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지음이 그림을 그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작업실로 향한 강진은 그녀의 앞에 창국이 있는 걸 보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 강진아, 사실, 내가 미림이한테 부탁했어. 너도 알다시피 나도 민준이와 같이 그리곤 했으니까.”
강진은 지음의 그림 선생으로 왜 당신이 부탁을 하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난처해하는 지음의 표정을 보며 이 자리에서 그럴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런 배려를 불편해하는 여자였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지음에게 형의 작업실을 열어주고 미술 강사까지 붙여준 건 다름 아닌 강진,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 미술 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을 순 없었다.
더구나.
「엄청 힘들게 구했어. 다들 연락도 안 되고 뭐....... 초보, 그것도 시간이 될 때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
미림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창국과 그 설명을 함께 듣고 있던 지음이 자신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강진은 얼굴에 초록빛의 물감이 묻은 지음을 보며 격하게 올라오는 질투의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게 뭐야, 캔버스가 모자라서 당신 얼굴에 그렸어?”
“......네?”
“온 세상에 있는 캔버스라도 다 가져다줄 테니.......”
강진은 이곳에 단둘만 있는 것처럼 지음을 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에 묻은 물감을 지웠다.
“아.......”
지음이 민망한 얼굴로 창국을 힐끔 보았다.
강진은 지음의 따뜻하고 말랑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손에 닿자 답답함이 풀리는 듯했다.
그녀를 보다가 지음의 손에 들린 붓을 내려놓고 그 손을 잡았다.
“......형이 그림 선생을 하기로 했다니 잘 배우도록 해. 기초를 배우기엔 나쁘지 않겠지.”
“네, 그럴게요.”
지음은 혹시 강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싶어 얼른 대답했다.
강진이 지음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녀의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오늘 우린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
“문은 잠그고 열쇠는 작업실 앞 우편함에 넣어두시고 가면 됩니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선을 그은 강진이 지음과 함께 작업실을 나섰다.
창국은 초록 물감이 묻은 손을 툭 떨군 채로 강진과 지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허탈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밖으로 나온 지음은 강진의 차에 올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음은 그가 갑작스럽게 작업실로 오질 않나, 이렇게 밖으로 나오질 않나, 강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이 됐다.
혹시나 또 제가 전화를 받지 않았나 싶었지만 휴대전화를 소리로 바꿔놨어도 내내 잠잠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서 혹시 그가 다른 무언가에 화가 난 건 아닐까 싶었다.
지음은 어디로 가냐고 묻는 대신 얼른 그를 따라 벨트를 하고 말했다.
“아, 나...... 사실 선생님 없어도 돼요. 작업실도 마찬가지지만...... 작업실은 마음에 들어서 해도 좋다면 혼자 그려봐도 괜찮아요.”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던 강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왜인지도 모르고 강진의 이런 태도에 또 주눅이 들었겠지.
그런 생각에 지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배워. 당신이 좋아하는 거니까.”
“.......”
“대신.”
“네?”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긴장을 풀고 지음이 그를 보았다.
“내가 불안하지 않게 해 줘.”
무슨 말인가.
들으면서도 그 뜻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지음이 큰 눈을 깜빡이자, 강진이 말을 덧붙였다.
“당신과 형이...... 함께 있는 걸 보고 내가.......”
“......?”
‘신경 쓰지 않게...... 해 줘.’
강진은 마지막 말을 간신히 삼키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지음은 그의 말을 반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괜찮다면 지음도 괜찮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집으로 향한 강진은 지음을 드레스 룸 앞에 세웠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에 드는 옷으로 골라서 예쁘게 입고 나와.”
“.......”
그가 룸 밖으로 나가자 지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닌,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걸려있는 옷을 보았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예전처럼 원피스나 투피스 따위의 옷이 불편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치마를 입으면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도 어려웠고, 움직이는데 제약이 있었으니까.
‘어딜 가는 건지 알면 고르기 쉬웠으려나.’
지음이 옷자락을 툭툭 건드리며 넋 놓고 옷을 바라보는데, 강진이 들어왔다.
“아직도 못 골랐어?”
“아, 네.”
무심코 강진에게로 몸을 돌리던 지음은 저도 모르게 우와,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매번 그에게 잘 어울리는 슈트를 입곤 했지만 짙은 잿빛의 슈트를 입은 오늘의 강진은, 정말 멋있었다.
상대적으로 지음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강진은 그녀의 감탄한 듯한 얼굴을 모른 척하더니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흰색의 원피스를 골라 건넸다.
