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흰색의 드레스라서 붉은색의 음료가 더욱 두드러졌다.
지음은 악의적인 장난에 대거리하려다가 고작 이런 일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꽉 물었다.
“......화장실이 어디죠?”
“저쪽.”
네가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희라와 미림이 쳐다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한지음 씨, 잠시만.”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희라가 티슈를 들고 지음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앗!”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그녀의 팔을 치웠지만, 마치 남이 저지른 일인 양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다시 손을 뻗는 행태가 퍽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봐요, 내가 좀 닦아줄게.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됐.......”
됐다고 말하려던 지음은 말을 잇지 못했다.
드레스에 맞춰 걸고 온 목걸이에 희라의 손이 닿은 바로 그 순간, 그녀가 지음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낚아채 버린 것이다.
툭!
‘아.’
아름답게 반짝이던 목걸이가 단숨에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돼지 목에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가 떨어졌잖아?”
“어머, 언니도 참.”
희라의 말에 미림이 배를 잡고 미친 듯 웃어댔다.
“어떡하니? 목걸이가 그만 망가져 버렸네. 실수. 미안?”
“아무래도 넌 집에 가야겠다, 지음아. 언니도 참. 조심하지 그랬어.”
“그러게. 어쩌다 걸린 거지? 미안해, 지음 씨.”
지음은 실랑이를 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옷은 가슴팍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칵테일에, 끈적이는 케이크로 엉망이었고, 강진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는 망가져 버렸다.
지음이 희라와 미림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꽉 물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희라와 미림은 서로 배를 잡고 깔깔거리다가 옆에 놓인 칵테일 잔을 들어 맞부딪쳤다.
“치얼스.”
“아, 고소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
“언니 연기 잘하더라?”
“그래? 내가 좀 하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희라와 미림이 연신 웃고 떠드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새에, 뒤쪽에서 누군가와 얘길 나누던 창국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음 씨.”
그가 강진을 부르려 돌아봤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얘길 나누느라 이쪽을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창국은 서둘러 지음이 향한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
화장실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긴,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들 즐기고 있겠지.
지음은 거울을 통해 엉망이 된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
사람이 어쩜 저렇게 못될 수가 있을까.
손에 힘이 없어 미끄러졌다느니, 잘못해서 손에 걸렸다느니 하는 말들은 전부 거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욕이라도 퍼붓고 소리를 지르고도 싶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도 사람인데.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옷은 케이크와 끈적거리는 액체 때문에 엉망인 상태로 그랬다간 되려 웃음거리가 되는 건 지음이었을 거다.
한숨을 내쉬며 챙겨온 손수건에 물을 묻혀 옷을 닦아보았지만 그리 쉽게 지워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작은 손에 끊어진 채 들린 목걸이.
강진이 선물해 준 물건이고, 그가 골라준 옷이었다. 이 자리가 지음에게 어색할진 몰라도 그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음이 세면대를 꽉 붙잡았다.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괜찮아......, 괜찮....... 후우.......”
가슴팍에 묻은 짙은 얼룩은 지워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물기에 번져 보기가 흉했다.
지음은 제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제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몇 분 전만 해도 강진이 예쁘다고 했는데 이 꼴을 보일 생각을 하니...... 참담했다.
그러다 문득 계약서의 내용이 그녀의 뇌리를 날카롭게 스쳤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
지음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감은 채로 심호흡을 했다.
조금 진정이 되는 듯해서 한참을 서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저...... 지음 씨.
“......?”
창국의 목소리였다.
-지음 씨, 나예요, 권창국.
“......네.”
잠긴 목소리를 티 내지 않으려고 목소릴 가다듬었다.
-어....... 음,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지음은 서둘러 옷을 닦았다.
***
강진은 사실 이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만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이런 자리는 완전히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비공식적인 것도 아니라서 어중간했고. 그건 강진을 피로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사람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눈으로 지음을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엔 희라와 미림이 환하게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미림의 파트너로 온 창국이 여자 화장실 쪽으로 가는 모습도 보였다.
어쩐지 이상한 그림이었다.
“실례합니다.”
강진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희라와 미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흥, 그러니까. 그런 옷과 신발이 가당키나 해? 케이크 뭉개졌을 땐 속이 다 시원하더라.”
“그러게. 언니, 아까 걔 옷 쳐다보는 눈 봤어? 진짜 웃겨서. 목걸이도 그거 뭐, 제 힘으로 만져볼 수나 있겠어? 다 오빠 돈이지. 그치?”
희라와 미림이 얘길하며 깔깔거렸다.
강진이 두 여자의 어깨를 양쪽으로 가볍게 잡고 번갈아 보았다.
“지금 한지음 씨 얘길 하고 있는 건가?”
“헙!”
“가, 강진 씨!”
“놀라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강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둘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토록 신이 나서 그녀의 뒷담화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강진은 지음이 어디로 갔냐고 묻지 않았지만, 자신이 짐작하는 대로 창국이 서 있는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지음 씨, 어...... 내가 좀 들어갈까요?”
