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사고?」
「온정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거기 밖에 없거든요. CCTV도 없고.」
이란은 화장대 앞에 앉아 병원에서 동희라는 아이가 강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검은색 차라고 했어요.......」
“그 아이가 봤을까? 그런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긴 시골이라 그 동네에선 떠들썩했으니까.”
지역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떠들어 대던 걸 이란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무광의 검은색 차. 생긴 건 꼭 스포츠카처럼 생겼는데...... 뒤쪽에 3자처럼 생긴 표시가 있다고 했나, 눈처럼 붉고 동그란 등이 양쪽으로 두 개씩 달렸다고 했나.」
이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놈이...... 보지도 못했을 거면서 자세히도 기억하고 있잖아?”
이란은 속이 끓었다.
그 모양새는 분명 동기가 제가 가진 차가 있으면서도 사겠다고 우겼던 부OO 베이O이었다.
“거기다, 무슨 지갑을 떨어뜨렸다고? 세상에.”
이란이 방을 서성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아, 김동희 씨? 나 차강진 고몬데,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저, 저를요?
대번에 주눅 든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하는 걸 들으며 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얘는 좀 쉽겠네.”
***
잠시 후 이란은 한적한 카페에 동희와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짐작대로 소심하고 겁많은 성격인지 동희는 잔뜩 주눅 들어서 어깨를 움츠린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나 누군지 알죠? 지난번 병원에서 봤는데.”
“......네.”
이란이 커피를 홀짝 마시고 동희를 살펴보았다.
“지음 씨한테 내가 시고모가 되는 거지, 강진이 고모니까. 내가 뭘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잠시 만나자고 했어요.”
“저, 저한테요?”
동희의 긴장한 얼굴을 보며 차를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마시면서 천천히 들어요. 아주 간단한 거니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동희 씨도.”
“네.”
이란은 찻잔을 들면서도 떨리는 동희의 손끝을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한지음 씨랑 같은 보육원에 있었다고? 내가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그 보육원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동희는 이란과 지음 사이의 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뿐더러, 보육원에 대해 묻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어서 그녀가 묻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한참을 이야기를 듣던 이란은 카페에 있는 케이크와 와플 따위의 디저트를 동희 앞에 내밀었다.
“그으래. 근데 참 이상한 게, 원래 지음이랑 강진이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나? 정후랑 같은 동네 출신이라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 건가?”
“아, 그런 건 아니고, 정후 형이 지음이를 찾아왔거든요.”
이란은 그에게 묻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지음에게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계속 말을 했다.
“아, 맞다, 맞다. 그랬다고 하더라고, 안 그래도 정후가.”
“아, 정후 형이요?”
“그럼. 내가 고모잖아, 그 정도야 다 얘길 하지.”
어느새 이란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동희는 인식하지도 못했지만.
“음, 그래서 온정리에 살다가 덜컥 정후를 따라온 거구나? 그때 정후가 강진이를 소개해 준 거고? 근데, 소개한다고 만날 사람이 아닌데, 우리 강진이가. 얼마 받기로 했어?”
“돈은.......”
그런 말까지 해도 되나, 정후가 이란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했다는 건가.
동희가 머뭇거렸다.
이란은 그 태도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휴,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힘들 땐 도움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지음이나 너나...... 그 시골에서, 다들 힘들었을 거 아냐. 그렇지? 그래서 강진이가 좀 도와준 것뿐이고.”
“......네.”
동희가 고개를 숙였다. 액수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게다가 이란이 다 알고 있기도 했고, 자신은 대답한 게 다였다.
“뭐 얼마가 됐건 중요한 건 액수는 아니고, 그래서...... 뭐 언제까지 함께 있을 작정이래?”
이란이 대수롭지 않게 커피를 마시며 속내를 숨기듯 시선을 돌렸다.
“.......”
동희는 어느 순간부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란이 다 안다고는 했지만 어쩐지 더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안다면 아는 대로 동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거고, 모른다면 동희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 그런 것까진 얘기 안 해 줘?”
“아...... 저는 그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왜? 이거 먹고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지.”
“괜찮......습니다. 지음이한테 가 봐야 해서요.”
동희가 엉덩이를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이란은 붙잡지 않았다. 정확하게 들은 건 아니라도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도 짐작할 만은 했으니까.
강진과 지음이라는 아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란의 짐작대로 지음은 돈이 필요했고.
‘강진이 녀석은 그런 얼빠진 계집애가 필요했겠지.’
“그래, 오늘 나와줘서 고마웠어. 가 봐.”
“네. 안녕히...... 계세요.”
동희가 눈치를 보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제야 이란의 표정이 도로 싸늘해졌다.
그러다가 동기가 냈던 사고를 떠올리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아휴, 넋 빠진 놈. 내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보육원엘 한번 가 봐야겠다. OO 보육원이라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
지음은 하루 종일 더욱 따가워진 희라의 눈길을 느끼며 일을 해야 했다.
어딜 가든 그녀의 날카롭고, 상처받은 눈빛이 따라다녔다.
강진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지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얼마 후면 자신은 사라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너무 심하게 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그렇게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실장님, 찾으신 거 여ㅤㄱㅣㅆ......어요.”
미림이 서류를 들고 희라의 자리에 내려놓다가 희라의 눈빛을 보았다.
“......왜요? 또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은 무슨. 그냥 존재 자체가 짜증이 나서 말야.”
