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을 나가는 강진을 보며 지음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가는 강진의 등을 보았다. 넓고 단단한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멋있게만 보였다.
“주말에도 바빠서 어떻게 해요?”
지음의 말이 의외였는지 문을 열려던 강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
“와이프 같네, 당신.”
“아......!”
강진의 말에 지음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지음에게 다가와 그녀를 살짝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 지음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면 우리가 계약관계로 지저분하게 얽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는데.
문제는 강진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서글픈 마음이 들어 마음이 가라앉으려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일정이라 미룰 수가 있어야지. 내가 누구 때문에 몇 번이나 출장에서 차를 돌려 돌아왔더라?”
“아, 그건.......”
강진이 지음을 떼어놓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함께 밖으로 나가 단지 앞으로 향했는데 동희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동희의 인사에 강진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지음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늘 선생님 만나는 날이지?”
“네.”
동희가 보고 있는 앞에서 강진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워 지음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강진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하긴 강진 씨가...... 누구 눈치를 볼 사람은 아니지.’
“다녀올게.”
강진이 지음을 당겨 가볍게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동희가 놀랐는지 얼른 몸을 돌리는 게 지음의 시선에 들어왔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래. 동희 씨, 부탁합니다.”
“네? 아...... 네.”
강진의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던 지음이 동희에게 슬쩍 시선을 두었다.
“......가자.”
“어? 응, 그래. 얼른 타.”
동희가 지음을 놀리는 일은 없겠지만 괜히 찔리는 마음에 지음은 얼른 차에 올랐다.
작업실로 향하는 동안 창밖을 내다봤다.
창문을 내리자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이 코앞에 있었다.
지음이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었지만 계절을 느끼는 건 처음이라 이런 변화가 그녀에게도 신기하긴 했다.
그녀가 차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동희가 슬쩍 그녀를 보았다.
“보기 좋다, 지음아.”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아까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것도 그렇고...... 달라진 거 같아서. 보기 좋다고.”
“됐어, 무슨.......”
핀잔을 주면서도 지음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
지음을 태운 차가 작업실 앞에 섰다.
“들어가 볼래?”
“어? 너 오늘 선생님 오시는 날이라며. 다음에...... 다음에 올게.”
“그래, 그럼.”
지음은 자신과 닮은, 워낙 낯을 가리는 동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차가 사라지고 나서 천천히 작업실을 돌아봤다.
예전에 강진의 형이 사용하던 곳이라고 했다.
형은 사업이니 경영이니 그런 것보다 미술이나 예술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도 했다.
「그런 곳인데...... 내가 써도 돼요?」
어렵게 형 얘기를 한 걸 알기에 지음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군가에겐 가족이라는 게 당연한 존재이지만, 또 어떤 누군가에겐 가족의 얘길 드러내는 것조차 고통일 수 있었으니까.
지음이 양아버지에 얽힌 얘기를 강진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처럼.......
지음은 어차피 계약관계일 뿐인데 그런 밑바닥까지는 강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강진이 형 얘기를 꺼낼 때마다 머릿속에 자신을 닮았다는, 그가 마음을 두었다는 형수에 대한 얘기가 궁금했지만 그걸 물을 순 없었다.
「응. 당신이 써 주면 좋을 거 같아.」
그는 지음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지음은 다시 올려다봐도 고풍스러워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작업실 앞에 벌써 누군가 서 있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눈에 익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생각하며 지음이 한발 다가섰다.
“아...... 혹시 선생님?”
지음의 기척을 들었는지 남자가 돌아보는데, 창국이었다.
“어.......”
지음은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게 너무 놀라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왔어요? 한참 기다렸는데.”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왔...... 아니, 왜 왔어요?”
이곳은 강진이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너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창국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가 다가서는 걸 그만두고 제자리에 서서 어깨를 으쓱했다.
“지음 씨가 기다리는 사람이 제가 맞을 겁니다.”
“네?”
“미림이한테 부탁했습니다, 제가.”
지음은 창국이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안심이 되면서도 강진이 머리에 스쳤다.
하지만 요즘 들어 지음은 그와는 계약관계일 뿐이라는 걸 매번 다짐하듯 떠올리고 있었고, 그러니 창국과 미술을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 군요. 놀라긴 했어요, 선생님이 오실 줄은 몰라서. 의사 쌤이시라.......”
“아, 그게 사실...... 민준이랑 그림 자주 그렸어요. 옛날 생각도 나고.......”
‘지음 씨랑 이렇게 시간도 보내고 싶어서요.’
창국은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음이 작업실 문을 열며 말했다.