지음은 그가 건넨 온몸의 라인을 드러내면서도 단정하고 레이스까지 달린, 매우 여성스러워 보이는 드레스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과한 거 같은데요.”
“전혀. 당신이랑 잘 어울릴 거야.”
강진은 그녀가 입은 편한 옷을 벗기고 직접 원피스를 입혀주기까지 했다.
어깨선과 허리라인에 슬쩍슬쩍 스치는 그의 따뜻한 손가락 감촉 때문에 지음은 흠칫흠칫 놀랐다.
“역시 잘 어울리네.”
강진이 흡족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지음의 골반을 들어 올려 화장대 위에 앉혔다.
“앗.......”
“예뻐.”
그가 지음을 쓰다듬듯 보더니 그녀의 이마와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어딜, 어딜 가는데 이래요......? 아, 혹시 할아버지 뵈러 가는 거예요?”
주말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물었지만, 강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로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고 웃기만 할 뿐.
“나가자.”
지음은 강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아,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계약서 내용을 내내 곱씹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그게 조건이었고,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정신 차려, 한지음. 십억이 달린 일이야.’
지음이 차에 오르며 고개를 저었다.
***
강진의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여길...... 왜?”
“그냥. 밥 먹으러 온 거야.”
예전에도 그와 데이트 겸 호텔이나 레스토랑 등을 갔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그러려니 했다.
그를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데 예약이라도 해 둔 건지 강진의 행로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등을 보며 따라 걷는데, 강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날카롭고 높고, 지음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목소리가 밝게 들렸다.
“강진 씨! 어서 와, 여기예요.”
저건 분명 김희라의 목소리였다.
지음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희라는 아직 지음이 함께 왔다는 건 몰랐는지 말을 이었다.
“갑자기 오라고 해서 놀랐죠? 여기...... 저희 아버지도 함께 왔어요. 강진 씨 보고 싶다고 하셔서.”
강진의 등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살짝 몸을 돌려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의 말이 이어지자, 지음은 더는 숨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녀가 강진의 옆으로 다가섰다.
강진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던 희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멈칫하던 희라가 떨리는 팔을 들어 지음을 가리켰다.
“네......가 왜......?”
저도 모르게 반말을 하던 희라가 싸늘해지는 강진의 얼굴을 보고 얼른 말을 바꿨다.
“하, 한지음 씨가 왜 여기......?”
“이쪽이 선약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희라가 물었지만 강진은 건국을 보며 대답했다.
잠시 후 셋으로 예약해 둔 레스토랑 자리엔 네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당연히 일을 꾸민 희라의 얼굴은 음식을 잘못 먹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건국의 표정이라고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된 건가? 우리 희라와 자네, 잘 되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잘 되어간다는 게 어떤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회장님의 따님과 저는 친구 사이, 또는 직장 동료일 뿐입니다.”
강진이 차분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건국에게 말했다.
그러더니 지음을 그에게 소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를 못 드렸군요. 이쪽은 제 아내 될 사람, 한지음 씨입니다.”
“뭐......라고? 아내? 그럼...... 와이프가 있는데도 그랬단 말인가?”
강진의 말에 건국이 희라와 강진을 번갈아 보았다.
희라가 울상을 짓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강진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보였다.
“으음.......”
“안 그래도 희라에게 여러 차례 말했는데,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군요. 회장님께서 오셨으니 제대로 다시 말씀드리는 게 옳을 듯합니다.”
강진이 지음의 손을 꽉 잡았다.
“이미 전 이 여자의 남편입니다.”
건국이 굳은 얼굴을 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에서 그의 기분을 대변해 줄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자리에 괜히 나온 거 같군. 우린 다음에 보세. 일어나. 가자!”
마지막 말은 희라에게 향했다.
말을 마친 건국이 성큼성큼 멀어지는데 희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강진과 지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나와!”
분에 찬 건국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희라가 가방을 손에 쥐고 일어나 강진을 보았다.
“이렇게...... 해야 했니? 꼭? 우린...... 그래도 친구인데?”
희라의 목소리가 떨렸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고여 툭툭 떨어졌다.
강진은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 더 할 수도 있어.”
“......!”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그만하고...... 네 길 가, 김희라.”
희라의 몸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희라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우린...... 먼저 간다.”
“.......”
결국 그 자리에 남은 건 희라뿐이었다.
희라는 멀어지는 강진의 든든한 등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지음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그의 모습이 흐릿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