희라의 말에 미림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건 그렇죠.”
희라가 피곤하다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먼저 퇴근할게.”
“실장님, 나도요. 오늘 약속이 있으니까.”
미림이 얼른 가방을 들고 일어나 희라를 따라 걸었다.
“한지음 씨? 정리 잘하고 가, 저것들 좀 확인하고.”
미림의 손이 가리킨 곳엔 쌓인 팸플릿과 초대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네.”
희라와 미림이 나가자 지음은 쌓은 종잇조각 앞에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편히 앉았다.
엉망이 된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지음은 손을 뻗어 책상 끝에 아슬아슬 걸린 휴대전화를 잡아 귀에 댔다.
“네.”
-한지음, 어디야?
강진이었다.
“네? 사무실......인데요?”
-알았어.
“여보세요?”
전화는 뚝 끊겨 있었다.
지음은 별일이 아닌가 싶어 휴대전화를 옆에 내려놓고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강진이 사무실로 들어와 그녀를 일으켰다.
“사무실 일을 혼자 다 하는 건가?”
“아...... 정리하느라고.”
“알았으니까 가자.”
지음이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아, 이거 다 해야 하는데요.”
“내일. 오늘은 갈 데 있잖아.”
지음은 그 말을 듣고서야 떠올랐는지 강진을 따라나섰다.
***
집으로 향했다가 밖으로 나온 그들이 향한 곳은 IO 호텔 앞이었다. 그곳에서 VIP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지음은 한눈에 봐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우아하게 휘감은 흰색의 머메이드 드레스는 아주 먼 조명에도 반짝일 지경이었다.
호텔 앞에서 강진이 지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무...... 과한 거 같아요.”
지음의 말에 강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예쁘니까 걱정 마.”
강진의 따뜻한 손이 지음의 손을 잡고 호텔 안으로 향했다. 그가 곁에 있으니 안심은 됐다.
호텔 안은 지음의 드레스보다 백만 배는 더 화려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조명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처음 보는 파티 음식들. 그보다 더 차려입은 사람들까지.......
그제야 지음은 자신의 옷이 다른 사람의 옷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편해졌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는데, 슈트와 드레스를 입은 수많은 사람이 제각기 자리를 찾아 서 있었다.
강진에겐 이곳도 일의 연장인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그를 부르자, 강진이 지음을 향해 돌아섰다.
“잠시 다녀와야 할 거 같은데. 혼자 괜찮겠어?”
“아, 난 신경 쓰지 말아요, 괜찮아요.”
“그래, 잠시만 있어. 금방 올게.”
강진이 뒤돌아 멀어지고 나자, 지음은 테이블에 먹음직스럽게 놓인 음식을 향해 다가섰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어쩐지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왔어?”
“......?”
돌아보니,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희라와 청록의 드레스를 입은 미림이 보였다.
어쩜 둘이 드레스 색도 저리 저에게 잘 어울리는 걸로 입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창국이 누군가와 얘길 나누고 있는 걸 보니 미림은 그와 함께 온 모양이었다.
지음은 희라의 어깨 위에 얹힌 꽃을 보며 들었던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강진 씨랑 같이 왔는데, 왜요? 커플 동반 모임이라고 하던데.”
지음이 희라를 슬쩍 보았다.
“그러는 실장님은 누구랑 오셨어요?”
그 말에 희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미림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얼굴색을 바꿨다.
지음이 태연하게 케이크를 집어 들자 희라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옆에 있는 붉은 색의 칵테일을 들어 입술에 댔다.
“내가 누구랑 오든. 네 알 바 아니잖아?”
“그런가요? 제가 강진 씨랑 온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게, 진짜.”
지음을 노려보던 희라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칵테일을 그녀의 드레스에 부었다.
“......!”
“어머, 내가 손에 힘이 좀 없어서. 어쩌니? 어차피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였지만.”
지음의 가슴께부터 칵테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지음이 갑작스런 일에 당황하는 사이 희라는 옆 테이블에서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었다.
작은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입으로 가져가 음미를 하더니 천천히 지음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를 짚고 몸을 빙그르르 돌리던 희라가 삐끗하더니 케이크를 지음의 어깨에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아......!”
안 그래도 이미 엉망이던 옷이 더욱 지저분해졌다.
일그러지는 지음의 얼굴을 보던 희라가 당황한 목소리로 미림을 돌아봤다.
“앗...... 어떡해? 미림아, 손수건이라도 있니? 얘, 손수건 필요할 거 같은데.”
“언니, 나 오늘은 손수건 안 가지고 왔어. 차라리 화장실에 가서 닦고 와. 엉망이다.”
미림과 희라가 지음 앞에 서서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지음이 입술을 꽉 물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화장실이 어디죠?”
“저쪽.”
지음은 희라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지음에게 다가섰다.
“한지음 씨, 잠시만.”
희라가 티슈를 들고 지음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앗!”
놀란 지음이 그녀의 팔을 치웠지만, 희라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다시 손을 뻗어 지음의 옷을 닦아 주었다.
“가만히 있어봐요, 내가 좀 닦아줄게.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됐.......”
됐다고 말하려던 지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음의 가슴에 희라의 손이 닿은 바로 다음 순간, 그녀가 지음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낚아채 버린 것이다.
툭!
단숨에 끊어진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돼지 목에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가 떨어졌잖아?”
“어머, 언니도 참.”
희라의 말에 미림이 배를 잡고 미친 듯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