창국이 화장실 문에 대고 말하는 게 들렸다.
강진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손잡이를 잡았다.
“형이 왜?”
“......!”
강진은 놀라서 눈이 커지는 창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지음을 불렀다.
“한지음. 안에 있어?”
“강진아.......”
창국이 뭔가 변명이라도 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지만, 강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한지음! 나와!”
잠시 후 지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꼴은...... 아니나 다를까 엉망이었다.
강진이 스캔이라도 하듯 지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다가, 끝내는 망가진 목걸이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시선이 닿았다.
“하.......”
그가 괴로운 듯 한숨을 쉬고는 재킷을 벗어서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창국에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와 강진의 손 사이에서 목걸이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지음은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가 나무라지 않고 손을 잡아주자 조금 진정이 되는 듯도 했다.
언제나처럼 강진의 손은 따뜻했으니까.
***
그 시각, 유린은 동기와 함께 사무실에 있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일어났다.
“어디로 갈 건데요?”
“글쎄, 어디로 갈까? 뭐 먹고 싶어?”
그냥 간단하게 먹자고 하려는데 문이 열리고 이란이 들어왔다.
그녀가 유린을 알아보고 삿대질을 했다.
“너...... 또......!”
유린이 흥, 코웃음을 치며 가방을 들고 동기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되겠네요, 국장님. 먼저 가볼게요.”
“야, 너 어디가?”
이란이 손을 뻗어봤지만 유린은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다가 도로 살금살금 다가와 이번에도 녹음기를 꺼냈다.
“녹음하고 있다는 건 모를 거다. 흥!”
유린이 나가자 이란이 가방에서 블랙박스를 꺼내 동기와 함께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 지난번에 봤잖아 뭘 또 봐.”
“조용히 안 해! 이것 봐.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무슨 술을 처먹고 운전을 해, 글쎄!”
“아, 뭐...... 차도 많지 않은 거리이고.......”
“미친놈.”
“그리고 그렇게 차가 홀랑 뒤집힐 줄 알았냐고, 내가. 지가 내 차 피하다가 막 가로수 들이받고 차가 뒤집힌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아휴, 정말.”
“신고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그냥 가라며.”
동기의 말에 이란이 그의 등을 세게 쳤다.
짝!
“그럼, 그렇게 술을 처먹고 역주행을 해서 사고를 냈는데, 게다가 그 자리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는데! 어쩌려고!”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뺑소니치는 수밖에. 응? 이제 보니 울 엄마 판단력, 크으!”
동기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자, 이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 근데 엄만 이거 왜 자꾸 봐? 심장 떨려 죽겠구만.”
“시끄러워.”
꼼꼼히 챙겨본 이란이 정 비서에게 조용히 전화를 했다.
“......알아봐, 정비서가. 동기가 낸 사고로 죽은 부부에게 애가 있었는지, 있다면 누군지.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이란이 블랙박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수십 번을 다시 생각해도 분명 그 사고가 지음의 부모를 죽인 사고가 맞는 것 같았다.
***
강진은 지음의 손을 붙잡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다가 자신과 지음을 보고 있는 희라와 미림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놀라는 그들 앞에 지음을 세우고 그 옆에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섰다.
“둘이, 이렇게 만든 건가?”
“......네? 하, 아니요!”
“강진 씨, 우리가 무슨......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강진이 희라와 미림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칵테일 붓고 케이크 얹고. 꼭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거기에 하나 더 하자면 목걸이까지 망가뜨렸나 보군. 누가 그런 악질적인 짓을 한 것 같은데. 내 눈에만 그런가?”
“그, 그게.......”
강진은 눈앞에서 다 본 것처럼 그들이 한 일에 대해 읊었다.
「......유학 보내버릴 테니까.」
미림은 강진이 병원에서 경고했던 걸 떠올리며 손으로 희라를 가리켰다.
“희, 희라 언니가 하자고 해서! 난 진짜, 진짜로 아무 짓도 안 했어!”
“야! 내, 내가 언제! 그건 그냥 시, 실수로.......”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둘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지음이 한숨을 쉬었지만, 강진은 그냥 조용히 덮고 나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가 지음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더니 양손으로 옆 테이블에 있는 칵테일을 들었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희라와 미림의 옷, 정확히 목과 가슴의 경계선에 칵테일을 끼얹어 버렸다.
“아악!”
“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희라와 미림이 소리를 꽥 질렀다.
놀란 건 그들뿐이 아니었다. 소란에 지켜보고 있던 주위 사람은 물론 창국과 지음 역시도 놀라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신경 써서 입은 희라와 미림의 옷은 엉망이 되었다.
강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케이크까지는 봐줄게. 나도 그것까진 못하겠네, 치졸해서.”
“......흑!”
“.......”
미림은 금방 울상이 되었고, 희라 역시 분하고 창피해서 눈시울이 벌게졌다.
강진이 그들을 번갈아 보며 놓았던 지음의 손을 잡았다.
“가자.”
지음은 강진을 따라나서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가슴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녀의 입술 끝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