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미림의 팔을 붙든 창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빠? 아, 아파! 오빠, 왜 그래요? 미술 선생님, 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
미림이 팔을 떨쳐내며 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창국이 손에 힘을 풀었다.
“하아.......”
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뭣 때문에 지음의 얘기만 나오면 이토록 흥분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미림이 곱게 화장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팔을 문질렀다.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냐. 미안하다, 미림아.”
창국은 간신히 감정을 눌러 참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쓴 미소를 지었다.
***
지음은 강진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지음으로서도 이젠 돌이킬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아까 일 때문에 가봐야 한다던 정후를 집 앞에서 만났다.
강진과 함께 차에서 내려 정후 앞으로 가니 그가 조그마한 박스를 지음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멀뚱히 보고 서 있기만 하자 강진이 말했다.
“풀어봐, 당신 거야.”
“그러게, 너는 왜 맨날 그렇게 강진이 전화를 죽어라 안 받는 거야?”
정후의 타박이 섞인 말에 강진과 정후를 번갈아 보던 지음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거기엔 스마트워치가 들어있었다.
“아.......”
그제야 정후의 말을 이해한 지음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놨다.
강진은 빈 상자를 정후에게 건네고 내용물을 지음의 손목에 직접 채웠다.
“이걸.......”
“그래. 하고 다녀, 나 애태우지 말고.”
지음은 정후 앞에서 티 나게 저를 챙기는 강진 때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후가 상자를 흔들며 세워둔 차로 향했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빠져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뭘 새삼스럽게. 한지음, 그거 잘 차고 다녀. 강진이가 그만 걱정하게.”
정후가 사라지자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서 지음이 강진을 올려다봤다.
그가 지음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식사 자리가 끝난 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희라는 그날의 기억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틈만 나면 미림과 함께 지음의 흉을 보기에 바빴다.
평소처럼 지음에겐 사무실 잡일을 맡겨놓고 희라는 미림과 탕비실에서 수다에 빠져 있었다.
“내가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니까?”
“그랬어? 하긴 언니만 혼자 오는 것도 좀 그렇더라.”
“내가 미쳤지.......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거기에 가서는, 아휴.”
“그리고 그림은 무슨 그림이야? 학교도 못 다닌 애가.”
“그림?”
“아, 맞다. 언니 모르는구나? 강진 오빠가 왜 나한테 미술 선생님 하나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
“근데?”
미림을 보는 희라의 눈빛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거 한지음, 쟤 그림 배우게 하려고 그런 거야.”
“확실해? 그런 얘기...... 없었잖아.”
“뭘. 엄마한테 들었어. 강진 오빠가 민준 오빠 쓰던 작업실 손봤다는데 뭐. 확실해. 대체 이제 와 미술 가르칠 만한 사람을 어떻게 구하냐고. 그것도 초보를.”
툴툴거리던 미림이 희라를 보았다.
분해서 식식거리는 희라를 힐끗 보며 고소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공공의 적이 지음인 건 변하지 않았다.
“나도 짜증 나, 언니. 강진 오빠 옆에서 떡하니 앉아 있는 꼴이라니. 아 이러다 진짜 혼인신고하고 계속 강진 오빠랑 사는 거 아냐?”
“.......”
미림의 말을 듣는 희라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서 너무 그럴 거 없다고 위로라도 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창국이었다.
며칠간 내내 연락도 없고 미림이 해야 겨우 받던 사람이라 미림은 그의 전화가 반가웠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만. 어, 오빠.”
-어, 미림아. 바쁘지? 바쁜데 미안하다.
“아냐, 괜찮아요. 쉬고 있었어. 무슨 일인데?”
-뭐 좀......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미림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뜸 들이던 창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강진이가 말했던 미술 선생 말인데.
“네? ......네.”
-그거 내가 하면 어떨까? 강진이한텐 말하지 말고 내가 했으면 좋겠는데.
“오빠가? 오빠는 의사잖아, 근데 무슨 그림을?”
-민준이 따라서 같이 그림도 배우고....... 원래 미대 전공하려고 했으니까. 초보자 가르치는 거라면 가능할 거 같은데.
“오빠...... 바쁘지 않아?”
대답을 하는 미림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긴 해도 미림이 네가 구하기 힘들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생각해 보니 힘들게 찾아다닐 거 없이 나도 가능할 거 같고.
옆에서 미림과 창국의 얘길 듣던 희라가 미림의 팔을 툭 쳤다.
“그러겠다고 해.”
“오빠, 잠시만. 뭐라고, 언니?”
“그러겠다고 하라고, 얼른.”
희라의 재촉에 미림이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알았어, 그럼 내가 강진 오빠한테 말해볼게요, 아 오빠라는 건 빼고.”
전화를 끊은 미림이 희라를 돌아봤다.
“언니 왜? 그걸 왜 창국 오빠한테 하라고 해? 뭐 좋은 일이라고.”
“너...... 솔직히 말해봐. 창국 씨 좋아해?”
“아냐! 뭐래....... 그냥, 그냥 엄마 때문에 만나는 거야. 오빠 집에서도 나 만나는 거 아니까 선보라고 안 한대서.......”
