의 마음보다 아프진 않았다.
***
다음 날, 강진은 지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일찍 출근을 했다.
동희가 있으니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면 될 텐데, 강진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바보 같고 어리석은 첫사랑에 대해 정리를 할 시간이.
그는 첫사랑에 대해 정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오전 내내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똑똑.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한은주에 대해...... 알아봐, 하나도 빠짐없이.”
다만, 정후에게 지시를 했다. 아주 오래전에 해야 했을 일을.
“뭘...... 하라고요? 아니아니, 뭘 하라고?”
“한은주. 한은주에 대해 알아보라고.”
정후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숨을 내쉬고 강진의 책상에 두 손을 짚었다.
“강진아.......”
“알아봐. 부모, 가족, 어떻게 살았는지. 동생은 있는지. 있다면...... 어디 있는지, 없다면.......”
‘왜 없는지.’
강진이 펜을 꽉 쥐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할 리 없는 정후가 괴롭다는 듯 말했다.
“강진아, 왜 갑자기...... 너 잘 참고 있었잖아.”
“뭐? 무슨 말이야?”
그제야 정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 강진이 그를 올려다봤다.
“하...... 무슨 말이긴! 네 첫사랑, 그 지독하고도 지독한 그거 말야! 그러지 말고.......”
“......너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어? 아, 그거야 뭐,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겠냐.”
강진이 펜을 놓았다.
“근데 말이야.”
“응?”
“그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정후의 물음에 강진은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내가 그리워했던 게...... 어쩌면 한은주가 아닐 수도.......’
“아, 그리고 알아보는 김에.......”
강진이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젠 한은주를 떠올리는 것보다 한지음을 떠올리는 게, 더 숨이 차고 가슴이 저리고 그랬다.
“한지음에 대해서도 알아봐.”
“지음이? 지음이는 왜?”
“부모, 가족...... 언니가 있는지, 있다면 누군지. 그리고 부모님 사고는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건지.”
“대체.......”
강진은 얼떨떨한 정후의 얼굴을 보면서 손수건을 손에 쥐었다.
J라는 이니셜. 그전엔 그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주의 ‘주’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음의 ‘지’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때 엎어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네, 차강진.......”
-저예요, 민유린.
흰색의 손수건이 그의 손안에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