“난 그림 그려본 적도 없고...... 잘 몰라요. 그냥 해보고 싶어서 얘기한 건데.”
“뭐 어때요. 부담 갖지 말아요. 나랑 그냥 이렇게 노는 거죠.”
창국이 지음을 따라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빙그레 웃었다.
***
강진은 주말에 지음과 함께 작업실에 가 볼 생각이었지만, 일이 밀려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녀를 먼저 작업실로 보내놓고 회사로 온 강진은 밥도 먹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빨리 끝나야 빨리 그녀를 보러 달려갈 수 있으니까.
전화가 울리자, 강진은 누군지 확인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아, 강진아. 나야.
“어, 왜?”
상대는 희라였다.
강진은 전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대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주말인데 뭐 해?
“용건. 없으면 끊는다.”
-자, 잠깐만! 급하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뭔데.”
방해받는 강진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일단 밥 먹을래?
“김희라, 내 말 안 들었어?”
-중요한 얘기야, 꼭 봐야겠어.
“하.......”
결국 강진이 펜을 놓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정말 중요한 얘기라 그래. 내가 너한테...... 언제 이렇게까지 한 적 있어? 우리가 밥 한 번도 못 먹을 사이도 아닌데.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더 듣다간 2절, 3절도 더 할 거 같아서 강진이 말을 툭 잘랐다.
“어디?”
-응?
“어디로 가냐고. 만나자며. 회사로 올 건 아니잖아.”
-너...... 오늘도 회사야? 그럴 줄 알았음 내가 데리러 갈 걸 그랬다.
“됐고. 어디냐고.”
-어? 아, oo호텔 레스토랑. 내 이름으로 예약해놨어.
“......금방 가.”
강진이 일어나서 재킷을 집어 들었다. 빨리 다녀오는 게 상책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전에, 한지음 먼저 좀 보고 나서.
한편 그와 통화를 마친 희라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꺄아!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치 아이처럼 거실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희라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 김건국이 허허 웃다가 물었다.
“뭐라는데 그렇게 좋아해?”
“뭐라기는요, 만나자고 하지. 아빠, 같이 나가서 밥 먹어요.”
희라가 얼른 건국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쯧쯧.”
건국이 혀를 찼지만 하나뿐인 딸이 기뻐하는 걸 보는 일은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다만 돌아가는 형국을 보아하니 희라 혼자 열을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걱정이긴 했다.
“내가 가도 되는 자리야? 둘이 데이트나 하지.”
“아빠. 아빠가 가서 잘 좀 말해주세요. 내 말은 듣나 뭐.......”
벌써부터 말을 듣지 않는 남자를 어쩌려는지.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눈에 어여쁜 딸이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미래의 일은 아직 강진과 사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으니 오늘 나가서 그가 제 딸에게 정말 관심이 없는지, 희라 혼자만의 생각인지 알아보고 난 후 걱정해도 늦지 않는다.
“......알았다.”
“네, 그럼 난 얼른 준비하고 나올게요.”
희라가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가는 걸 보고 건국도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같은 시각, 지음은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캔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싶은 건 분명 머릿속에 가득했다.
갈색으로 된 흙길, 자갈이 많았던 곳. 양옆으론 크고 작은 풀이 엉망으로 나 있었고, 길이 끝나는 곳에 하늘이 맞닿아 있던 곳.
썩 좋은 기억도 아니었는데도 결국 지음이 처음으로 그리고자 한 건 보육원 근처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창국 역시 지음을 가르치려고 붓을 들었다가 그녀의 고뇌가 깊어 보이자 천천히 다가왔다.
“뭐 그리는 거예요?”
“아, 그냥...... 아직.”
캔버스 가운데를 질러 그린 황톳빛 선들을 보고 창국이 빙그레 웃었다.
“나중에...... 좀 그리고 나서 보여드릴게요.”
지음이 몸을 일으켜 캔버스를 가렸다.
창국은 발그레 붉어지는 지음의 뺨이, 수줍은 듯 말하는 입술이 그냥 한지음이 예쁘고 제 마음이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음 씨, 거기 뭐...... 묻었는데.”
“네? 어디요?”
지음이 손을 올리려는데 창국이 손가락 끝으로 수성 물감을 콕 찍어 그녀의 보드라운 볼에 살짝 묻혔다.
“그게.......”
장난은 쳤지만, 이렇게 되니 닦아주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강진이 서 있었다.
“......형이 여기 어떻게 있습니까?”
강진이 지음에게로 다가서며 형형한 눈빛으로 창국과 지음을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