희라는 그 말을 하면서도 미림의 볼이 불그스름 달아오르는 걸 놓치지 않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니까 소개해 줘.”
“왜? 난 한지음 꼴 보기 싫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 창국 씨가 한지음한테 마음이 있어.”
“뭐?”
희라의 말에 미림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짜증이 확 일어서 희라를 노려보는데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냥 줘버리라고. 너, 한지음한테 언니라고 하고 살 수 있어? 강진 씨 옆에 저러고 있는 걸 볼 거야, 계속?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네 언니 행세하는 꼴을 볼 거냐고. 강진 씨랑 너희 집 돈 많은 거 보고 들러붙어 있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건데?”
“그건.......”
“그리고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누구든 알아봐 준다고 했고, 주위에 연락도 다 끊겨서 해줄 사람도 없다며. 고마운 일이지.”
미림은 희라의 말이 맞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괜히 신경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희라와 미림이 지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동안에도 지음은 사무실 잡일을 도맡아 하느라 하루종일 바빴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올 쯤에야 지음은 자리에 앉아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책상을 정리하던 지음의 눈에 들어온 건 강진의 모습이었다.
그가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한지음 씨.”
“대표님?”
부른 건 지음인데 강진의 목소리에 희라가 번개같이 반응을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 실장님. 내가 한지음 씨와 갈 데가 있는데. 기획팀 업무 끝났습니까?”
희라에게 말을 하는 동시에 강진이 지음에게 손짓을 했다. 퇴근 준비를 하라는 무언의 표시.
희라는 강진과 지음을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꽉 물었다.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지음은 희라의 얼굴이 종이처럼 일그러지는 걸 보며 고개를 꾸벅하고 강진을 따라나섰다.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될 수도 있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갔는데, 강진은 마치 중대한 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흥분한 듯도 보였다.
“어디 가는 거예요?”
집에 가는 거라면 굳이 사무실까지 데리러 오진 않았을 테니까.
강진은 흥분을 감추지 않고 문을 열었다.
“타, 갈 데가 있어.”
차에 오른 지음은 집으로 향하는 길을 보다가 강진을 돌아봤다.
“대체 어딜 가는데 그래요?”
“있어. 가보면 알아.”
***
“다 왔다. 내릴까?”
강진은 궁금증은 있는 대로 키우고, 기어코 도착할 때까지 대답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를 따라 내린 곳은 주변이 온통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산책로 비슷하게 돌이 깔린 바닥을 보며 강진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에 조그마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여긴 어딘데 이렇게.......”
지음이 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리자 강진이 그녀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꼭 비밀의 화원 같지?”
“......네.”
강진과 만들었던 그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할 줄 알았어. 들어가 보자.”
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무로 된 외관이 그랬고, 창문틀이며 커다란 자물쇠가 매달린 문이 그랬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음은 그제야 그곳이 뭘 하는 곳인지 알게 되었다.
화실이었다.
곳곳엔 이젤을 비롯한 캔버스가 놓여 있었고, 나무 의자, 미술 도구, 커다란 책상과 책장들.
휴식공간처럼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꾸며진 곳도 있었다.
소파에 간이침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예스러운 나무 의자를 손으로 쓸어보던 지음이 강진을 보며 물었다.
“당신 작업실.”
“작......업실이요?”
“그림 배우기 시작하면 이런 공간도 필요하니까. 마음껏 그리라고.”
“네? 강진 씨 난, 이런 것까진 필요 없어요. 그냥.......”
“이런 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 줄 수 있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강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섹시하고 매혹적이라 지음은 침을 꼴깍 삼켰다.
“.......”
“당신이 원하는 거, 하고 싶은 거, 해 보고 싶은 거. 보기에 좋은 거나 하기에 좋은 거....... 뭐든 다 해 줄게.”
“.......”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어서 지음은 지금 제가 어떤 표정으로 강진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심장 소리가 바로 귀 뒤에서 들릴 만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별을 따다 달라고 하는 건 어렵겠지만.”
강진이 처음 그의 집에서 지음을 만났을 때 꺼냈던 농담을 던지며 빙그레 웃었다.
지음 역시 그를 따라 웃었다.
“이번엔 웃네.”
“.......”
“예쁘다, 한지음. 원래부터 예쁜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웃으니 더.”
부끄러운지 지음의 얼굴이 붉어지려 하자, 강진이 편히 말했다.
“미림이가 선생님도 구했다니까 잘 배워, 재미있게.”
“누군데요?”
“나도 몰라. 그냥 예전부터 아는 사람인데 그림에 조예가 깊다고 하더군.”
“고마......워요.”
너무 엄청나서 고맙다는 말로 될지 모르겠지만.
지음의 마지막 말을 삼키며 강진을 올려다봤다.
강진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지음의 눈과 코에, 입술에 차례로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았다.
이제 그의 손길에 지음 역시 익숙해졌으니까.
그가 지음의 목을 살며시 깨물었다. 블라우스에 뜨거운 손길이 닿았다.